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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시절 인연'에 따라, 사람은 다 때가 있다. 그 때를 잘 알아야 한다.

292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9월 10일)

오늘부터 천안 강의를 매주 화, 목으로 10회 나가야 한다. 이젠 개학이다. 그래 오늘 <인문 일지>를 좀 일찍 공유한다. 곧 출발애야 한다. 

매미와 귀뚜라미의 시간은 늑대와 개 사이의 시간처럼 경계이다. 9월과 함께 몇 일전은 그 경계의 시간이었는데, 어제와 오늘은 다시 여름이다. 어쨌든, 낯 햇볕은 아직 따갑지만, 낭창낭창한 귀뚜라미 소리는 잦아들었다. '시절 인연(時節因緣)'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본래 불교 용어로 “모든 현상은 어떤 시기가 되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는 뜻이다. 이 '시절 인연'에 따라, 사람은 다 때가 있다. 그 때를 잘 알아야 한다. 이를 고전에서 '시중(時中)'이라 한다. '시중'의 사전적 의미는 '상황에 맞게 대처하여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중용>> 제2장의 "군자가 중용을 이룸은 때에 맞게 하기 때문이다(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라는 문장에서 비롯된다. 그냥 '때에 맞게 행한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공자의 중용은 산술 평균이 아닌 시중(時中)이다.

중용에 대해 조금 정리를 해 본다. 중용이란 무엇인가? 중용은 책 이름이기도 하지만 우주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 삶의 방식이다. "중용적으로 산다"는 것은 한 인간이 우주가 부여한 자율 조절 장치를 통해 자신의 삶에 중심을 잡고 균형을 맞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 매 순간 벌어지는 일상사에 자신의 감정을 조화롭게 표출하는 '중화(中和)의 중용', 
▪ 그 때 그 때 무엇을 어떻게 할지를 고민하며 사는 '시중(時中)의 중용', 
▪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영혼에 충실한 '신독(愼獨)의 중용' 등등은 
인간의 삶에 벌어지는 많은 상황 속에서 자기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이냐"고 물어보면 그 답은 쉽지 않다. 저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방정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용은 다양한 삶의 방식을 꿰뚫는 원리이다.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어지지도 않고, 넘치거나 모자라지도 않은 자기중심과 균형을 잡고 살아가는 중용의 인생은 우주적 존재방식을 그대로 삶에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용은 중간이 아닌 역동적인 평형'이다. "중(中)은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 있지 않고,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 것의 이름이다."(주자) 여기서 용(庸)은 '평상시, '언제나'란 뜻이다.  중용은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일과 삶의 균형', '관계의 중용', '행동의 중용', '판단의 중용' 등 인간은 중용을 통해 완벽한 삶을 구현할 수 있다.

사람은 다 때가 있다는 말을 하다가, '시중'이라는 말과 여기서 나온 '중용' 이야기로 빠졌다. 사람이 살면서 판단하기 어려운 게 ‘때'를 아는 것이다. 특히 시작할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건 더 힘들다. 바다에는 밀물과 썰물이 몰아치는 ‘물때'가 있다. 노련한 어부는 물때를 잘 파악해, 물이 들어올 때 바다로 나가고, 빠지기 전에 돌아온다. 지혜로운 농부 역시 계절에 부는 바람의 밀도로 씨를 뿌리고 거둬야 할 때를 안다. 높은 산을 오르는 등반가 역시 마찬가지다. 앞으로 나아가며 오를 때와, 물러서며 내려올 때를 알아차린다. 돌이켜보면 잘못된 결정으로 실패를 하는 경우보다 오히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해서 불행해지는 경우도 많다. 삶은 이처럼 우리가 선택한 ‘찰나'의 총합이다.


생명의 뿌리/아이다 미츠오

눈물을 억누르고 슬픔을 견뎠을 때
불평을 담아두고 고통을 견뎠을 때
변명을 않고 잠자코 비판을 견뎠을 때
분노를 삭이며 꿋꿋이 굴욕을 견뎠을 때
당신의 눈빛은 깊어지고
생명의 뿌리도 깊어진다


여름 매미의 시간이 가을 귀뚜라미의 시간으로 바뀌는 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다. 그저 그 시간을 묵묵히 살아내면 그 뿐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주어진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 더 나은 사람으로 깊어지는 것이다. 계절이 매듭을 지을 때, 뜻을 정성스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건 생각하는 사람이면 응당 할 일이다. 여기서 생각은 세상과 더불어, 주변 사람들과 나란히, 접하는 사물과 함께 마음의 호흡을 가져가는 것이라면, 망상은 주어진 상황에 아랑곳없이 의식의 흐름이 제멋대로 뻗어 나가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고 싶다. 생각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함께 하는 것이다.
▪ 세상과 더불어 - 세상의 변화를 읽으며
▪ 주변 사람들과 나란히 - 연대의 마음으로
▪ 접하는 사물들과 함께 - 영성의 마음으로

누구나 하루를 애써서 열흘을 만들고, 한 달을 만들고, 한 해를 만드는 것이다. 인생에는 다른 샛길이 전혀 없다. 나날이 길함을 쌓는 것도, 흉함을 퇴적하는 것도 모두 이 하루의 삶을 어떻게 사는가에 달려 있다.  오늘을 잘 살면 된다. 왜냐하면 오늘을 채워서 어제를 없애고 내일을 이룩하는 일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기 때문이다. 오늘을 어제에 매어둔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붙잡혀 있게 된다. 오늘을 내일에 넘겨도 별 소용없다. 희망에 부풀든, 불안에 떨든 내일 우릴 기다리는 건 오늘 뿐이다.  내 만트라가 "내일은 없다. 오늘이 좋습니다"이다. 이 만트라를 소환하면, 지치고 무기력하며 화가 나가도, 불현듯 내가 '오늘만 산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막 일어난 감정과 생각이 바뀌며 편안해 진다. 어떻게 생각과 감정을 바꾸는가? 내일이 없으니 오늘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을 다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때 나를 옭아매던 어떤 한계에 갇힐 이유가 없다는 생각과 감정을 다시 갖게 되고, 오히려 일상의 습관을 놓치지 않게 된다. 그냥 게으름 피우고 싶은 마음까지 각성하게 하게 한다. 그리고 또 재미난 것은 어떤 상대가 나를 괴롭히면 내일은 내가 없을 테니 그가 원하는 대로 다 받아주어도 된다고 감정을 바꾼다. 

생각 있는 사람의 삶은 오늘만 산다. 그리고 지금-여기에서만 산다. 이 사실을 소환하는 수준에 따라 그 강렬함의 차이가 있다. 어떤 이는 수동적으로 연기론에 따른 인연을 따르지만, 어떤 이는 적극적으로 인연을 창조하는 힘을 쓰기도 한다. 이렇듯 한 생각을 바꾸면 이런 변화가 가능해진다. 누구나 그럴 수 있다. 다만 깨달은 사람은 습관이 생겨서 아무런 망설임이나 혼돈 없이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런 변화가 이루어진다는 차이가 있다. 애써 마음의 에너지를 짜서 사용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다음 세 가지이다. 즉 지혜, 아니 나란 누구인 가를 깨닫고, 이어서 절제, 용기를 갖는 것이다. 이게 삶을 '잘 살 줄 아는 방법인 것 같다.  내 마음 속에, '내가 만든' 이런 원칙들이 자리 잡을 때,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런 절제로 내가 나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더 배워서, 자신의 존재 그 자체를 즐기고 기뻐하며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이게 내 삶의 철학이다.

이용휴는 조선 후기 최고 문장가로 꼽히는 사람이다. 그가 쓴 <<당일헌기(當日軒記)>>는 삶의 매듭이 새로 시작되려 할 때, 심장에 새기기 좋은 글이다. "사람이 오늘의 뜻을 모르고 나서부터 세상의 도가 어긋났다. 어제는 이미 지났고, 내일은 아직 안 왔으니, 어떤 일을 하려 하면 오직 오늘에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경계한다. "하늘은 스스로 게으름을 몰라서 항상 움직이거늘, 인간이 어찌 빈둥대겠는가." 

나날이 자신을 충실히 갈고 닦는 사람이어야, 날들이 단단히 모이고 겹 쌓여서 드디어 바람직한 일을 하는 사람도 될 수 있고, 큰 사람도 될 수 있고, 거룩한 성인도 될 수 있을 테다. 계절의 첫머리에 한 글자 한 글자 새기면서 오늘의 깊은 뜻을 생각한다. 오늘은 다음과 같이 나뉜다.
▪ 우리 중엔 밝디밝은 이 하루를 그저 버리는 날(消日)로 여기는 사람이 있고, 
▪ 헛된 날(空日)로 보내는 사람이 있고, 
▪ 하늘의 도를 좇으며 온전한 오늘(當日)로 바꾸는 사람이 있다. 

이용휴의 <<당일헌기>>가 이해된다. 편집문화실험실 장은수 대표에게서 배운 거다. 나는 <인문 일지>>를 쓴다. 하루를 온전한 하루로 살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하늘의 도를 따른다는 말을 <<주역>>을 읽다 보면, <충전 괘>의 하늘 상을 보고 공자가 우리들에게 "자강불식'하라는 말로 독려하는 <대상전>을 만나다. 

공자는 <건괘>에 대해, "象曰(상왈) 天行(천행)이 健(건)하니 君子(군자) 以(이)하야 自彊不息(자강불식)하나니라" 했다. "자강(自强)"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를 강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불식(不息)"은 '그러한 군자의 노력은 하늘의 운행과도 같이 그침이 없다"는 말이다. 이 "자강불식"은 <<중용>>의 "지성무식(至誠無息)"(26장)과 같은 명제로 본다. 어쨌든 스스로 강해질 수 있는 이야말로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다. 다른 누구도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주지 못한다. 강해지고 싶다면 스스로 강해지는  길 밖에 없다. 하늘의 운행이 굳세니(씩씩하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스스로 굳세어 쉬지 않는다'는 거다. 다시 말하면, '군자는 스스로 강해져서 멈추지 않는다'는 거다. 이것이야 말로 하늘의 운행을 본뜬 <건괘>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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