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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죽어야만 재생의 희망이 있다.

7년 전 오늘 글이에요.

사진 하나, 생각 하나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싯구가 나오는 T S 엘리엇의 <황무지>라는 시는 다 읽으려면 무지 길다.

그런데 그 시를 요약하면 이런 말이다. "살아도 죽은 상태로 어정쩡하게 있지 말고 아예 죽으라. 그럼으로써 부활하라." 내가 좋아하는 담론이다. 술을 마시는 이유도 죽기 위해서이다. 왜? 그래야 다시 부활하니까.

이 시는 본격적인 시가 시작되기 전에 다음과 같은 글귀로 시작한다. "나는 쿠마이의 무녀가 항아리에 달려 있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소/아이들이 시빌레에게 "소원이 뭐냐?"고 물으니, 시빌레는 그리스 말로 "죽고 싶소"고 대답하더란다."

태양신 아폴론의 사랑을 받던 무녀 시빌레가 있었다. 신에게 오래 사는 것을 소원으로 말해 얻어 냈지만, 늙지 않고 오래 살기를 말하지 않아, 그 무녀는 한없이 늙어가면서 죽지도 못하고 끝내는 쪼그라들어 항아리에 들어갈 정도가 되었다. 아이들이 무녀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자, 그 무녀는 "죽고싶다"고 말했단다.

죽어야만 재생의 희망이 있다.

죽음은 정화를 가져온다. 정화라는 말에 방점을 찍는다. 서양어로 말하면, '카타르시스'일까? 마음의 때, 영혼의 때를 벗기는 일이 아닐까? 봄의 부활은 땅의 때를 벗기는 일이요, 예술을 통해 때를 벗기는 것은 사람의 영혼의 때를 벗기는 일요, 신의 죽음과 부활은 세계를 정화하는 일같다. 신의 죽음으로 세계는 정화되고, 신의 부활과 함께 새로운 풍요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신은 죽을 때 세상의 모든 때, 재해와 죄악 등 모든 나쁜 것을 짊어지고 죽기 때문이다.

엘리엇은 부활을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만 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반쯤 죽은 채 계속 살아가는 것은 무녀의 쪼그라드는 삶과 다를 바 없다. 정신의 완전한 죽음과 부활은 결국 극도의 고통을 동반한 성찰과 기존의 패러다임의 전복을 통해 이루어진다.

개인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 사회도 지금 절실히 필요하다.

쉽게 찾지 못하는 튤립의 빨강색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난 겨울에 죽어, 땅 속에서 힘들게 견디었기 때문에 이 봄에 이러한 화려한 색의 옷을 입은 것이다.

서천 국립생태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