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7.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2021년 6월 23일)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사람이 먼저인 세상에서 살고 싶다. 사람보다 높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성매매와 절도 기사에 조국 전 장관 딸의 모습을 일러스트로 내세웠다. 안쪽엔 조국 전 장관의 뒷모습을 변형시킨 이미지까지 세워 두었다. 기사와 아무 상관 없는 일러스트이다.

"기자도 아니고, 언론사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다. 그냥 악마가 백주의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가 지옥이 아니고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양심과 상식이 조롱 당하는 시대. 이런 시대는 마땅히 망해야 한다. 조국 전 장관은 이런 말로 지금 통곡하고 있다. 인면수심(人面獸心) 의분전응(義憤塡膺), 천노인원(天怒人怨)" (류근)
"보는 순간 쌍욕이 나왔다. '니들이 인간이냐.' '니들이 보수냐, 인간 쓰레기이다'"라고 분개한 페친 박선화는 "어떤 화려한 이념도 인간성을 넘기면 그건 더 이상 정의가 아닌 거다. 진보고 보수고 웃기지들 말고 인간이면 인간 답게 살자"고 말했다. 나도 분노해서 바로 공유를 했다.
나는 조국 문제만 나오면 벙어리 냉가슴이었다. 내 마음에 얹힌 응어리를 페친 박선화가 풀어 주었다. 바로 이거다.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각자의 경제적 능력만큼 어떤 식으로라도 최선의 투자를 하고 있는 '내로남불 자식 교육' 문제. 여기서 완전 투명한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고, 어느 선이 공정을 넘어서는 것인지도 판단이 쉽지 않다.. 조국 전 장관 집안의 문제가 그 중 유일무이한 상황이 아닌 것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상대적 죄악인지 절대적 죄악인지 내 식견으로는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는 문제"이다. "그저 미디어와 검찰, 정치꾼들에 의해 일반적인 법 집행조차 전근대적인 도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에 경악할 뿐, 어떤 말도 할 수다 없었다." 나도 그랬다. '죄 없는 사람이 그에게 돌을 던져라.' 이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내가 좋아하는 우리 동네 권선필 교수(목원대)의 담벼락에서 이런 글을 만났다. "여성, 청년들이 아재들과 함께 해야 하는 주민자치." 나도 그 아재가 아닐까? 남보다 힘을 갖는 것 외엔 제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을 한번도 배운 적 없는 내 나이 또래들인 아저씨들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들의 인정받고 싶은 욕망의 끝이 관변 단체에 한 자리 걸치거나, 선출직 주변에서 맴돌게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내 동네에서도 그것이 목격된다. "이들 아재들을 고립시키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함께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 주민자치의 과제가 되고 있다." 주민자치의 문제만이 아니다. 전 사회에 그런 문화가 만연되어 있다. 사람이 우선이고, 사람이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권교수는 김규항이라는 분의 글을 공유했다. 나도 자연스럽게 그 글을 읽게 되었다. 거기서 만난 다음과 같은 주장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한국 중 장년 아재들은 신체도 지력도 예전 같지 않다고 느낄 무렵, '힘의 새 껍질'을 찾는 방식이 그것이라 보았다. 그리고 그 정점이 '국회의원 되기'라 한다. 이들은 국회의원이 뭘 하는 지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 국회의원들을 보면, 일상에서 특권이나 편리는 최고 수준이다. 최근 뉴스를 보면, 이젠 '대통령 되기'까지 뻗은 듯하다. 도나 개나 다 후보로 나온다. 다시 국회의원 이야기를 해 보자. 국회의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어디서든 호통치고 어디서든 으스대는 것이다. 아마도, 그 때가, 웃기지만 그들에겐 여전히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처절한 순간인 것 같다.
대통령 출마 이야기를 해본다. 최근에 가장 눈에 들어 오는 출마 선언은 추미애이다. 그는 정치 철학을 내걸었다. "사람이 높은 세상을 향한 깃발을 높게 들기로 했습니다. 사람보다 높은 것은 없습니다. 사람은 돈보다 높고, 땅보다 높으며, 권력보다 높습니다." "사람을 높이는 나라는 주권 재민의 헌법 정신을 구현하며, 선진 강국의 진입로에서 무엇보다 국민의 품격을 높이는 날입니다."
예수는 사람으로부터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사람을 섬기러 왔다고 했. 예수를 섬기는 것은 예수가 바라던 것이 아니다. 정치의 목적도 그럴 것이다. 정치의 제 1목적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원효의 화쟁(和爭) 사상이기도 하다. 사람이 만물 만상과 어떻게 회통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상이다. "사람이 높은 세상", "사람을 높이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정신이다.
긴 글이지만,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묶인 개가 짓는 거"다. "내가 살아 있다는 불빛 같은 신호"이다. "깊고 깜깜한 사람 사는 세상"에서 우리는 여전히 "묶여" 살고 있다. 생각을 당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여 묶여진 목줄이 풀어지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묶인 목줄의 댓가로 내 앞에 놓여진 밥그릇을 잃게 되지는 않을까 염려하면서, 묶인 우리가 이렇게 짖는 것도 외롭기 때문이다.
묶인 개가 짖을 때/정일근
묶인 개가 짖는 것은 외롭기 때문이다
그대, 은현리를 지날 때
컹! 컹! 컹! 묶인 개가 짖는다면
움찔거리지도, 두려워 물러서지도 마라
묶여서 짖는 개를 바라보아라, 개는
그대 발자국 소리가 반가워 짖는 것이다
목줄에 묶여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세상의 작은 인기척에도
얼마나 뜨거워지는지 모른다
그 소리 구원의 손길 같아서
깜깜한 우물 끝으로 내려오는 두레박줄 같아서
온몸으로 자신의 신호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묶인 개는 짖는 것이다
젊은 한때 나도 묶여 산 적이 있다
그때 뚜벅뚜벅 찾아오는 구둣발 소리에
내가 질렀던 고함들은 적의가 아니었다
내가 살아 있다는 불빛 같은 신호였다
컹! 컹! 컹! 묶인 개가 짖는다면
쓸쓸하여 굳어버린 그 눈 바라보아라
묶인 개의 눈알에 비치는
깊고 깜깜한 사람 사는 세상 보아라
‘묵자(墨子)’가 말한 ‘무감어수감어인(無鑑於水鑑於人)’를 생각했다. “자신의 모습을 물에 비추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비춰 보라”는 뜻이다. 스스로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고, 그에 대한 타인의 입장을 알아야 서로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의미다. 그 사람 속에 비춰진 내가 아름다우면 나는 그 사람의 좋은 사람이다. 물에 자신을 비춰볼 때는 겉모습만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에게 자신을 비춰보면 그 사람 속에 자리한 나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지금 당장 옆에 있는 사람의 눈동자와 그의 생각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부터 바라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이 스마트폰 화면에 갇힌 채 살아가고 있다. 타인에게 방관자로 살아가면서 자기 입장만 이해해 주길 바라는 건 욕심이다. 내가 먼저 상대방의 눈을 보고, 손을 내밀고, 안아줘야 한다.
이런 사람이고 싶지 않다. 자신의 삶에 자기 자신과 자신의 현실에서 주인공이 아니라, 이념이나 신념의 노예로 사는 사람이고 싶지 않다. 다음과 같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남이 정해준 정답의 노예로 사는 사람이다.
- 목에 힘줄을 세운다.
- 눈에 핏발을 감추지 않는다.
- 팔뚝을 휘젓고 목소리를 높인다.
- 기준을 신념처럼 가진다.
- 이 세상을 모두 참과 거짓이나 선과 악으로 따지기 좋아한다.
- 세상이 기준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가 중요하다.
- 기준을 만들거나 기준을 지키는 일을 당연시 하고 중요하게 다룬다.
- '기준에 맞으면, 선이고, 맞지 않으면 악이다. 기준에 맞으면 참이고, 맞지 않으면 거짓이다'라고 믿고 악을 쓴다.
- 무엇이나 기준을 만들어 윤리적 접근을 하려 한다.
- 윤리적 행위에 익숙해지면 열심히 규제를 만든다.
- 세계가 새롭게 재편되는 데에도 규제로 가득차서 움직이지 못한다. 새로운 세계를 구시대의 규제로 다룬다.
- 바보짓을 하면서도 워낙 확신에 차 있기 때문에 윤리적 부담은 없다.
- 선악의 문제를 다뤄야 진실하게 사는 느낌을 갖도록 훈련 받았기 때문에, 당장은 해당 사건의 주도권도 갖고 있지 못하면서 윤리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자기 착각이거나, 자기 착시이다.
- 선명성을 내세워 진실한 주체로 드러나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자신이 얼마나 충성스런 노예인가 만을 드러낼 뿐이다. 이것은 눈 어두운 사람들은 알 수 없다. 눈 밝은 사람만 안다.
그럼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그래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를 다시 꺼냈다. 한형조 교수가 "자기 구원의 가이드 맵"리는 부제와 함께 독해한 책이다. 제2도 "서명(西銘)"이 인간의 소명에 대한 내용이다. 인간, 즉 사람의 소명은 자신과 다른 사라의 '위상'에 따라, 처한 '상황'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그에 걸맞는 행동 혹은 대처를 촉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인은 공경하고, 어린 아이들은 보듬으며, 현자를 존중하고, 성자를 격려하며, 의지할 데 없는 고아와 과부들의 복지, 궁핍에 허덕이는 자들을 구제한다." 이것이 자연(自然)이고 도리(道理)이다. 이런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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