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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산수 몽괘 (2)

279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7월 28일)

오늘은 어제 못다한 가르침을 전하고 배움을 구하는 교육의 도를 나타내는 <산수 몽괘> 여섯 효의 효사와 소상전을 읽는다. 가장 아래에 있는 "初六(초육)은 發蒙(발몽)하며 利用刑人(이용형인)하야 用說桎梏(용탈질곡)이니 以往(이왕)이면 吝(인)하리라"이다.  이 말은 '초육은 몽매함을 일으키되 사람에게 형벌을 쓰고서 질곡을 벗김이 이로우니, (형벌로써만) 가면 인색할 것이다'로 번역된다. TMI:   刑: 형벌 형   說:벗을 탈(말씀 설, 달랠 세, 기뻐할 열)   桎:차꼬 질(족쇄)   梏:수갑 곡


'초육'은 양자리에 음효로 있어 위(位)가 부당한데다 <몽괘>의 아래에 처하여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자이다. 교육을 하는데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해 때로는 체벌(體罰) 등의 형벌을 사용하여야 하지만, 덕(德)의 교화가 없이 형벌로만 하면 교육의 '도'가 인색하게 된다. ‘질’(桎)은 족쇄이고, ‘곡’(梏)은 수갑이다. 사회를 유지함에 있어서도 질서유지와 안전을 위해서는 형벌을 써야 하지만, 형벌만 고집하게 되면 오히려 올바른 사회정의를 구현할 수 없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좀 쉽게 말해본다. <몽괘>의 가장 미숙한 첫 단계이다. 가뜩이나 몽매한데 음효가 자리잡고 있으니 더욱 깜깜하다. 이 효는 어리석은 자를 계발시키기 위해(發蒙, 발몽) 노력하는 어려움을 나타내고 있는 거다. 이런 자를 교육하는 방법으로 형구를 채워 꼼짝 못하게 하는 것도 한 수일 수 있다. 그러나 교육이라는 거시 그렇게 엄벌의 방법만을 써서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족쇄를 채워 시간이 흐르다 보면 본인이 스스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때가 온다. 그러면 그에게 채운 족쇄들 로부터 그를 풀어주는 거다(用說桎梏, 용탈질곡). 여기서 "탈(설)"은 '푼다'는 뜻이다. 그러니 해방의 가쁨을 주는 거다. 엄함과 관대함, 채찍과 당근이 교육에 다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왕(往)"은 하괘에서 상괘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육사'는 '초육'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단계의 "발몽"은 이상을 향한 추구는 있으나 결국 아쉬움이 남는다(吝, 인). 사람을 교육시킨다는 것은 그토록 어려운 일이다. 이 효사를 만난 사람은 종래의 삶의 태도를 근원적으로 고쳐 새로운 삶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 족쇄를 채워서 라도 구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초육의 <소상전>은 다음과 같다. "象曰(상왈) 利用刑人(이용형인)은 以正法也(이정법야)라." '상전에 말하였다. 사람에게 형벌을 씀이 이로운 것은 그렇게 하여 법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로 번역된다. 즉  형벌을 쓰되 질곡을 벗김이 이롭다는 것은, 그 형벌을 사용하는 것이 몽매함을 일깨워주고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함이니, 법을 바르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는 거다. 그러나 여기서 "정법"을 '발몽의 법을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읽고, 그것은 엄한 형벌만 풀지 않고, 족쇄를 채우는 밥과 족쇄를 풀어주는 법, 즉 엄함과 관대함의 균형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아래에서 두 번째인 '구이'의 효사는 다음과 같다. "九二(구이)는 包蒙(포몽)이면 吉(길)하고 納婦(납부)면 吉(길)하리니 子(자) 克家(극가)로다." 이 말은 '구이는 몽매함을 감싸면 길하고 아내를 얻으면 길할 것이니, 자식이 집을 다스리라'는 거다. TMI: 包:쌀 포,   納:들일 납,   婦:아내 부,   克:능할 극(이길 극, 다스릴 극). 양(陽)효인 두 번째 '구이'는 내괘의 중을 지키고 있어, 중도로써 가르침을 전하는 자리가 된다. 또한 내호괘가 '진,☳' 장남이니 응하는 관계인 외괘 음(陰)효인 '육오'의 아내를 맞이하여 집안을 잘 다스리는 상황이 된다. '구이' 양(陽) 효는 가르침을 전하는 스승으로 '초육', '육삼', '육사', '육오'의 뭇 음(陰)들을 교육시키는 주체가 된다.

아주 굳센 양효가 자리잡은  '구이'는 실제로 괘 전체의 중심자리이고, 중심 인물이다. '육삼', '육사', '육오'가 모두 허'약한 음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이'는 주변의 모든 사람을 포용하여 그들을 교양있는 사람들로 변모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包蒙, 포몽). '구이'의 역할은 길(吉)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 '구이'는 '육오'와 응(應)한다. '육오'가 음효로서 유순한 상이다. 그러므로 '구이'는 '육오'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이 좋다. 결혼을 위해 점을 친 사람은 결혼해도 좋겠다(納婦, 납부). 길하다. 이들 사이에 낳은 아들은(쪼 다시 '구이'로 상징할 수 있다. 효의 상징은 다중적일 수 있다) 집안을 잘 이룩하고 잘 다스려 나가리라(子, 克家, 자, 극가). 점을 쳐서 이 효사를 만난 사람은 주변에 덕 있는 자들이 모여드는 상(象)이다.

'구이'의 <소상전>은 "象曰(상왈) 子克家(자극가)는 剛柔(강유) 接也(접야)라"이다. 이 말은 '상전에 말하였다. 자식이 집을 다스리는 것은 강과 유가 만나는 것이다'로 번역된다.  ‘집안을 잘 다스린다는 것’은 '구이' 강(剛)이 내괘에서 중을 얻었고, '육오' 유(柔)가 외괘에서 중을 얻어 서로 만나니, 중도를 지켜 잘 다스린다는 말이다.

"六三(육삼)은 勿用取女(물용취녀)니 見金夫(견금부)하고 不有躬(불유궁)하니 无攸利(무유리)하니라"이다.  이 건 '육삼은 여자를 취하지 말아야 하니, 돈 있는 사내를 보고 몸을 두지 못하니, 이로울 바가 없다. TMI: 勿:말 물,   用:써 용(以),   取:취할 취,   夫:사내 부,   躬:몸 궁,   攸:바 유. '육삼'은 양자리에 '음'으로 있어 '위'가 부당하고 중도 얻지 못했으니, 자기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사사로운 이익을 따라 경망스럽게 처신하는 상태가 된다. 그래서 '육삼' 음효는 '상구' 양효와 정응 관계에 있으면서도 아래에 있는 구이 양효에게 몸을 두게 되니, 이러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수는 없다. 교육으로 본다면,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는 진실한 뜻이 합해져야 하는데, 제자가 자기 분수를 모르고 스승을 배반하거나 다른 스승 찾아가기를 번갈아 하게 되면 올바른 교육의 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이 효를 만나는 사람은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여자를 취하지 마라(勿用取女물용취녀). 지금 취하려는 여지는 돈 많은 남자만 보면(見金夫(견금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끝없이 뒤쫓아 갈(不有躬 불유궁) 그러한 여인이다. 아마도 '육삼'에 응하는 '상구'의 양효가 금부(金夫)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렇게 돈과 권력을 미친 듯이 추구하는 여자(혹은 남자)와 결혼해서 이로울 것은 아무 것도 없다(无攸利(무유리). 여기서 "不有躬 불유궁"은 '몸을 돌보지 않는다'는 뜻으로 돈에 환장해서 정조를 버린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몽괘>의 효사를 보면, '초육'ㅇ[는 "발몽(發蒙)", '구이'에는 "포몽(包蒙)", '육사'에는 "곤몽(困蒙)", '육오'에는 "격몽(擊蒙)", 모두 괘명에 들어가 있다. 그러나 '육삼'에만 '몽'자가 빠져 있다. 도올 김용ㅇ옥 교수에 의하면, 주석가들은 이 '육삼'의 여인이 워낙 나쁜 여자이기 때문에 교육의 대상이 되지 않으므로 몽자를 집어넣지 않았다는 거다. 최근에 우리 사회에 많이 등장하는 이런 모습의 여자가 둘 있다.

'육삼의 <소상전>은 "象曰(상왈) 勿用取女(물용취녀)는 行(행)이 不順也(불순야)라. 이 건 '상전에 말하였다. 여자를 취하지 말라는 것은 행실이 순하지 않아서'라는 거다. ' 육삼'과 같은 여자를 취하지 말라는 것은 그 행실이 순하지 못하여 가정도 잘 꾸리지 못하고 올바른 교육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거다.  <몽괘>의 '육사' 효의 이야기는 다음 주로 넘긴다.

교육학을 가리키는 영어 Pedagogy는 그리스어 paidagogos에서 나왔다. 이 말은 ‘어린이’라는 뜻의 paide와 ‘이끈다’는 뜻의 gogos의 합성어이다. ‘걸음마를 가르치는 사람’이란 의미라고 한다. 교육을 지칭하는 영어 educate(기르다, 양육하다)는 ‘밖으로 이끌어내다’라는 라틴어 educare에서 유래했다. 교육은 한 마디로 아이의 마음속에 내재된 무엇을 끌어내는 것이다. 

경쟁과 줄 세우기식의 비정상적인 학교교육에서 벗어나 배려와 협동, 사랑이 넘치는 학교를 만들어야 한다. 영어단어 하나, 수학공식 하나 더 외는 것 가지고는 무섭게 바뀌는 미래에 적응할 수 없다. 학생들이 마음껏 상상하고 도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지 말고, 자기 시간을 자기가 계획해 쓰게 해야 한다.

오늘 사진처럼, 나는 민들레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어디서든 잘 자라니까. 아이들의 교육도 어디서든 잘 살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어야 한다. "10미터씩 훨훨 날아다녀도 부족할 닭을 양계장의 비좁은 공간에 가둬봐요. 닭은 화가 나서 독을 품고 병들게 마련이지요. 아이들도 마찬가지예요. 작은 울타리에 가두려 들지 말고 어지간하면 울타리를 크게 해줘야 해요. 그래야 어디 서건 자랄 수 있는 ‘민들레'가 돼요. 대학 가지 말고, 부자 되지 말라'는 경남 산청군 신안면 갈전리 산골에 있는 ‘민들레공동체’ 김인수 교장의 말이다. 나도 동의한다. 대학 안 가도 1) 부지런하고, 2) 인간관계 원활하고, 3) 문제해결 능력이 뛰어나면 된다. 그리고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기보다 분출하며, 그 본성을 스스로 터득하게 하여야 자신의 욕망에 따라 창의적 인재가 된다. 오늘도 다시 한 번 더 류시화 시인의 <민들레>를 공유한다.

민들레/류시화 

민들레 풀씨처럼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게 
그렇게 세상의 강을 건널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면 민들레 풀씨처럼 가벼워진다고 

슬픔은 왜 
저만치 떨어져서 바라보면 
슬프지 않은 것일까 
민들레 풀씨처럼 
얼마만큼의 거리를 갖고 
그렇게 세상 위를 떠다닐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면 민들레 풀씨처럼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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