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 오늘 글이에요.
'참나'를 찾는 여행
배철현 교수의 <심연>과 함께 '위대한 개인'이 되는 프로젝트 (3) "위대한 개인이 위대한 사회를 만든다."
생각에 대해 생각한다.
생각은 '인생이라는 집을 짓도록 도와주는 설계도'이다. 그래서 우주는 우리 각자에게 생각이라는 선물을 준 것이다. 이 생각을 마음 속에 심어놓고 정성껏 가꾸어 뿌리 깊은 나무처럼 쉬 흔들리지 않도록 만들면, 그 생각은 우리를 든든하게 지켜준다. 생각을 키운다. 그것도 나무처럼 큰다.
"저는 누구에게 무언가를 가르칠 수 없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생각하게 만들 뿐입니다." (소크라테스)
천재란 자신만의 고유한 생각이 있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찾는 사람이다. 그리고 찾아낸 것을 일생 동안 묵묵히 실천하는 사람이다. 보통 사람들은 타인의 생각과 글, 사회가 인정한 전통과 교리를 암기하고, 나에 대한 사회의 평가가 진정한 자기 자신인양 믿는다.
천재는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자신의 욕망을 탐색하고 발견한다. 그것을 삶을 통해 그 욕망을 실현한다. 천재는 남다른 생각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남다른 생각은 매일매일 변화를 거듭하며 나 자신을 더 아름다운 삶으로 인도하는 높은 차원의 시선이 된다. 그냥 아무런 노력도 없이 습관적으로 하는 생각이 아니다. 남다른 생각은 어제까지 소중하게 여겼던 가치의 한계를 보고, 아낌없이 버리는데서부터 시작된다.
생각은 '문'을 넘어야 나온다. 여기서 문은 '성문', '현관'이다.
히브리어의 "샤아르(shaar)'는 '생각'이라는 의미와 '성문'이라는 뜻이 동시에 들어 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성문'이란 야만과 문명, 혼돈과 질서를 구분하는 가시적인 대문이다.
성문 안으로 들어가 위해서는 신분을 밝혀야 하고, 그 신분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하며, 그 안에서 해야 할 자신만의 고유한 임무를 알고 있어야 한다. 누구든 이 조건을 소홀히 하면 성문 안으로 들어가기는 커녕 입구에서 쫓겨나고 만다.
성문은 동시에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신전의 문이기도 하다. 사찰에 가면, 이런 문이 있다. 무서운 사천왕이 지키는 문을 넘어야 한다.
신전의 바깥은 세속의 공간이며 신전 안쪽은 성스러운 공간이기에 정결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
여기서 정결하다는 것은 자신이 해야 할 최소한의 그 무엇을 알고 목숨을 바쳐 실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성문은 정결하지 않으면 발을 디딜 수 없는 '타부'의 공간이기도 하다.
샤아르는 성문이라는 명사이외에도 '성문 위에서 쳐다보다'라는 동사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이 동사의 의미는 성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는 무기를 제공한다. 그 무기는 성문 위에서 내려다보듯이,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진입하려는 현재의 나에 대한 관찰이다. 이 성문 위에 선다는 것은 이 성문 위에 서서 지금까지 걸어온 삶의 궤적을 확인할 수 있고, 성문을 지나 내가 나아가야 할 미지의 길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샤아르는 '신전의 문 위에서 자신의 신전으로 들어가려는 나 자신을 관조하다'라는 의미이며, 바로 그것이 '생각'의 의미와 만나는 지점이다. 그러니까 생각이란 성문 위에 선 내가 하는 일이다. 생각을 한다는 것은 삶의 여정 가운데 잠시 멈춰 서서 지금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정교하게 헤아리는 훈련이다. 이 행위는 거룩한 것이다.
천재들은 다른 이들이 만들어놓은 밤하늘의 별을 찬양하거나 그 내용을 암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심연 속에 감춰져 있는 이야기를 용기 있게 말한다. 그 때 내 안에서 일어나는 빛은 모두 숭고하다.
내가 축하해야 할 대상은 나와 무관한 신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이다. 자신의 생각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자신의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나만의 유일한 임무를 찾아내는 자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사진은 제주도에서 찍은 바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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