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8월 13일)
나는 좋은 글을 만나면, <페이스북>에 저장해 두었다가 편한 시간에 다시 읽고, 그걸 rewriting 한다. 그래야 내 새생각이 정립되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님의 "나의 무지로부터 타인을 보호하기"라는 칼럼을 경향신문에서 읽었다. 몇일 전에 나는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위인지학(爲人之學)'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선비들이 생각했던 공부는 '위인지학'과 '위기지학'으로 나뉜다. 여기에서 인(人)은 타인을 가리키고, 기(己)는 자기 자신에 해당 한다. '위인지학'은 다른 사람을 위한 공부이다. 타인에게 보여주고 인정받기 위한 공부이다. 반대로 위기지학은 자신을 위한 공부이다. 자신을 위한다는 것은 자기 욕망을 들여다보고 혼자 있을 때 삼가고 조심하는 공부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자신의 글에서, 19세기 공부는 '나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공부'였다고 말했다. 19세기 교육에서, 삶의 목적은 개인의 긍정적 잠재력을 개발하여 행복을 성취하고 공동체에 기여하는 것인데, 공부를 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방치, 학대, 파괴하게 된다는 것이다. '위기지학'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산업화 이후 공교육이 인간의 보편적 권리이자 의무가 되면서부터 공부의 성격이 변했다고 본다. 이제 공부는 정신적 자기 구원이 아니라 물질적 기반 구축을 위한 것이 되었고, 출세의 사다리에서 상층부에 올라가기 위한 경쟁 수단이 됐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이를 '타인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공부'라 명명한다. 공자의 표현으로 하면, '위인지학'이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런 공부는 누구에게도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집념에서 출발한다.
신형철은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나를 구원하고, 너를 이기는 공부를 하는 동안 내 안에 뿌리내린 맹목과 확증편향에 대한 자기 교정으로 서의 공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폭력의 주체가 될까 두려워하며 자기를 성찰하는 공부, 그러니까 '나로부터 타인을 지키기 위한' 공부를 제안한다. 나를 위한 공부와 너를 이기기 위한 공부를 넘어, 나의 무지로 부터 타인을 보호하는 공부 말이다.
최근에 등장한 대선 후보의 두 명이 문제이다. 그들은 정치를 시작하며, 이제 와서 공부를 하겠다고 한다. 한 명은 수많은 학자들과 활동가들이 축적해 놓은 노동인권 담론을 모르고 있었고, 또 하나는 개인의 존엄이자 자기 결정권이라는 근대적 인권 담론에 힘입어 개인이 국가에 '충성'한다는 것이 얼마 위험한 발상인지 모른다. 둘의 공통점은 탈원전이다. 이들은 원전산업의 경제적 효율성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그로 인해 일어난 또는 일어날 비극에 대한 성찰은 없다. 오로지 돈, 돈, 돈 뿐이다. 사람은 안 중요하다.
무지의 결과이다. 신형철은 무지가 조롱의 대상은 아니라고 하면서, 무지가 무시의 결과라면 이야기는 다른 문제라고 말했다. "역사적 폭력과 그것이 인류에게 가한 상처에 대한 무신경함"이 문제인 것이다. 120시간 노동 발언은 노동착취의 역사가 남긴 상처에 대한 무시이고, 국민의례에 대한 자부심은 국가가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한 국가주의의 불행한 역사에 대한 무시이며, 탈원전의 문제를 산업적 측면에서만 접근하는 것은 원전 사고로 인해 인류가 겪은 비극에 대한 무시이다. 이런 무시로 서의 무지는 과거와 현재의 모든 피해자들에 대한 폭력이 된다.
깊은 통찰을 얻었다. 이젠 "무지는 개인의 불행과 사회의 파멸을 초래하는 범죄의 원인이니 일종의 교육 안전망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가슴에 꽂힌다. 빅토르 위고 했다는 말, "무지의 굴을 파괴하면 범죄라는 두더지도 파괴된다"도 금방 알아먹겠다. 그리고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1813)에서 수전노 스크루지의 회개를 돕기 위해 등장하는 유령 중 하나가 기괴한 모습의 소년과 소녀를 데리고 다는 데, 그들의 이름이 각각 "무지(ignorance)"와 "궁핍(want)"였던 이유도 알겠다. 우리 사회의 두 가지 커다란 문제이다. 무지와 욕망. 유령이 더 강조했던 것은 소년, 무지의 위험이었다.
그래 나는 이제 멸치 똥을 "똥이라 부르지" 않을 생각이다.
멸치 똥/복효근
똥이라 부르지 말자
그 넓은 바다에서
집채만한 고래와 상어와
때깔도 좋은 열대어들 사이에서
주눅들어 이리저리 눈치 보며
똥 빠지게 피해 다녔으니 똥인들 남아 있겠느냐
게다가 그물에 걸리어 세상 버릴 적에 똥마저 버렸을 터이니
못처럼 짧게 야윈 몸속에
박힌 이것을 똥이라 하지 말자
바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늘 잡아먹은 적 없이 잡아 먹혀서
어느 목숨에 빚진 적도 없으니
똥이라 해서 구리겠느냐
국물 우려낼 땐 이것을 발라내지도 않고
통째로 물에 넣으면서
멸치도 생선이냐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적마다 까맣게 타 들어갔을
목숨 가진 것의 배알이다
배알도 없는 놈이라면
그 똥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들어낸 자리
길고 가느다란 한 줄기 뼈가 있겠느냐
밸도 없이 배알도 없이 속도 창시도 없이
똥만 그득한 세상을 향하여
그래도 멸치는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
등뼈 곧추세우며
누누천년 지켜온 배알이다
뼈대를 지키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표작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아들에게 들려 주는 '행복해지는 법'이다. 나코마코스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 이름이다. 치 책에서 말하는 행복이 비결은 중용이다. 과도하면 더 이상 미덕이 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꼽은 사람의 가장 나쁜 품성이란 '자제력 없음", 또는 "방탕"이다. 이를 '아크라시아(akrasia)'라 한다. 이 말은 '힘'을 뜻하는 '크라토스(Kratos)'에 '박탈'을 뜨샇는 접두사 '아(a)'가 붙어서, 누군가를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없음'을 가리키며, '자제력 없음'을 의미한다. 반재를 엔크라테스(enkrates)라 한다.
'아크라시아'는 자신에 최선의 행동이 무엇인지 알면서 이에 반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건 대개 무지로부터 비롯된 행동이 대부분이다. 누구든지 그 일이 좋은 것인 줄 알면, 행한다. 행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좋은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제력이 없어서 가 아니라, 그가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몰랐기 때문에 행하지 않는 거다.
"자기가 현재 하고 일보다 다른 것이 더 좋으며, 또 실현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거나 생각한다면, 어떤 사람도 (현재 하는) 그 일을 계속하지 않을 거다."(플라톤, <<프로타고라스>>) 그러니까 모든 윤리적인 문제는 의지나 자제력의 문제가 아니라, 참된 지혜(sophia)와 지식의 문제이다. 그러니까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러나 공부의 양보다 중요한 것이 '방향'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얼마나'가 아니라, '어떤' 공부를 하느냐 이다.
2022년 대선 후보로 나온 일부 정치가들이 제대로 알기만 한다면, 제대로 행할지도 모른다. 그들이 제대로 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스스로 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니까 먼저 올바른 행동을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앎은 학문적인 인식(episteme)과 기술적인 지식(techne)과는 다른 실천을 위한 지혜(phronesis)와 관련되어 있다. 실천적 지혜란 특정한 상황에서 자신에게 무엇이 좋고 나쁘며, 유익하고 해로운가를 판단하는 일과 올바른 의견을 형성할 줄 아는 것과 관련된다. 이것이 없다면, 누구나 아크라시아에 빠질 수 있다. 아크라시아에 빠진 '자제력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행동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정(pathos) 때문에 그것을 하는 반면, 자제할 줄 아는 사람(enkratos)은 자기가 품은 욕구가 나쁘다는 것을 알면, 이성에 의해 그것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그래 최근에 계속되는 코로나-19나 무더위보다, 사회적 분위기가 더 심각하다. 그래 몇몇 정치가들은 국민들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정말로 올바른 일이 무엇인지 공부를 하고 나왔으면 한다. 그렇지 않으면 멈추어야 한다. 적어도 몽떼뉴의 <<수상록>이라도 정독을 했으면 한다. "한 마리 준마의 힘은 그 말이 적당한 때에 딱 정지할 수 있는가를 보는 것으로 밖에는 더 잘 알아볼 것이 없다. 분수 있는 사람들 중에도 줄기차게 말하다가 그만 끊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을 본다."(몽떼뉴, <<수상록>>) 노자도 말했다.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止不殆, 지지불태)라고 말이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 본다. "정치는 쉬워 보이지만 쉽지 않다. 우리가 축구를 보는 안목은 프리미어 리그지만, 실력은 동네 축구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성한용) 뭐든 오래해야 잘하는 법이다. "정무 감각은 모든 사안을 선거 유불리로 계산하는 얄팍한 능력이 아니다.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관심이요,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애국심이다."(성한용) 그런데 선거 유불리로 '막말'을 하고, 네거티브 공략을 한다. 보는 국민들은 속상하다.
그런 측면에서 몇 대선후보는 자격미달이다. 그런데 더 속상한 것은 그 자격 미달 후보들에게 몰려드는 국회의원들이다. 정치 문외한을 정치 지도자로 받드는 정치인들의 모습이 우습다. 어떤 캠프의 모습에서는 먹을 것 보고 본능적으로 달려드는 동물들의 냄새가 난다. 그가 대통령이 되면 이들의 잔치가 벌어질 것이다.
"좋은 정치인은 갑자기 솟아날 수 없다."(김택근, 시인, 작가) 정치는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정치인으로 성공할 수는 없다. 나쁜 정치는 민중의 삶을 피폐시키고 역사를 후퇴시킨다. 그래서 정치인은 시대정신과 균형감각을 지녀야 한다. 이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단히 민심을 살피고 현실을 직시해야 가능하다.
시인다운 멋진 표현이다. "차를 오래 몰다보면 운전은 머리가 아닌 몸 전체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치도 그럴 것이다. 노련한 정치인은 현안을 머리로만 이해하지 않는다. 가슴으로 느낀다. 정치인은 물음에 답을 하기 전에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그 배경을 살핀다. 답은 있으되 세상일에는 정답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인은 최선을 찾되 최선에 이르기 어려우면 차선을 선택한다.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면 차악을 모색한다."(김택근)
몇몇 대선 후보는 왜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소양과 식견은 날것 그대로여서 비린내가 진동한다. 실언과 망언은 듣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이다. 이를 나무라면 정치를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으니 부족한 면은 차차 채워가겠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속성 과외로는 결코 시대정신과 균형감각을 체득할 수 없다. 정치는 여기(餘技)가 아니다. 국운을 좌우하는 숭고한 기술이다. 그리고 국민은 실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고 냉소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럴수록 정치를 무조건 증오해서는 안 된다. 정치가 더럽다고, 정치인이 썩었다고 정치판에서 눈을 떼면 더 나쁜 정치인들이 활개를 친다. 좋은 지도자를 원한다면 부드러운 후원자, 매서운 감시자가 돼야 한다. 왜냐하면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이 나쁜 정치를 해도 그것들을 바로잡는 일은 역시 정치를 통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좋은 정치인은 갑자기 솟아날 수 없다. 물론이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_마을연구소 #사진하나_시하나 #복효근 #복합와인문화공방_뱅샾62 #나로부터_타인을_지켜주는_공부 #자격미달_대선후보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즐겁게 살면 오래 산다. (0) | 2024.08.14 |
---|---|
‘진정한 지도자’ 유형 (0) | 2024.08.13 |
교육자의 양성 교육부터 문제이다. (0) | 2024.08.13 |
‘여기서 행복할 것’ 의 줄임 말이 ‘여행’ 이라고. (0) | 2024.08.13 |
우리는 법을 뛰어넘는 새로운 공동체의 질서를 찾아야 한다. (0) | 2024.0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