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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변신의 시간/심보선

인문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10월 14일)

오늘도 조던 B. 피터슨의 <<12가지 인생의 법칙(12 rules for life)>> 중 일곱 번째 rule(규칙)인 "쉬운 길이 아니라, 의미 있는 길을 선택하라"는 이야기를 이어간다.

우리 조상들은 허구적 이야기를 현실화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지배하는 힘을 거래와 흥정이 가능한 영혼으로 의인화 했다. 그리고 그 힘을 또 하나의 인간으로 보았다. 이런 의인화는 큰 효과가 있었다. 실제로 미래가 과거의 행동을 지켜보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높은 곳에 앉아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기록했다가 사후 심판의 날에 펼쳐 보이는 하느님도 이런 의인화와 다르지 않다. 이로써 미래가 바로 심판하는 아버지라는 상징적이면서도 생산적인 믿음이 자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희생과 노동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의미 있는 출발 지점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불충분하다. 희생과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다음의 두 질문에 답을 구해야 한다.

(1) 지금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가?
(2) 그리고 나중에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작고 단순한 문제 해결은 작은 희생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크고 복잡한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하려면 더 크고 가치 있는 희생이 필요하다. 더 큰 희생은 쉽지 않지만 더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즉, 미래를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고, 희생이 클수록 더 좋은 미래를 맞이할 확률이 높다. 그러니까 '희생으로 미래가 더 나아진다'는 것은 기본적인 원칙이다. 그렇다면, 이 주장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구체화 과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에 답해야 한다.

(1) 모든 희생 중에서 가장 크고 효과적인 희생, 즉 가장 이상적인 희생은 무엇일까?
(2) 가장 큰 희생을 바쳤을 때 미래는 얼마나 좋은 모습일까?

우리는 즐거움을 뒤로 미룰 수 있고, 그것이 더 좋다는 걸 무척 어렵게 깨달었다. 만족 지연은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내재해 있는  동물적 본능과 반대되는 것이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현실 세계에서는 즉각적인 만족이 더 중요하다. 문명이 지연된 보상을 보장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안정된 상황에서만 만족 지연이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니까 사회 안정과 만족 지연이라는 두 목표를 동시에 이루어야 한다.

그게 공유(共有)이다. 그 공유는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공짜로 주고 아무것도 돌려받지 않는 행위가 아니다. 공유한다는 것은 교환과정을 시작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이사를 가면 동네 이웃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거다. 지나친 부탁이 아니라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사회적 상호 작용을 맺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새로 이사 온 사람의 부탁을 받는 것은 이웃에게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좋은 기회이다. 그리고 채무 관계가 발생하므로 이웃 역시 나중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둘 사이의 친밀감과 신뢰가 쌓이게 된다. 이처럼 주고 받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낯선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망설임을 극복해 간다. 나는 멋진 삶은 관계와 활동의 양과 비례한다고 본다. 그래 관계를 시작하는 방식은 이렇게 이루어짐을 잘 알 필요가 있다. 교환하는 거다. 그 교환이 순환이 아닐까?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보다 뭔가를 가진 게 좋다. 그런데 갖고 있는 것보다 아낌없이 공유하는 게 훨씬 더 좋다. 이게 순환이다. 이러한 순환 속에서 무엇보다 아낌 없이 공유하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지는 것이 가장 좋다. 공유하는 물건보다 '공유하는 사람'이라는 평판이 더 오래가며 더 큰 신뢰를 얻고, 사람들이 접근한다. 이로써 나는 신뢰, 정직, 관용의 토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만족지연과 순환을 위한 교환은 종교적 의식과 희생이라는 은유적 이야기를 통해 표현된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늘에는 모든 것을 보고 우리를 심판하는 절대자가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포기하면 그분이 기뻐하실 것 같다. 우리가 그런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지옥문이 열릴 테니까 그분을 기쁘게 해 줘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희생하고 공유하는 걸 습관화해야 한다. 그러면 모든 일이 원만하게 풀릴 것이다." 피터슨은 이렇게 쓴 다음 다음과 같은 주를 달었다. "하늘에 실제로 그런 절대자가 있는 없든 간에 이 일은 모두 진실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하느님을 하나의 인격자라기 보다 우주의 원리, 즉 자연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천망회회, 소이불루(天網恢恢, 疎而不漏)라는 말을 좋아한다. '하늘의 그물은 넓어서, 성기기는 하나 새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늘의 그물은 구멍이 촘촘하지 못해 엉성하지만 오히려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말이다. 하늘이 모르는 죄가 있는 듯하지만, 벌 주기에 적당한 때를 선택할 뿐이다. 큰 물고기는 홀로 다니지만, 작은 물고기는 떼를 지어 다닌다. 작은 물고기는 서로 뭉쳐 돕지 않으면 큰 물고기한테 다 잡혀 먹히고 말 것이다. 하지만 큰 물고기도 수명이 다해서 죽거나 그물에 걸려 잡힐 때가 있다. 그걸 알아야 한다.

오늘도 비우고, 나누는 날로 채우고 싶다. 비우고 덜어내 텅 빈 고요함에 이르면, 늘 물 흐르듯 일상이 자연스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 포장하지 않으며, 순리에 따를 뿐 자기 주관이나 욕심을 고집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그의 모든 행위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항상 자유롭고 여유로울 것이다. 샘이 자꾸 비워야 맑고 깨끗한 물이 샘 솟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만약 비우지 않고, 가득 채우고 있으면 그 샘은 썩어간다. 장자 식으로 말하면, 그게 도(道)와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는 길이다. 나에게는 "변신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가을의 감나무에서 그 시간을 만난다. 오늘 아침 사진처럼.

변신의 시간/심보선

아무 거리낌 없이 인생은 시작됐다
어린 나뭇가지들이
계절과 계절 사이에서 죽어갈 때
나는 양미간을 찌푸려
그 가냘픈 육신들을 이마 위에 옮겨 심었다
시간의 무덤에 꽃과 향과 초를 바치는
번제(燔祭)의 밤마다
나는 백일치의 기억을 불태우곤 했다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과 상관없이
늙어갔지만 늙어간다는 것과 상관없이
죽기는 싫었다
모든 방황은 무익했으며
모든 여행은 무가치했다
파도의 음계는 어느 바다인들 다르지 않았고
구름의 울음은 어느 그림자도 흔들지 못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기어이 머물 수 없음이여
또한 결코 사라질 수 없음이여
오래전 길 위에서 만난 어느 현자는 말했다
인도네시아의 일만 사천 개 섬들은
모두들 하나씩 화산구를 지니고 있다네
그대는 멸망으로 나아가는 그대만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가
오늘 나는 오래된 현자의 말을 떠올렸지만
하얀 얼굴로 밥을 떠먹는 너를 바라보며
강퍅한 결심 하나를 몰래 거두어야 했다
너는 내 옆에서 아이처럼 잠들었다
잠든 너를 바라보며
나는 지금 인간의 침묵에서
벌레의 침묵 쪽으로 조금씩 나아간다
멸망에 관한 한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미래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그 길은 마음을 비우고, 나를 장례 시키고, 하늘의 퉁소 소리를 듣게 한다.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내 안에 꽈리를 틀고 있는 시기와 질투 때문이다. 시기는 남이 잘 되는 것을 샘하며 미워하는 마음이다. 비슷한 말로 '시새움'이 있다. 자기보다 잘되거나 나은 사람을 공연히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이다. 줄여서 '시샘'이라고도 한다. 질투는 다른 사람이 잘되거나 좋은 처지에 있는 것 따위를 공연히 미워하고 깎아 내리려 하는 행위이다. 시기와 질투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게 된 것은 지난 주에 소설가 백영옥의 칼럼을 읽었기 때문이다. 소설가는 러시아 민화를 소개했다.

"운 좋게 마술램프를 발견한 농부가 있었다. 램프를 문지르자 램프 속 지니가 나타나 소원을 말하라고 했다. 농부는 옆집에 젖소가 있는데 온 가족을 다 먹이고도 남아서 그들이 우유를 팔아 큰 부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농부의 얘길 듣던 지니가 "옆집처럼 우유가 잘 나오는 젖소를 구해드릴까요?"라고 물으니 농부가 대답했다. "아니, 옆집 젖소를 죽여줘!"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속 깊은 질투와 시기심을 말해 버린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런 시기와 질투로 가득한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왜 그럴까? 첫 번째 원인은 지나친 경쟁 속에서 살고, 거기서 발생하는 불평등이 문제라고 본다. 게다가 우리의 교육문법이 잘 못되어 깊이 사유하는 훈련을 시키지 않고, 경쟁 속에서 지식만을 암기하는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쟁 속에서 패배감을 느끼면, 우리는 자존감을 잃게 된다.

남의 불행과 고통을 보며 느끼는 기쁨을 독일어로 '샤덴프로이데'라고 한다. 고통을 뜻하는 Schaden과 기쁨을 뜻하는 Freude의 합성어이다. 사람에게는 타인의 고통을 은밀히 즐기는 심리가 있다.  사람은 악하고 선한 본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한 속성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악한 속성을 최대한 멀리하는 것이 행복해 지는 길이라 나는 믿는다. 그건 자존감에서 나온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오랜 속담은 이런 인간 심리를 잘 드러낸다.

소설가 백영옥은 미국 소설가 고어 비달의 이야기도 소개했다. "친구가 성공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죽는다." 이처럼 축구에서 골을 넣은 선수는 기쁨에 환호하지만 상대편의 골키퍼는 고통으로 얼굴을 감싼다. 극심한 경쟁 사회에서 시기와 질투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기회와 과정이 공정하다면 입시와 승진, 사업의 성공을 보며 사람들이 느끼는 샤덴프로이데의 심리를 누구도 손가락질할 수 없다. 원래 인간 세계가 야박하고 비정하다.  

반면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 왜냐하면 타인의 슬픔은 아무리 나눠도 마음이 무거울 뿐 진짜 내 것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이웃의 기쁨을 진심으로 나누는 경우는 좀 더 힘들다. 시기와 질투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시기와 질투가 생기려 하면, 이런 식으로 심리 상태를 바꾼다. 이를 나는 '풍요의 심리'라 한다. 세상에 좋은 것은 많고, 풍요로워서 남이 성공하고 인정받아도 내 몫은 남아 있다고 보는 심리이다. 그 반대 가  '빈곤의 심리'이다. 이 세상 좋은 것은 매우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남이 가져가면 그만큼 내 몫이 줄어든다고 느끼는 심리이다. 백영옥 소설가는 불교의 무디타(Mudita)의 지혜와 제퍼슨이 한 말을 소개했다. 무디타는 타인의 행복을 즐기는 기쁨을 뜻한다.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한 말은 이 거다. "누가 내 등잔의 심지에서 불을 붙여가도 불은 줄어들지 않는다." 나는 '송무백열(松茂柏悅)'이라는 사자성어를 좋아한다.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도 기뻐한다. 사촌이 땅을 사야 나도 잘된다'는 말이다. 제2의 기계시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시대, 혁신의 길목에서 협업과 협력이 필요한 우리의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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