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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문해력(文解力) 떨어질수록 실업자 전락 높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오늘 아침도 어제에 이어 '해(解)'라는 글자 이야기를 한다. '문해력(文解力)', 리터러시(literacy)가 부족하면 '꼰대'가 되기 싶다는 말부터 시작한다. 텍스트를 읽어야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잘 읽어야 한다. 텍스트를 정밀하게 문해(close reading)하려면, 기본적인 문해력 이상의 능력이 필요하다. 누구나 알아보게끔 문장의 표층으로 드러나 있는 의미 뿐 아니라, 문장의 음지에 숨어 있는 의미까지 포착하려면 남다른 집중력과 훈련된 감식안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텍스트 정밀 문해(文解)의 관건은 그런 독해를 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

텍스트 '정밀 문해'를 배우고 싶은 사람은 상대적으로 더 훈련된 감수성을 가진 독해자를 만나 그와 더불어 상당 기간 동안 함께 텍스트를 읽어 가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감수성을 열고 단련해야 한다. 처음에 텍스트를 접하고 느꼈던 난감함을 경험해야 그 다음에 텍스트를 좀 더 섬세하게 읽을 수 있는 감수성으로 발전하게 된다. 무앗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아는가(끄세즈, que sais-je)'라며 자신을 성찰하고, 열린 마음을 갖추는 것이다.

얼어 붙은 감수성이 전자레인지에 넣어 쉽게 해동(解凍)시킬 수 있는 게 아니다.  텍스트에 대한 감수성을 일깨우는 배움의 과정은 종종 더디고 괴롭다.  문법이나 단어를 알고 있어도, 숨어 있는 텍스트의 의미를 알기가 쉽지 않다. 인간은 배움을 통해 과거라는 현상 유지의 단계에서 미래라는 자신이 열망하는 단계로 진입한다. 배움은 과거의 자신에게 안주하려는 이기심과의 체계적인 싸움이며, 더 나은 자신을 만들기 위해 자기 혁신을 위한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자기 스스로 감동하려는 미래를 구축하기 위해 현재에 몰입한다. 그런 미래의 자신을 상상하고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수련(修練)이 한자로 말하면 학습(學習)이다. 학습이란 단어를 잘 보면, 배움(學)이란 습관(習)이다. 어미 새의 비행하는 모습을 오랫동안 목격한 어린 새는 스스로 날개를 퍼덕이며 비행을 스스로 연습해야 비로 새로 태어나는 것처럼, 배움의 실질적인 행위로 보강되지 않는다면, 그런 배움은 거짓이다.

중앙일보 7월 8일자에서 장은수리는 분의 칼럼 타이틀은. "문해력(文解力) 떨어질수록 실업자 전락 높다"ㅖ이다. 그 칼럼은 주장한다. 문해력이 부족한 사람은 더 질 좋은 정보에 접근하지 못한다. '생활의 질'의 격차도 이로부터 시작된다. 젊은 시절에 일정한 문해력을 갖추었다 해서 평생 유지되지 않는다. 단순한 텍스트를 읽는 수준은 어릴 때 학습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이에 따른 성숙에 알맞게 필요한 정보의 양과 질을 확충하는 일이나 시대 변화에 맞추어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학교 공부에서 끝나지 않는다. 꾸준한 학습을 통해 자기가 알고 실천하는 일들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문해력은 서서히 바닥까지 떨어진다.

'마태(Matthew) 효과'라는 말이 있다. 로버트 머튼이 주장한 것으로, 처음에는 동일한 연구 성과를 놓고도 저명한 과학자들이 무명의 과학자들에 비해 많이 보상받는 현실로 명성과 보상의 불균형을 설명하는 말이었다. 이젠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지는 현상'을 말하기도 한다. 마태복음 25장 29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지만,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라는 구절에서 가져온 주장이라고 한다. 전체 인구나 기업 중에 상위 20%의 사람과 기업이 시장 전체의 80%를 장악한다는 '파레토 법칙'이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점차 이런 법칙이 깨져 10대 90, 5대 95 법칙으로 변모하여 승자독식 구조가 강화되고 있다. 우리 말로는 '빈익빈(貧益貧), 부익부(富益富)'란 말과 같다. 어제 아침 <대덕몽> 조찬 모임에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제 아침을 반성한다.

사람들은 다 각자 세계를 보는 나름대로의 시각, 즉 이론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세계와 관계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론의 지적체계, 가치관이나 신념들은 사실 생산되자 마자 부패가 시작된다. 최진석 교수는 이념이나 지식은 '사건의 똥'이라고 했다. 사실 우리 자신은 여러 가지 가치의 결탁물이다. 그러한 자기를 장자는 '아(我)'라고 한다. 이 가치의 결탁을 끊고, 즉 기존의 자기를 살해하고 새로 태어나는 자기를 '오(吾)'라고 했다. 자기 살해를 거친 다음에 '참된' 인간이 된다는 말이다. 참된 인간을 장자는 '진인(眞人)'이라고 했다. 흔히 우리는 '무아(無我)'라고도 한다. '자기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참된 자기로 등장하는 절차를 말하는 것이다. 어제 아침은 잠깐 나의 '아(我)'가 작동했다. 반성한다. 아직도 썩을 게 있다. "썩을 수 있다는 것은/아직 덜 썩었다는 얘기도 된다/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이다."

부패의 힘/나희덕

벌겋게 녹슬어 있는 철문을 보며
나는 안심한다
녹슬 수 있음에 대하여

냄비 속에서 금세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음식에
나는 안심한다
썩을 수 있음에 대하여

썩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덜 썩었다는 얘기도 된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
일종의 무릎 꿇음이다

그러나 잠시도 녹슬지 못하고
제대로 썩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방부제를 삼키는 나여
가장 안심이 안 되는 나여

#인문운동가박한표 #대전문화연대 #사진하나시하나 #나희덕 #와인비스트로뱅샾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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