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2월 17일)
어제 우리는 20번 <관괘(觀卦)>의 '괘사' 이야기를 하다가 '관(觀)'이라는 이야기 다 못하였다. 그래 오늘 아침 더 이어간다.
<<주역>>에서 역(易)은 "낳고 낳는 것을 일러 말한다(生生之謂易)"이로 해석된다. 그러니 인간은 이 '생생의 이치'를 알아야 한다. 이 일은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다. 고미숙은 이를 "존재의 GPS"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먼저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하늘은 텅 비어 있지만 변화무쌍하다. 그럼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낳고 또 낳을' 수 있다. 그것을 일러 하늘의 무늬, '천문(天文)'이라 한다. 그 다음, 몸을 굽혀 땅의 이치를 살펴야 한다. 땅은 조밀하고 구체적이며 견고하다. 그래서 만물을 두루 포용할 수 있다. 그것을 일러 지리(地理)라고 한다. 천문과 지리, 그 사이에서 인사(人事)가 결정된다. 천문과 지문 그리고 인사의 삼중주가 한 인간 존재가 만들어 내는 삼중주이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다. 이 인사(人事)를 하는 행위를 우리는 문화(文化)라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문명(文明)이다. '경작(耕作)'하지 않고 문화에서 나오는 문명을 기대할 수 없다. 문화라는 단어의 어원이 잘 말해준다. 배철현 교수는 최근 자신의 <묵상>글에 다음과 같이 문화를 잘 정의했다. "‘문화’에 해당하는 영어단어 ‘컬쳐(culture)는 ‘땅을 개간하다, 돌보다’란 의미를 지닌 라틴어 동사 ‘콜레레(colere)의 과거 분사형인 ‘쿨투라(cultura)에서 파생되었다. 그 의미는 ‘관리된 것, 개간된 것’이란 의미다. ‘문화적인 인간’이란 자신을 관리한 사람, 자신의 마음을 갈아엎은 자다. 그(녀)는 그곳에 새로운 종자의 씨를 심고, 그 씨가 발아하고 자라나고 커다란 나무가 되어 새들이 둥지를 틀고, 사람들이 그 나무가 자비롭게 주는 그늘에서 쉬도록 배려한다. 자신을 돌아본 적이 없고, 자신의 심전(心田)을 갈아엎은 적이 없는 괴팍한 사람은 야만인(野蠻人)이다. 야만인은 자신의 욕심과 야망의 노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한 적이 없고, 제어한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행복을 타인을 제어함으로 획득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한다. 그에겐 무질서와 폭력이 법이다." 그 반대가 문명인이다. 나는 별도로 한 공간을 마련하여, 그 곳을 "세심실(洗心室)"라 이름을 짓고 마음의 밭을 갈고 있다.
"관어천문 찰어지리(觀於天文, 察於地理)"가 <<주역>>의 '생생의 이치'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 지 막막할 때는 이 8자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 말을 줄이면 '관찰(觀察)'이다. 이 말은 천문을 보고, 지리를 살핀다는 말이다. 세상에 관한 모든 지식은 일차적으로 관찰을 통해서 습득된다. 안다는 것은 이 관찰에 의해서 형성된 그 무엇이다. 관찰은 인간이 세상과 교류하는 통로이며, 세상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초석이다.
한문으로 관찰의 낱말 풀이를 해 본다. '관(觀)'은 '황새(雚)가 큰 눈을 뜨고 본다(見)'이다. 또는 '황새가 하늘에 날아 올라 세상을 크게 본다'는 뜻으로 '객관적인 세상을 크게 조망해 본다'는 의미가 있다. '찰(察)'은 '집(宗)에서 제사(祭)를 올리며 신의 뜻을 알아낸다'는 뜻으로 지극한 정성을 기울여 사물과 상황의 진의를 파악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관'은 하늘을 보며 세상을 크게 조망하는 것이고, '찰'은 땅을 굽어 보며 세부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따라서 관찰은 큰 흐름의 줄기를 보고, 세부적인 일의 정황을 파악한다는 두 가지 방법이 동시에 수반되는 것이다. 큰 흐름만 보고 세부적인 정황에 대한 살핌이 없으면 두루뭉술한 이야기가 될 것이고, 세부적인 정황만 살피고 큰 흐름을 보지 못하면 그 정황의 정확한 주소지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관찰이라는 것은 단지 객관적인 세상을 보는 것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스스로를 객관적인 대상으로 던져 놓고, 던져진 자기 자신을 살펴보는 것도 관찰이다. 그리고 모든 현상과 존재를 관찰하는 데, 우선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그 다음 큰 흐름을 보고, 세부적인 정황을 살펴 본다. 나를 관찰하고, 세상을 관찰한다. 나를 관찰하고, 세상을 관찰하는 그 무엇을 또한 관찰한다.
요약하면, <<주역>> "계사전" 제4장의 "우러러서는 천문을 보고(仰以觀於天文, 앙이관어천문), 구부려서는 지리를 살핀다(俯以察於地理, 부이찰어지리)"에서 "관어천문, 찰어지리"가 나온 것이다. 이는 하늘의 이치인 천문은 관(觀)하고, 땅의 이치인 지리(地理)는 찰(察)한다는 것이다. 거대한 국면인 하늘의 이치는 관(觀)하고, 구체적인 땅의 이치는 찰(察)한다는 것이다. '관'과 ''찰"이 겸해질 때 세상의 이치를 제대로 알게 되는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두개의 대립되는 가치의 정도와 경중을 깊이 관찰하고 측정하는 과정을 '쎄오리아(theoria)'라고 했다. 이를 우리 말로 하면 '관조(觀照)'이다. 이것은 사물을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어제의 관습대로 보지 않고, 그 대상 자체로 보려는 시도를 말한다. 이 그리스어는 영어의 '씨오리(thory)'가 된다. 한국 말로는 '이론(理論)'이라 한다. 그러니까 이론은 '한참 보기'란 인내를 통해, 그 대상 그 자체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섬광을 포착하는 행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을 항상 제 3자가 되어 관찰하는 행위를 최고의 삶으로 여겼다.
우리는, 하루 종일, 두 눈을 통해 들어오는 많은 정보들을 ‘나’라는 렌즈를 통해 쉴 새 없이 보고 해석한다. 그 해석된 정보들은 ‘나’라는 정체성을 건설하는 조그만 벽돌들이다. 우리가 보고 싶은 대상을 온전히 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인가?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란 표현처럼,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이다. 내가 두 눈으로 어떤 대상을 볼 때, 나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수동적으로 볼 수도 있고, 혹은 반대로 적극적으로 관찰 할 수도 있다. 그래 오늘 아침은 본다는 것에 대한 다양한 층위를 정리해 본다.
▪ look-수동적으로 그냥 보다: 수동적으로 ‘그저 보는 행위’는 장님이 아닌 이상, 누구든지 본다. 그저 보는, 그러나 나의 정체성을 만드는 정보가 되지 못하고 사라지는 ‘보는’ 행위를 영어로 ‘룩’look이라고 부른다.
▪ look at-우리 시선이 그 대상에 머물러 소통을 시도한다: ‘그저 보는 행위’와 다른 ‘보는 행위’이다. 한자로는 '시(視)'다. 영어 단어 ‘룩’look에 전치사가 붙기 시작한다. ‘쳐다보다’(look at; look upon), ‘돌보다’(look after) 혹은 ‘(사전에서 낱말을) 찾아보다’(look up) 등이다.
▪ see-우리가 어떤 대상에 관심이 생겨, 내 시선이 따라가 그 대상에 머무는 것이다. 그 행위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가 ‘씨(see)'이다. ‘본다’는 의미로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이 단어는 원래 ‘눈으로 따라 가다’라는 의미다. 관찰자가 그 대상을 자신의 눈으로 끌고 들어와 자신의 경험 안에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 관찰자의 눈으로 그 대상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행위다.
▪ watch: 우리는 대개 사물들을 무심코 보는 습관대로 보며(look), 그 대상에 관심을 가지고 눈으로 따라가지(see) 않는다. 우리가 흔히 천재라고 부르는 과학자, 예술가 혹은 작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자신이 마주친 관찰의 대상을 인내하며 보고 또 보는 자들이다. 그들은 단순히 보고, 눈으로 따라가는 것을 넘어서 ‘관찰(觀察)’한다. ‘관찰’이란 자신이 응시하는 대상을, 처음 보는 것처럼, 자기 스스로 ‘깨어 있어야’ 한다. 자신이 그 대상에 관한 선입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여,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영어로 ‘워치(watch)'라고 부른다.*
▪ perceive: 영어단어 ‘워치’가 관찰대상의 겉모습을 관찰하거나 혹은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행위라면, 영어단어 ‘퍼시브(perceive)'는 관찰 대상의 속 모습 혹은 자신의 속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 보는’ 행위다. ‘위치’watch가 눈으로 보는 행위라면 ‘퍼시브’perceive는 마음으로 보는 행위다. ‘퍼시브’는 인간의 오감을 모두 동원하여 ‘철저하게’(per) 자신이 응시하는 대상에 감추어진 핵심이나 원칙을 자신의 소유로 ‘장악하는’(ceive <*capere) 행위다. ‘퍼시브’를 ‘꿰뚫어 보는’ 행위다.
▪ contemplate, meditate on: 우리가 보는 대상 중에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이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충분한 성공과 가치를 이루어 내지 못한 현재의 삶을 깎아내리는 대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일들을 찾는 거다. 이때 가장 먼저 할 일은 자신에 대한 철저한 점검이다. 관조의 단계이다.
<<주역>> 읽기를 하는 가운데, 시간들은 속절없이 흐른다. 벌써 2월도 거의 다 지나간다. 그렇지만, '낙재기중'(樂在其中)'(<<논어>>), 즉 "인생의 즐거움이란 자신이 열심히 하고 있는 일,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이 위로를 받는 아침이다. 오늘 아침 시가 관찰의 힘에서 나온 거다.
스펀지/권지영
얇은 솜 위에 올려 둔 콩이
물을 머금더니 발이 튀어나오고
햇빛 닮은 쉼표 하나 찍어준다
초 단위로 살아서
사방으로 뻗어가려고
가녀린 침묵을 세운다
연두로 물들이는 세상 아래
촉촉한 스펀지가 울고 있다
콩 한 알이 울어야 할 슬픔을
모두 뱉아 내고
거룩한 울음 앞에
우두커니 서서
쉼표로 돋아난 발자국을
꼼지락거린다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에 있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산층이 두터운 사회로 목표를 바꿔야 한다. (0) | 2024.02.18 |
---|---|
염려가 현실이 되었다. (0) | 2024.02.18 |
눈물은 왜 짠가 (0) | 2024.02.17 |
변방을 찾아서(1):천둥산 울고 넘는 박달재 (2) | 2024.02.17 |
"참된 사람이 있고 난 다음에 참된 지식이 있다." (1) | 2024.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