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3.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2월 18일)
지난 2월 16일에 이어 <<역경>> 20번인 <관괘> 이야기를 이어간다. '괘사' 다음 '효사'를 살펴본다. 각 괘는 6 개의 막대, 효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효사는 늘 6 개이다. <<역경>>에서 효를 읽는 순서는 아래에서 위로 읽어 올라간다.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관괘> 밑에서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는 음효이고, 다섯째와 맨 위는 양효이다. <관괘>의 괘사는 내가 어떻게 보아야 하는 가에 관한 이야기인데 반해, 효사는 모두 내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初六은 童觀이니 小人은 无咎오 君子는 吝이니라.
초륙 동관 소인 무구 군자 인
초육은 아이의 봄이니, 소인은 허물이 없고 군자는 인색하다.
(어린아이처럼 바라보니, 소인이라면 허물이 없을 것이나, 군자라면 어려울 것이다.)
童:아이 동
六二는 闚觀이니 利女貞하니라.
육이 규관 이녀정
육이는 엿 봄이니, 여자의 바름이 이롭다.
(문틈으로 엿보듯이 바라보니, 여인이 몸 가짐을 바르게 하는 데에는 이로울 것이다.)
闚:엿볼 규
六三은 觀我生하야 進退로다.
육삼 관아생 진퇴
육삼은 나의 삶을 보아서 나아가고 물러 나도다.
(나에게서 나오는 것을 보고 나아가거나 물러난다.)
進:나아갈 진 退:물러날 퇴
<관괘> 6 효가운데, 하괘의 初六, 六二, 六三괘 세 가지에는 세상을 보는 서로 다른 방식이다. (1) 어린 아이의 눈 (2) 엿보는 눈 (3) 반성적으로 보는 눈, 세 가지이다.
(1)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보는 사람
여기서 어린 아이의 눈은 아직 천진함을 찬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린 아이의 눈은 아직 성숙하지 않은 눈이다. 어린 아이는 세상과 운명을 아직 잘 모른다. 책임과 의무도 잘 모른다. 어린 아이의 눈으로는 세상을 정확하고 용기 있게 바라보기가 어렵다. "동관", 어린 아이처럼 바라 본다'고 할 때 어린 아이의 눈이란 나이가 어린 사람의 눈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를 원숙하게 볼 수 없는 눈을 말한다. 이런 눈은 늘 보아야 할 핵심을 놓친다. 이렇게 세상을 바라볼 경우, "소인(小人)은 무구(无咎)요, 군자는 인(吝)이리라" 했다. 다른 사람의 삶에 크게 영향을 끼칠 일이 없는 소인이라면, 크게 허물이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리더 노릇을 해야 하는 군자가 이렇게 성숙하지 않은 눈으로 본다면 그건 곤란하다. 자신과 공동체가 함께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2) 엿보아서는 제대로 보지 못한다.
육이(六二)의 '엿보는 눈("규관, 闚觀")이다. <<주역>>이 만들어지던 시절의 여성은 사회적 지위가 낮았다. 여성은 대문을 활짝 열고 세상을 볼 수 없었고, 반쯤 열린 규방의 문 뒤에 숨어서 세상을 보아야 하는 존재였다. 문 뒤에 숨는다면 세상의 구설수로부터 안전할지는 모르지만 실상을 제대로 볼 수는 없다. 엿보듯 바라보는 사람들은 비평만 하는 사람들과 닮았다. 힐끔 본, 정확하지 않은 판단이 비극을 부르는 경우는 적지 않다.
(3) 반성적으로 보는 눈
우리의 안목이 좀 더 온전해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반성이다. 어린 아이처럼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엿보는 것처럼 불충분하게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한다. 자기 반성은 스스로를 솔직하게 볼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나에게서 나오는 것을 보고 나아가거나 물러날 것'이라 한 것은 바로 이런 말이다.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란 나의 행위이다. 나에게 그보다 더 솔직하고 명확한 것은 없다. 다른 사람의 즐거움이나 고통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자기 욕망을 솔직히 바라보고 자기 욕망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 세상과 운명을 지혜롭게 볼 수 있다는 거다.
<관괘>에 담겨 있는 메시지는 이런 것이다. 어린 아이처럼 보거나 힐끔 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자기 욕망을 솔직히 바라 보고 자기 욕망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 세상과 운명을 지혜롭게 볼 수 있다. 어쨌든 눈이 어두워도 보이지 않지만 마음이 어두워도 보지 못한다. 성숙하게 세상과 운명을 볼 수 있는 마음이 없으면 우리는 보아야 할 것을 다 보지 못한다. 어떤 이의 운명에 불고 잇는 역풍은 항해에 어려움이 따를 것에 대비하라는 뜻이다. 항해가 불가능하다는 것도 아니고 항해를 포기하라는 뜻도 아니다. 우리가 <<역경>을 읽는 이유는 인생의 여행길에 불어올 순풍과 역풍에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대담한 눈으로 폭풍우 휘몰아치는 바다를 바라보고 항햬 계획을 세워야 하고,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겨 원하는 곳으로 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역경>>에서 잘 될 거라고 해도 그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순풍일 뿐이다. 순풍이 불어도 내가 닻을 끌어올리고 돛을 활짝 펴 항해를 시작하지 않으면 어떤 좋은 일도 저절로 내 것이 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역경>>을 읽으면 된다.
끝으로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보다'와 '보이다'는 다르다는 거다. '보다', 즉 보는 쪽은 주체이고 지배하는 것이며 우월한 것이다. 이에 비해 보이는 쪽은 객체이고 지배되는 것이며 종속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이는 것이 흔히 불안을 가져다 주게 되는 이유는 보이는 것만으로도 자기의 주체성이 무시되고, 자기가 도구로 보이는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는 자와 보이는 자는 시선 속에서 정치적 권력관계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신은 항상 우리를 보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러니까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보이는 쪽은 주체가 아니라 사물이 되는 것이다. 그만큼 보는 자는 강한 자이다. "보는 것은 주체이고 정신이다. 보이는 것은 객체이고 사물이다. 내가 타인을 단순히 보고 있는 한 타인은 단순한 사물이다." (미와 마사시 <신체의 철학>)
우리는 타인을 사물로 바라보지 말고,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여야 한다. 얼굴 대 얼굴로 만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무한(레비나스 용어, 네가 쌓은 경계의 담벼락이 무너지면서)'으로 나아간다. 그러면서 우리는 주체성을 가지고 타인과 시선을 교류하는 건강한 사이가 된다. 이런 식으로 서로가 당당하게 시선을 교류하는 사이가 되어야 윤리적 주체가 된다. 그런 측면에서, 선글라스로 시선을 감추는 사람은 오히려 약한 존재이다. 선글라스를 쓴다는 것은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숨기므로 오히려 약한 존재가 된다. 당당하게 대상을 보지 못하는 약한 존재이다.
선글라스는 나의 시선을 보고 있는 대상이 나의 시선을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선글라스는 관음증 환자처럼, 다른 이를 몰래 보고 싶을 때 사용된다. 조르쥐 바타이튜는 말한다. 금지는 욕망을 부른다고. 보지 못하게 하니까 보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것이다. 보는자는 사냥꾼이고, 보이는 자는 사냥감이다. 그래서 선글라스로 시선을 감춘 사람은 오히려 약한 존재이다. 선글라스는 마주하지 못하는 시선을 숨겨 오히려 약한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선글라스 쓰는 이유는 내가 어떤 사람을 보는지 모르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일종의 관음증인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관음증 한자가 제일 무서워 하는 것이 자기가 보고 있는 자가 자기를 바라 볼 때이다라고 한다. 재미난 시가 한 편 있다. 강신주 철학자한테 소개받았다.
선글라스/김미정
그늘에 선 그는 모든 것이 검다 숨고 숨겨주고 추격하다 달아나는 시간의 뿔 테, 빛을 발한다 불타는 태양의 검은 테두리를 본 것은 그 즈음, 비닐봉지 속의 생선처럼 국물이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햇빛이 뛰어들고 방아쇠를 당기던 한 낮, 검은 선글라스의 날들이다
일초 전과 일초 후의 다른 암호처럼
그늘은 점점 짙어지는데
흩날리는 눈동자 때문인가요?
당신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네요
창문마다 물고기들이 몰려다니고
휘파람 소리가 흘러나와요 어디선가
물고기들이 벽을 타고 오른다 회색 가스 파이프를 타고 콘크리트 건물 간판 속을 헤엄치며 산꼭대기까지 오른다 오르고 오르다 자세를 휘발하고 마는 꿈꾸는 지느러미들이여! 그의 발 아래 썩은 냄새가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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