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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신의 연습장 위에/김승희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6월 10일)

매일 아침에 쓰는 나의 <인문 일기>는 시간 여행자인 내가 잠시 머물고 있는 그 시대와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를 기록하는 일이다. 당시의 상황이 내 영혼에 어떤 공명을 일으켰는지를 기록하는 일이다. 나의 <인문 일기>는 편지를 병에 담아 바다에 띄우는 일이다. 이 이야기가 누구를 향해 흘러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시간 여행자이다. 무심한듯 여울져 흐르는 시간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 무늬를 만든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 시간은 어디에나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기억과 망각이 양화와 음화처럼, 뒤섞인 기묘한 무늬를 만들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 무늬에 이름을 붙인다. 그것들이 기쁨, 슬픔, 행운, 불행, 달콤함, 쓰라림, 희망, 절망 등이다. 시간은 그 무늬 가운데 어떤 것은 돋을새김으로 더 뚜렷하게, 어떤 것은 스러지게(사라지게) 만든다. 어제도 충만한 하루의 시간을 보냈다. 나는 삶을 '시간 여행하는 순례(巡禮)'로 생각한다. 순례의 원래 의미는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방문하여 참배하는 일'이다. 내 삶을 그런 '순례'로 생각하는 것은, 먹고 사는 일과 주어진 시간을 살아내는 일에는 엄정하지만, 현실에 투항한 채 되는 대로 살고 싶지 않다는 거다. 창문을 열어 환기하듯, 나의 <인문 일기>로 후덥지근한 일상 속에 영원을 새기는 일이 순례이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김승희 시인의 <신의 연습장 위에>에 나오는 "나는 하나의 병든 물음표"이다. 모호하고 불확실하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생을 기획한다.

가야할 길을 알고 걷는 이의 발걸음은 흔들림은 있을지언정 방향을 잃는 일은 없다. 예를 들어, 산상수훈의 '팔복'을 길로 삼고 살아간다는 것은 마음에 든든한 지주를 세우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눈이 열린 이들은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는다. 그 길로 삼은 나는 자본주의 질서에 순응하기를 거부한 채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해 벗삼아 살아 간다. 얼 바람 맞은 사람처럼 겅중거리며 사는 이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사람임이 분명하다.

3일 동안, 나의 <인문 일기>는 산상수훈의 "팔복" 이야기를 했다. 결국은 사랑의 따뜻함을 잃지 않는 거다. 프랑스 피에르 신부가 "서로 사랑하는 인간들만 있다면 모든 걸 만들 수 있다. 행복도, 진정한 평화도, 꼭 필요한 돈까지도." 우리는 "신의 연습장 위에서", "한나의 병든 물음표", 아니 "울음표"를 품고 사는 거다. 산상수훈 "팔복"이 보여준 길은 가슴 시린 이를 덮어주려는 마음을 갖고, 허방 다리를 짚은 것처럼 허우적거리는 이들의 설 땅이 되어 주어라는 거다. 메마른 세상을 걷는 이들에게 시원한 샘물 한 잔 대접하라는 거다. 나머지 산상수훈의 전하는 제7, 8복은 시 다음으로 이어간다.

루마니아 와인 공동 구매에 참여해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아침 사진은 내 주말농장의 익어가는 귀리이다. 모르고 심었는데, 말없이 자라 머리를 숙인다. 귀리도 묻는다. "신의 연습장 위에"서. 그래도 평화이다.

신의 연습장 위에/김승희

나는 하나의 희미한 물음표
어느 하늘, 덧없는 공책 위에,
신이 쓰다 버린 모호한 문장처럼
영원히 결론에 이르지
못하는
나는 하나의 병든 물음표,

뒤주 안에 갇힌 왕자가
어둠 속에 날아다니는 들 불 도깨비불에
홀려

퍼얼펄 옷을 찢어버릴 때의
피의 급류처럼
때때로 내 몸속으로도 그런 광기 젖은
물음표의 급류들이 뚫고
지나가느니---

신령님이 세상과 하늘에 대해
가장 붉은 글을 적으실 때에
흰 뼈
내 두개골의 가장 무심한 흰 뼈를
그의 연필심으로 바치고 싶었었지,
그리고 나머지 나의 몸은
강물 어느 모든 강물 위에 누워
말없음표처럼
평화를 사랑하리라고......

나는 하나의 초라한 물음표,
신의 나라에는, 물음표 가진 문장이
필요 없다 하여서,
나는 하나의
더디 지워지는...... 울음표......

제7복: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평화는 히브리어로 "샬롬(Shalom)"이고,  그리스어로는 "에이레네(Eirene)"로 '죄나 허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 "사람들은 세상이 주는 박해가 없을 때, 냉장고가 가득 찼을 때, 생활에 골칫거리가 없을 때 평화롭다고 느낀다. 그런데 예수님의 평화는 다르다. 박해를 받을 때도 평화롭고, 냉장고가 비었을 때도 평화롭고, 생활에 문제가 있을 때도 평화롭다."(차동엽 신부)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아! 다 나에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은 다음 세 가지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① 우리가 질 수 없는 짐은 지우지 않겠다.
②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허락하지 않겠다
③ 우리에게 결코 불가능한 희생을 요구하지 않겠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진 짐과, 고통과 희생을 피하지 말고, 사랑으로 받아들인다면 무섭거나 두려울 리 없다. 우리의 마음가짐과 태도의 문제이다. 여기서 나오는 것이 평화이다. 이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이다.

이때 쓰인 '안식'이 그리스어로 '에이레네(평화)' , 히브리어로 '샬롬'이다. "참 평화는 풍랑 속에서, 전쟁터에서, 역경의 반복판에서도 누리는 평화"라고 차동엽 신부는 설명하신 적이 있다. 그럼 이런 평화를 어떻게 해야 누릴 수 있나?  차 신부는 "먼저 나 자신과 화해해야 한다. 내 안의 상처, 내 안의 허물을 수용해야 한다. 그리고 말하는 거다. '사랑해! 그래도 괜찮아.' 그렇게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사랑하면 화해가 이뤄진다. 그 다음에는 사람과, 또 자연과 평화를 이루는 거다"고 했다. 평화에 대한 좋은 설명이다.

가시에 찔리면 아프다. 심한 경우엔 곪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상처 난 자리를 얼른 닫아 버리기에 바쁘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그 뜨끔했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무는 것도 아니고, 아찔했던 기억이 영영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가시에 찔렸던 자리에 자꾸 마음이 가고 눈길이 머물러 비록 한동안일지라도 상처가 있는 곳이 가장 아픈 곳이 되며 그래서 마침내 내가 사랑하는 곳이 된다. 가슴에 찔린 상처도 그렇다. 수용하고 받아들이면, 아니 사랑하면, 평화롭고 행복하다. 그러면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산상수훈 제 7복이 마음에 와 닿는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그리고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라고 프란치스코 교종은 말한 적이 있다. 정의를 실현할 때 진정한 평화가 온다. 중동사람들은 서로 만나면, 아랍인들은 ‘살람 알레이쿰(salām aleykum)이라고 말하고, 이스라엘사람들은 샬롬(šalôm)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이 두 단어는 셈족인들의 추구하는 이상적인 삶의 비밀을 품고 있다. 아랍어 살람(salām)과 히브리어 샬롬(šalôm)의 원래 의미는 바빌로니아 경제문서에서 찾을 수 있다. 기원전 20세기에 바빌로니아 경제문서에 이 ‘샬람’šalām이라는 아카드어 단어가 등장한다. ‘샬람’은 어떤 개인이 부채를 상환하여 자유로운 상태를 지칭한다. ‘샬롬’ 혹은 ‘살람’이란 자신이 해야 할 의무를 알고, 그것을 완수하려고 집중할 때, 나에게 주어진 신의 선물이다. 그것은 ‘침착(沈着)’과 ‘평안(平安)’이다." 배철현 교수에게서 배운 거다.

제8복: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산상수훈 팔복" 중 끝인 제 8복 이야기를 할 차례이다. 차동엽 신부는 이 제8복이, 지금 살펴보고 있는 "팔복"의 절정에 해당한다고 말씀하시며, "여기서 핵심은 순교가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의 에너지가 없는 사람은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을 수가 없다"고 설명 하신 적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 "행복의 역설적인 비밀이 있다"고 했다. "박해 받음의 상징은 십자가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보면서 유대인들은 '돌팔이 메시아'라고 했고, 그리스 인들은 '어리석다'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들은 십자가에서 약함이 아니라 강함을 봤다. 죽음이 아니라 부활을 봤다." 그리고 이 강함은 "몰아(沒我)적인 사랑에서 뿜어져 나온, 죽음도 이기는 힘이다. 결국 시련과 고통, 박해를 이기는 건 사랑의 힘"이라는 거다.

부활을 장자가 말한  "오상아(吾喪我)"로 풀이하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유기체의 감각에 매몰되어 만들어진 편협한 ‘나’를 죽이고, 항상 변하는 세상을 받아들여 기억하고 느끼며 세상과 하나되는 ‘나’를 살려내는 것이다. 1년에 한 번이, 한달에 1번으로, 한달에 한번이 매일 1번으로, 매일 한번이 시시각각으로 편협한 ‘나’를 죽이고 세상과 하나인 ‘나’를 살려낼 수 있을 때, 물질을 지배하며, 자연을 재구성할 수 있는 힘을 깨달으며 진정한 부활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나의 마음(心)을 빼내면(咸), 타자를 인식할 수 있는 살아있는 마음인 감성(感性)이 생겨, 자존심(心)으로 똘똘 뭉친 아(我)가 죽고 자존감(感)이 충만한 오(吾)로 부활한다 싶다." (이순석)

왜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 되나? 차 신부에 의하면, "믿음과 소망, 사랑이 있다. 그 중에 왜 사랑이 제일인가. 믿음과 소망은 완성된 후에 사라진다. 그러나 사랑은 다르다. 완성된 후에도 지속된다. 영원히 지속된다. 결국 셋 중 사랑만 남는다. 사랑은 하늘 나라의 것이다." 랍비 힐렐의 가르침은  "자기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말라"이다. 이를 우리는 '황금률'이라 한다. 예수의 황금률은 더 적극적이다.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그러면서 예수는 '하늘 나라'는 내가 있는 이 시간과 이 장소에서 황금률을 실천할 때, 하늘 나라가 그 곳이고, 거기서 사랑을 받는 상대방이 바로 신이 된다고 주장한다. 여러 번, 자주 읽고 묵상할 내용들이다. 김기석 목사도 우리가 '팔복의 증표'로 한번 살아 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팔복의 증표"에서 증표는 내가 증명이나 증거가 될 만한 표가 되자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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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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