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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혁명(운명을 바꾸는 일)은 일정한 세월이 흘러야 믿음(乃孚, 내부)을 얻을 수 있다.

263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2월 23일)

지금 무언가 풀리지 않거나 매우 힘든 상황에 빠져 있다면, 먼저 자신의 평소 생각과 행동을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주역>>에는 450개의 조건문, 즉 450개의 "만약에 ...이라면"이 있는 거다. 이 정도라면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거의 모든 조건문이 다 들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길흉을 직접 바꿀 수는 없지만, 전제 조건에 해당하는 내용은 스스로 바꿀 수 있다. 전제 조건은 곧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기 때문이다. 길흉의 결과를 바꾸고 싶다면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것만 특별히 '숙명'이라고 부르고, 숙명이 아니라면, 고치지 못할 운명은 없다. 사계절의 순환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숙명이다. 그렇다고 여름에는 쪄 죽고, 겨울에는 얼어 죽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변화를 만들어 낼 것인가? 어떻게 변화의  조짐을 읽을 것인가? 또 다가오는 변화에 대비하여 나 지신은 어떻게 바꾸어야 하고, 어떤 선택을 하여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답을 찾아 본다.  바꿈에 관한 프레임(틀)인 <택화 혁괘(澤火 革卦)>에서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법을 읽어 본다. 이 괘는 구체적으로 운명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 <혁괘>는 혁명에 관한 괘이다. 혁명이란 급진적 사회 혁명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운명을 바꾸기 위한 실천이라면 모두 혁명적인 행동이다. 사람과 운명이 바뀌는 것이 진정한 혁명이다. 

 그러니까 정치사회적 내용이 담긴 이 괘는 개인의 운명과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비록 개인사라 할지라도 우리는 정치 사회적 프레임에 넣어 사고함으로써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으며, 거꾸로 정치사회적 문제도 개인사의 프레임을 통해 바라봄으로써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다. 예컨대, <건괘>는 군주의 상징인 용을 등장시켜 이야기 하고 있지만, 지금 자신의 문제를 용처럼 강인한 의지로 뚫고 나가는 이야기의 프레임을 통해 바라볼 수 있다. 주역점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닥치는 문제를 두고 치는 것이다. 특히 위의 <혁괘>는 운명 바꾸기에 관해 가장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괘이다. 

장재라는 사람은 "<<주역>>은 군자를 위해 도모하지 소인을 위해 도모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기서 소인이란 자기 목적의 달성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다. 흥미로운 것은 주역점은 바른 일에 관해 물어야지, 그릇된 일에 관해서는 물을 수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도둑질이나 강도, 방화, 유괴, 살인 같은 흉악 범죄를 저지를 계획을 세워두고 이 계획이 잘 될 것이냐고 주역점에 물어서는 안 된다는 거다. 옳지 않은 일을 점쳐서는 안 된다.

<혁괘>의 괘사는 다음과 같다. "革은 已日이라아 乃孚하리니 元亨코 利貞하야 悔亡하니라." 이를 번역하면, '혁명(운명을 바꾸는 일)은 일정한 세월이 흘러야 믿음(乃孚, 내부)을 얻을 수 있다. 혁명은 널리 통해야 하며, 바른 길을 걸어야 이롭다. 그럴 수 있다면 뉘우칠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는 사회 혁명이든 개인의 혁명이든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말은 "'혁명(운명을 바꾸는 일)은 일정한 세월이 흘러야 믿음(乃孚, 내부)을 얻을 수 있다"는 거다. 옳은 주장도 믿음을 얻어야 힘이 실린다.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그 주장이 세월을 견뎌야 한다. 믿음이 없으면 혁명도 없다.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사람들의 믿음을 얻어야 운명을 바꿀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믿음을 얻고 있다면 그는 자가 운명을 바꿀 역량을 갖춘 것이다. 그러니까 혁명은 믿음을 얻는 데서 시작된다.

언제 혁명이 필요한가? 위기가 닥쳤을 때이다. <혁괘>의 6개의 효사가 이야기해주는 것은 절박할 때 정확한 상황 판단을 바탕으로 행동하라는 것이다. 6개의 효사 중 앞의 3 효사는 혁명 전의 상황이고, 뒤의 3 효사는 혁명 후의 상황으로 나뉜다.  먼저 혁명이 터지기 전의 상황을 다음과 이야기하고 있다.

"初九는 鞏用黃牛之革(공용황우지혁)이니라: 초구는 굳게 누런 소의 가죽을 쓴다."
"六二는 已日(이일)이어야 乃革之(내혁지)니 征(정)이면 吉(길)하야 无咎(무구)하리라: 육이는 이미 날이어야 이에 고치니, 가면 길해서 허물이 없을 것이다."
"九三은 征(정)이면 凶(흉)하니 貞厲(정려)할지니 革言(혁언)이 三就(삼취)면 有孚(유부)리라: 구삼은 가면 흉하니, 바르게 하고 위태하게 여길 것이니, 고치자는 말이 세 번 나아가면 미더움이 있을 것이다."

初九는 혁명의 시기가 무르익지 않아 행동을 취하는 것이 위험한 상황이다. 행동을 막아야 할 시기이다. 아직 때가 아닌 경우이다. 이 경우는 시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물에 잠긴 용처럼 조금만 더 지그시 잠겨 있어야 한다. 그래서 "누런 소의 가죽을 써서 단단히 묶어두어야 한다"고 했다. 혁명의 시기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을 때 함부로 행동하면 결과는 끔찍한 비극으로 귀결할 수 있다. 옳은 주장이 늘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눈을 감고 행동하는 맹동주의(盲動主義)는 위험하다. 맹동은 자기도 다치고 남도 다치게 한다. 내가 절실하다고 해서 세상이 나를 절실하게 보아주지는 않는다. 내가 절실하다면, 스스로 절실하게 혁명(운명 바꾸기)을 준비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내가 준비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는 어떻게 판단하는가? 가장 좋은 방법은 주변 사람들이 나의 준비 상태를 믿어주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먼저 체크하는 것이다. 그들이 내가 움직이는 데 동의한다면 나는 준비가 된 것이다. 이런 상태가 <혁괘>에서 말한 미더움을 얻은 상태이다. 미더움을 얻는 것이 바로 혁명이다.

六二는 시기가 무르익어 반드시 행동을 취해야 할 때이다. 행동의 타이밍이 닥친 것이다. 이런 때는 가만히 있는 것이 되레 문제가 된다. 그러나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이 시대에 이런 행동이 쉽지 않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임에도 정상 이상으로 미루는 것을 심리학에서는 '지연행동(procrastination)'이라 한다. Dl 행동의 가장 큰 원인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다. '지연행동'으로 중요한 타이밍을 놓치면 그 일은 기억에 남아 마음을 갉아 먹는다. 

'맹동'과 '지연행동' 가운데 어느 편이 더 문제일까?  둘 다 문제이지만 현대인에게는 '지연행동'이 더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행운의 여신은 머뭇거리는 이에게는 등을 돌리지만 과감하게 행동하는 이에게는 순종한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지연행동이 느껴진다면 '자이가르닉 효과(Zaigarnik effect)'를 상기 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러시아 심리학자 블루마 자이가르닉은 웨이터들이 아직 계산이 안 끝난 주문 내역은 적확히 기억하면서 계산을 다 치른 주문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현상에 주목했다. 여기서 착안하여,  나중에 일거리의 내용에 대해 질문을 하자 정상적으로 일을 끝낸 이들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반면, 방해를 받아 일이 중단된 그룹은 일의 내용을 훨씬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인간은 일단 착수한 일에 대해서는 끝내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그러므로 지연행동의 굴레를 깨는 길은 일단 시작하고 보는 거다.

세번째 시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기이다. <혁괘>의 九三 효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앞으로 나아가면 흉할 것이며, 가만히 있더라도 위태로운 것이다. 운명을 바꾸겠다는 주장을 세 번 실천해 이루어 낸다면 미더움을 얻을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면 흉하고, 가만히 있어도 위험하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다. 이런 경우에는 바로 큰 일을 밀어붙이기보다 작은 실천을 여러 차례 거듭해 먼저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혁괘>는 말하고 있는 거다.

미더움을 얻는 데는 늘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기회와 결단의 순간은 내가 얼마나 미더움을 샀는지, 얼마나 준비되었는지를 살펴주지 않고 닥친다. 허겁지겁 행동에 나서려 하면 신뢰를 더 크게 잃거나 타이밍을 잃을 수 있다. 신뢰나 타이밍을 잃는 것은 내 인생에서 중요한 발판 하나를 허물어뜨리는 일이다. 미더움은 내 인생을 버텨주는 기초공사이다. 여기서 3번이라는 말은 꼭 숫자 3이 아니라, 많은 횟수를 가리킨다. 이런 상황에서는 함부로 주장을 앞세우지 말고, 작은 일이라도  말과 실천이 일치함을 여러 차례 보여주어 미더움을 얻어야 한다. <<운명 앞에서 주역을 읽다>>에서 저자 이상수가 주장하는 거다. <혁괘>의 효사 나머지 3개는 내일 이야기를 이어간다.

언젠가 나는 신뢰를 바탕으로 개혁하여야 한다는 글을 적어 둔 적이 있다. 미더움, 즉 신뢰 이야기가 나왔으니 다시 한 번 더 공유한다. 주변과 변방이 더 개혁적이다. 그리고 그들이 중심부로 들어간다.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기득권을 유지하고 지키기에 바쁘기 때문이다. 예컨대 변방의 소국이었던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다. 그 이유는 신(信)을 바탕으로 한 '개혁'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신뢰의 문제를 나는 '엉덩이의 힘', 다른 말로 하면 '꾸준함'이라고 본다.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다른 이들로 부터 신뢰를 얻는다. 그 신뢰를 통해 근본이 세워진다.

중국의 전국 시대는 철기의 발명을 계기로 새롭게 형성된 생산 방식의 변화가 야기한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어떻게 효율적으로 적응하느냐가 관건인 시대였다. 이 시기에 모든 나라들은 '개혁'에 몰두한다. 당시 그들은 이것을 '변법'이라고 불렀다. 진나라를 포함하여 거의 모든 나라들이 기존에 했던 일들을 이리저리 바꿔보고, 또 열심히 해보고, 관리나 백성들을 다그쳐도 보고, 제도를 수선해보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도해보고 하는 것들로 그 시대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진나라의 상앙은 개혁의 핵심을 '신뢰'의 회복에서 찾는다. 그는 '신뢰'가 없이는 어떤 개혁도 이뤄질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이런 행사를 한다. 

성문 밖 남문에 나무를 박아 놓고, 그것을 북문으로 옮기는 사람에게는 적지 않은 상금을 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백성들은 나라에서 하는 말이라면 이미 시큰둥해 져서 어떤 말도 믿기를 않아 그것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상앙이 상금을 다섯 배로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한가한 사람이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그 나무를 옮겼고, 상앙은 정말로 거금을 상으로 주었다. 이렇게 되자 백성들은 상앙이 다른 재상들과는 다르게 본인이 말한 것은 그대로 지킨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그때부터 상앙의 '변법'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매우 효율적으로 시행되어, 변방의 작은 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대업을 이룰 수 있는 개혁의 길로 착실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종목입신(從木立信)'이라 한다. 나무를 옮겨 신뢰를 세운 것이다.

'신뢰'는 동양에서 흔히 인의예지(仁義禮智)와 거론되는 다섯가지 덕(德)이다. 이 '오덕'은 활을 쏘고, 창고를 살피고, 전투를 하고, 결제를 하는 등과 같은 구체적이고 기능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그런 기능들을 지배하는 상위의 힘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보이는 것들의 기둥이다.

인문학은 구체적이고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밥을 주지 않지만, 그것들을 지배하는 상위의 힘이다. 기능에 갇히면, '신뢰'를 좋은 말이라고 여기기는 하면서도, 실제로는 아직은 아닌 것 혹은 귀찮은 것 또는 현실적인 효율을 직접 생산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시선이 높으면, 눈이 높으면 효용이 없어 보이는 것의 효용을 안다. 이것을 장자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이라고 한다. 탁월한 시선을 가진 사람은 쓸모 없음의 쓸모를 본다. '도(道)', 아니 '육바라밀' 같은 최극 점을 추구하면, 세계 흐름에 통달하게 된다. 그 때, 정확한 판단과 정책을 펼 수 있다. '도'나, 맥락이나 신뢰나 독립이나 하는 것들은 보이지 않은 것들이다. 그래서 눈 낮은 사람들은 그것을 쉽게 무용(無用)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기능적인 거의 모든 것들은 다 이런 것들에 의존한다. 결국 대용(大用)을 이루게 한다.

그래 신뢰 회복이 시급하다. 우리 사회 전반에 신뢰가 무너졌다. 사회의 리더들이 자기가 한 말을 잘 지키지 않는다. 말을 지키지 않는 것은 원칙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원칙을 지키지 않는 것은 바로 '기능'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원칙보다 기능이 더 커 보이는 한 개혁은 흔들린다. 기능에 의존한 채, 개혁을 이룬 예는 없다. 예컨대 기능적 정치, 즉 정치 공학을 운전하는 일은 가능해도 정치 자체의 복원은 힘들다. 정치공학으로는 이 사람을 저 사람으로 바꾸고, 저 사람을 이 사람으로 바꾸는 일은 가능하다. 또 이 진영이 저 진영을 대체하거나 저 진영으로 이 진영을 대체하는 일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이 새 세상처럼 보이지만, 새 세상이 아니다. 정치처럼 보이지만, 아직 '진짜' 정치는 아니다. 헌 세상의 다른 얼굴일 뿐이다. 세상이 4월 10일에 있을 총선 때문에 시끄럽다. 이때 판단의 기준이 미더움, 즉 신뢰이어야 한다. 배신하는 사람은 또 배신한다.

오늘 아침 시는 흥미롭다. 제목이 <모자>이다. 이 시를 소개한 반칠환 시인의 덧붙임 때문에 더 좋아진 시이다. 반 시인에 의한면, "남이 씌워준 모자는 감투다. 모자는 높아서 우러러 본다. 높은 만큼 무겁다.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모자가 자신인 줄 알기 쉽다. 책임지지 않고 군림한다." 그런 사람이 언론에 자주 등장해 속상하다. 반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모자는 스스로 쓴 모자다. 제 마음 높은 곳에 썼으니 아무도 우러르지 않는다. 아무도 빼앗지 못한다. 스스로 쓴 모자는 무겁게 누르지 않고 날개처럼 띄워준다. 자신만의 모자를 쓴 사람은 자유롭다"고 시인 반칠환이 덧붙였다. 스스로 쓴 모자가 신뢰를 준다.


모자/신현정

나는 분명히 모자를 쓰고 있는데 사람들은 알아보지를 못한다
그것도 공작 깃털이 달린 것인데 말이다
아무려나 나는 모자를 썼다
레스토랑으로 밥 먹으러 가서도 모자를 쓰고 먹고
극장에서도 모자를 쓰고 영화를 보고
미술관에서도 모자를 쓰고 그림을 감상한다
나는 모자를 쓰고 콧수염에 나비넥타이까지 했다
모자를 썼으므로 난 어딜 조금 가도 그걸 여행이거니 한다
나는 절대로 모자를 벗지 않으련다
이제부터는 인사를 할 때도 모자를 쓰고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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