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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산다는 건, 천문과 지리 그리고 인문의 삼중주이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5월 16일)

지난 5월 10일에 이어, 노자 <<도덕경>> 제25장 이야기를 이어간다. 오늘은 "故道大, 天大, 地大, 王亦大, 域中有四大, 而王居其一焉(고도대, 천대, 지대, 왕역대, 역중유사대, 이왕거기일언) 문장의 정밀 독해를 한다. 이 말은 '이리하여 도는 큰 것이라 불리지만, 큰 것으로는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제왕도 또한 크다. 이 세상에는 네 가지 큰 것이 있는데 제왕이 그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노자는 앞 구문에서 '대(大)'를 말하였다. 노자는 '도'를 억지로 개념화하여 '크다(大)'고 하였는데, 이 '크다'는 말은 '전체'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즉 전체 우주의 존재 원칙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 전체는 가만히 있는 정지된 어떤 존재가 아니라, 부단한 운동 속에 있다고 보았다. 또 하나 빠뜨리는 곳이 없는 부단한 운동의 방향은 먼 곳을 향하여 있는데, 이는 어떤 극한을 향하여 간다는 뜻으로 보았다. 사물의 발전은 극점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그 극점에 이르러 다시 그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간다는 거다. 이것이 노자가 보는 전체 자연의 운행 모습이었다.
'대(大)→서(逝)→원(遠)→반(反)'은 전체 운행의, 즉 도의 운행을 나타내는 전략 아래 동원된 유기적 의미 연관 고리들이다.

그래서 노자는 "고(故)"라는 접속사를 넣었다. 그리고 '대'의 성격을 구현할 수 있는 "사자(四者)"를 말한다. 도(道), 천(天), 지(地), 왕(王)이다. 그런데 "천, 지, 인" '삼재(三才)' 중에서 '인(人)' 대신에 '왕(旺)'을 썼다. 노자 시대 '왕'은 천자다. 지방의 로컬 제후가 아니다. 왕필이 주를 달기를 "인지주야(人之主也)"라고 했는데, 왕은 모든 인간의 주체이다. 여기서 왕은 천과 지에 필적할 만한 심볼리즘으로서의 인간 보편자(the Universal Man)를 말하는 것이므로 한 인간 개체를 가리킬 수 없다. 그러니 'a man'이 아니라, 'the Man'이 되어야 하고, 천과 지에 필적하는 'the Man'은 '왕(王)'이 된다. 도올 김용옥의 설명이다. 그의 주장을 직접 들어본다. "인간을 개별적 존재자로 파악하지 않고, 인간에게 보편자로서 천지와 동일한 차원의 자격을 부여한 것은 매우 획기적인 발생인 동시에 노자가 얼마나 인간중심적 사고를 한 사람인가를 절감해야 한다." "노자는 삼재와 더불어 도(道)를 말함으로써 4대(4大)를 주장했다. 이래서 후대에 노자는 도가(道家)로 분류되게 된 것이다. 역(域)중에 사대가 있는데(域中有四大), 그 중에서도 왕(王), 즉 인간 보편이 하나를 차지한다고 노자가 말한 것은 노자가 얼마나 인간을 특별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기ㅏ 하는 것을 반추하게 만든다."

좀 쉽게 말해본다. '도'는 크다. 도를 본받는 하늘도 크다. 도를 본받으므로 위대해진 하늘, 그 하늘을 본받는 땅도 크다. 도를 본받으므로 위대해진 하늘, 그 하늘을 본받으므로 위대해진 땅, 그 땅을 본받는 사람도 크다. 왕 대신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결국 모든 위대함의 근원은 '도'이다. 사람의 위대함도 땅과 하늘을 거슬러 올라가 도를 본받은 데서 비롯된다.

하늘과 땅, 천지의 자연(스스로 그러함)을 놓고 도와 왕(王, 인간)이 대결을 하고 있다. 도는 천지에게 허(虛)를 부여하는데, 왕은 천지로부터 '허'를 빼앗아간다. 말하자면, 도는 '무위'를 실천하는 데, 왕은 '유위'를 건설하려고 노력한다는 거다. 도는 무형을 극대화시키는데, 왕은 유형을 극대화시는 것이다. 이게 노자의 문제의식이다.

그래 노자는 인간이 바르게 각성하지 못하면 천지라는 질서 그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으므로, 그에게 왕(王)으로서의 확고한 위상과 책임을 부여해야 한다는 거다. 도올의 주장이다. "이 '왕;이라는 글자에는 '인간의 책임성'이 강렬하게 배어 있는 것이다." 왕(王) 자가 다시 읽힌다. 언젠가 <인문 일기>에 썼던 다음을 소환한다.

산다는 건, 천문과 지리 그리고 인문의 삼중주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삼중주의 리듬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세 질문도 궁극적으로 이 배치 안에 있다. 그러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인간이 천지, 하늘과 땅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늘의 별을 보지 않고, 땅을 보는 안목도 잃었다. 땅이 투자대상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인간이 천지보다 더 높은 존재로 올라섰다. 그러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공격을 당하며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는 중이다. 이제 앎은 자연지의 광대한 지평에서 벗어나 오직 인간을 중심으로 삼는 문명지로 축소되었다. 천지인을 아우르던 그 통찰력은 한낱 신화가 되어 버렸다. 그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제25장의 마지막 구절이다.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 이 말의 해석은 '그 제왕은 인류의 지배자로서 땅의 참모습을 본받고 땅은 하늘의 참모습을 본받으며 하늘은 다시 도의 참모습을 본받는다. 그리고 도의 본 모습은 자연이기 때문에 도는 다만 자연을 본받아 자유자재 한다'이다.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 이를 도식화 하면, "인-지-천-도-자연"이다. 여기서 우리는 흔히 법을 '본받다'로 해석한다. 그래 "인간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로 해석한다. 노자는, 공자처럼, 어떤 정해진 법칙들, 즉 인의예지신과 같은 가치를 유형의 가치로 결정하고, 그것을 수용하지 않는다. 무위(無爲)를 덕으로 여기는 노자가 생각하는 '법'의 의미는 다르다고 본다.

법(法) 자를 파지하면, 물(水)이 자연스런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면서, 만물을 이롭게 한다. 물은, 상선약수(上善若水, 지극하 착한 것은 물과 같다)라는 말처럼,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자신을 드러내지도 타인과 다투지도 않는다. 또한 물은 겸허(謙虛)가 몸에 배어 있어 언제나 낮은 곳으로 스스로 저절로 아무 소리도내지 않고 흘러 들어간다. 그러니까 법은 물과 같은 몸가짐이며 활동이다.

그런 측면에서 위의 문장을 다시 번역하면, "인간은 발을 땅에 디디고 살면서, 다른 인간들과 잘 어울려 살 뿐만 아니라, 지구의 동거존재인 다른 동물들과 식물들과 잘 어울려 산다. 땅에 있는 동물과 식물들은, 하늘이 가져오는 물, 공기, 햇빛을 흠뻑 받으면서, 주어진 짧은 수명을 살면서, 하늘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산다. 저 하늘에 있는 해, 달 그리고 모든 행성들은 지난 수 억년 동안 그랬듯이, 앞으로도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하염없이 갈 것이다. 그 길을 이탈하면 우주가 혼돈에 빠지기 때문이다. 우주가 운영하는 법칙인 도는 자연스럽다. 물과 같이 고요하게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저 낮은 곳으로 조용하게 흘러간다."

배철현 교수가 말하는 창조는 무엇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이 원래 있어야 할 곳에 적절하게 배치하는 행위이다. 이 '창조'가 그는 '법'의 의미와 유사한 단어라고 본다.  그러니까 법이나, 창조는 '우주의 원칙에 따라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두다'란 의미이다. 신이 다음 네 가지를 창조했다. (1) 우리가 발로 밟고 있는 이 땅(地) (2) 우리가 보고 있는 저 하늘(天) (3) 그리고 그 가운데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인간(人) (4) 그리고 행복(道法自然)이다. 인간만이 죽는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인식하는 동물이다. 인간만이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산다. 그 인식이 나에게 주어진 오늘을 빛나게 만든다. 그래 순간을 사는 인간이 행복하고 고요하다. 고요는 조용이다. 조용은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고요이다.

<<도덕경>> 제25장을 여기서 멈출 수 없다. 내일 더 이야기를 이어간다. 너무 글이 길어진다. 그리고 코로나-19의 '사회적 거리'가 없어진 뒤, 할 일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파트 담벼락마다 장미들이 때를 만났다. 다른 동네 아파트에서 나는 장미와 찔레꽃이 함께 피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 난 거의 자동으로 반칠환 시인의 <장미와 찔레>를 기억한다. 오늘 아침에 공유하는 시이다. 찔레는 장미와 함께 있다 보면, 찔레는 "슬쩍 붉은 듯 흰 듯 잡종 장미를 내밀 법도 하건만 틀림없이 제가 피워야 할 빛깔을 기억하고" 있다. 시인은 찔레처럼 "여럿 중에 너 홀로 빛깔이 달라도 너는 네 말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옛 스승 임제 선사는 말하였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그러면 그가 서 있는 자리마다 향기로운 꽃이 피어나리라."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라는 말이다. 이를 말 그대로 하면,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모두 참 되다”는 뜻이다. 진정한 주인이라면, 자기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곳이 주인이 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장미와 찔레/반칠환

경복궁 맞은편 육군 병원엔 울타리로 넝쿨장미를 심어 놓았습니다. 조경사의 실수일까요. 장난일까요. 붉고 탐스런 넝쿨장미가 만발한 오월, 그 틈에 수줍게 내민 작고 흰 입술들을 보고서야 그 중 한 포기가 찔레인 줄을 알았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얼크러설크러 졌으면 슬쩍 붉은 듯 흰 듯 잡종 장미를 내밀 법도 하건만 틀림없이 제가 피워야 할 빛깔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꽃잎은 진 지 오래되었지만, 찔레넝쿨 가시가 아프게 살을 파고듭니다. 여럿 중에 너 홀로 빛깔이 달라도 너는 네 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이젠 글을 두 가지 버전으로 쓰다. 길게 사유한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면 된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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