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영어로 원하는 것을 우리는 want'라고 한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want'를 만들어 낸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우리는 영어로 'like'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좋아하는 것(like)'은 없는데, 그저 사회적으로 원하는 것(want)'을 추구하며, 행복해 하지 못한다. 그건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 원하는 걸 계속 추구하다 보면 훨씬 더 많이 벌어야 하고, 그러려면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찔러야 되고, 더 많이 뺏어야 된다.
어떻게 하여야 하나? 코로나-19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코로나-19 이전에 우리는 더 많이 돌아다니면서 "저것도 가져야지, 저것도 가져야지"하면서 끝없는 불만족의 사이클을 돌다가, 사회적 거리 두기로 혼자 있으면서 사람들은 행동이 바뀌었다. 단 것을 좋아하는 분들이 1000번 돌려서 '달고나'를 만든다는 거다.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것을 수고스럽게 하면서 만족하고, 행복해 하는 것을 알았다. 사회적으로 원하는 것보다 내가 좋아하는 것 위주로 가면, 우리 삶이 더 행복하다. 나는 그렇게 산다.
I want to+동사는 '~하고 싶어'이다. To 다음에 동사가 쓰이며, 미래에 앞으로 그 동사의 동작을 할 것이다라는 것이다. I want+명사는 현재는 그 명사가 결핍인 것이다. 미래에 갖고 싶은 욕망이다. 결핍 대신 궁핍을 써도 된다. 그러니 결핍이나 궁핍을 느끼지 않으려면, 미래 그걸 원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자유롭다.나는 원하는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자유다. 어서 많이 들어 본 말 아닌가?
TMI: 영어 want는 '바로 지금 일어나는 욕구(desire), 하고 싶은 것을 말할 때 쓰인다. Hope를 쓰는 경우는 지금 당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Hops는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서 말할 때 쓰인다. Wish를 쓰는 경우는 지금 당장 그 상황이 불가능한 경우나 잘 일어나지 않는 경우에 쓰인다.
어쨌든 사는 건 '균형 찾기"이다. 자동차이든, 삶이든 엑셀과 브레이크가 공존할 때 균형이 이루어진다. 우린 가끔 이성적인 사고를 하겠다는 이유로 세상에 닿을 수 있는 모든 감각의 촉수를 거둬들이곤 한다. 그러나 이성도 감각의 조화 속에서 더 사려 깊어진다. 자동차로 말하면, 이성은 브레이크이고, 감성은 엑셀레이터이다. 그러나 감성이 메마르면 이성도 역시 할 일이 없어진다.
나는 세상 모든 생명과 연결되어 보살핌을 받는 존재이다. 내 존재만 혼자서는 살 수 없다. 그건 좀 생각만 하면 그렇다. 이성의 동물이라는 우리가 그 이성을 하루에 몇 분이나 써가며 사는가? 다 기분과 감정에 따라 선택하고, 습관처럼 밀려드는 일상에 휩쓸려 하루를 보낸다. 우린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매우 적게 느낀다. 그래 감각의 지평을 확장해야 한다.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하며, 느낄 수 있지만 정작 이렇게 느끼는 감각은 천천히 약해져 간다. 우리는 너무 많은 지식을 얻는다. 그만큼 느낌의 힘으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세상의 답은 하나만이 아니다. 결과의 답도 있지만, 과정의 답도 있다. 살면서, 과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균형 찾기이다.
그 휩쓸리는 마음의 작동 원리를 그래도 살펴, 사려 깊은(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선택을 하여야 내가 살고 있는 집단의 미래도 달라지리라 믿는다. 모든 일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도 이유가 있어서 만난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모든 만남에는 의미가 있으며, 누구도 우리의 삶에 우연히 나타나지 않는다. 내가 만난 누구든 크고 작은 자국을 남겨 나는 어느덧 다른 사람이 되어 있기도 하다. 수렴하고 발산하는 순환 속에서 내가 다르게 변하는 것이다. 이걸 우리는 성장이라 한다. 소유 욕망에 사로잡혀 집착하기보다 존재로 건너가기를 하며, 자유를 확장해 나갈 때 발산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관계와 활동이 작동된다.
보르헤스의 말이다. " 우리의 삶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이들은 각각 특별한 존재이다. 누구든 항상 그의 무언가를 남기고, 또 우리의 무언가를 가져간다. 많은 것을 남긴 사람도 적은 것을 남긴 사람도 있지만, 무엇도 남기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누구든 단순한 우연에 의해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증거이다."
어딘 가에 나에게 정해진 섭리나 계획이 있고, 그것을 일깨우기 위해 적절한 시기에 사람들이 내 앞에 나타난다. 지금의 내 삶에 그 관계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들은 온다. 오늘은 <유라 극장> 2차 워크숍이 있는데, 내일로 미루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내 영토가 확장된다. 아침에 확장의 프로세스를 이순석 부장 담벼락에서 배웠다. 영토의 확장을 꿈꾸려면, '들뜸 같은 흥분이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을 보면, 꿈이 없고,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려는 생각도 없고, 활동도 없다. 그러한 활동을 일으키려는 관계 마저도 다 단절시키고 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만났다.
여기서 영토의 확장은 성숙과 발전을 의미한다. 겉으로 든 안으로 든 마찬가지이다. 무한을 꿈꾼다. 조직에서 이 무한 확장은 '창발'로 이루어진다. '창발'을 프랑스어로 에메르정스(emmergence, 솟아남)라 한다, 그 반대는 임메르지옹(immersion, 물에 담그기)이 아니라, 권위(autorite)이다. 영어로는 이머전스(emergence), 한국어로는 '창발(創發)'이라 한다. '창발'을 사전에서는 '남이 모르거나 하지 아니한 것을 처음으로 또는 새롭게 밝혀내거나 이루는 일'이라 설명하고 있다. 요즈음 이머전스, 창발은 '작은 것들(뉴런, 박테리아, 개인)'이 다수가 되면서, 개별 능력을 훨씬 뛰어 넘는 어떤 속성을 드러낼 때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단순한 부분의 합보다 훨씬 더 큰 능력과 힘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 필요한 것이 워크숍이다. 창발이 일어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권위적인 조직은 소수의 사람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항로를 결정하는 것이라면, 창발적 조직은 의사 결정이 '내려가는' 경우보다 많은 조직원 또는 이런 저런 이해당사자들로부터 솟아오르는 경우이다. 이 부분에서 인터넷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세상이 바뀌었다. 초연결시대이다. 창발은 토대를 존재로 들뜸 상태의 조성인 조건이나 전제가 필요하다. 그 들뜸의 상태를 통하여 '그 무엇'을 포착한 다음은 '그 무엇'을 위한 새로운 조건화의 과정을 통해서야 비로소 완성되며 다시 확장된다. "토대-들뜸-포착-조건화 과정"으로 시작해, 다시 새로운 조건화를 시발로 "들뜸-포착"의 길을 가는 창발이 가능하다. 여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경험에 대한 축적의 힘, 꾸준함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쯤에서 오늘의 시 한편을 공유하고, 매주 토요일마다 하는 와인 이야기를 이어간다.
끈/공석진
불
끈
힘주는 팽팽한 욕망
질질 끌려갈 수도
툭 끊어질 수도
그저
당기면 밀어 주고
밀어 주면 당기고
애당초 끈은
탯줄에 의지하여
세상 밖으로 안내하는
생명선
숱한 인연을
나의 심장에
단단히 동여맨다
질
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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