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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힘"

238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6월 9일)
몇 일 전 글에서 만난, <여우숲 생명학교> 김용규 교장은 삶에 필요한 단 두 가지의 능력, 더 나아가 온전한 삶을 사는 데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능력만 갖추면 족하다고 했다. 나도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 "제 스스로 삶을 감당할 수 있는 힘"
  •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힘"
 
그가 말하는 삶을 온전하게 하는 충분조건으로, 두 번째 능력이 ‘사랑하며 살 힘’을 갖는 것이라 했다. 그가 내리는 사랑에 대한 정의는 지극히 간결하다. ‘사랑은 함께하고 싶은 것, 그래서 기꺼이 함께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 본다. "우리는 사랑하는 존재와 함께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함께 차 마시고 밥 먹고 영화 보고 산책하고 여행한다. 그리고 마침내 함께 살고 싶어 한다. 내 감각이 맞는다면 사랑에 빠졌다고 하는 커플들은 대개 이런 흐름으로 결혼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랑이 주는 기쁨의 절반 만을 함께하는 것이다. 사랑은 그것의 또 다른 절반을 함께하고 싶고, 그래서 기꺼이 함께하는 것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나머지 절반은 대략 이런 것들이다. 그가 싱싱함을 잃고 늙어가는 나날들, 어느 날부터 드러나기 시작하는 그 사람 과거의 웅덩이와 그 아픔들, 어쩌다가 그가 삶의 경로에서 넘어져 용기를 잃고 절망에 젖어 흐느끼는 날들, 그에게 찾아온 병마와 그 처절함, 흐려지거나 뒤엉켜버려 내 이름조차 잊어버릴 수 있는 그의 망가지는 기억, 이제는 걷는 것도 불가능해진 몸, 심지어 그 몸에서 배어 나오는 냄새나는 날들…. 이렇게 삶의 어두운 날들마저 함께하고 싶고, 그래서 기꺼이 함께할 수 있는 마음과 실천이 가능해야 그가 누군 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힘을 갖춘 것이다."
 
사랑은 나무와 같다. 나무가 자라면 그 만큼의 그림자가 생기는 것처럼, 사랑도 사랑하는 만큼 사랑으로 당할 고통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 사랑의 고통을 줄인다고 그림자를 반으로 쪼개려면 사랑을 반으로 쪼개야 한다. 사랑은 고통이다. 내가 누군 가를 사랑한다면 그 고통을 감당한다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려면, 넘어지는 게 무섭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사랑을 하려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안 해 본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막상 겪어보면 그만큼 두렵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의 아픔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은 하나가 되는 순간 끝이 난다. ‘하나’되는 사랑은 사랑의 종말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 모두 혹은 두 사람 중 한 명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해야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전제를 함축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알랭 바디우는 그래서 사랑은 결코 ‘하나’가 아니라, ‘둘’의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그래 사랑은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 되는 길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러니 잔인 해져야 자기 사랑을 한다. 조연으로만 있으면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노예는 주인에게 잔인하지 못한 반면, 주인은 때리기도 하고, 상도 준다. 잔인해 지려면 자신의 품위 지키기를 내려놓아야 한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야성을 끌어내고 그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니까 사랑은 자신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 생명들과 같다. 김용규 교장에 의하면, 숲에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나무가 단 한 그루도 없다는 거다. 나무는 단 한 순간도 자신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과 평온한 바람과 적당한 비, 그 협조적인 날들을 먹고 자라는 나무는 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마침내 씨앗을 떠나보낸 뒤 안식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겪어내야 하는 삶의 어두운 측면들, 비협조적인 날들과도 기꺼이 함께한다. 김 교장의 멋진 표현을 나열해 본다.
 
"봄날 애벌레가 자신의 새 이파리를 뜯어먹어도,
어렵게 피워낸 소중한 제 꽃을 누가 아무렇지도 않게 따먹고 꺾어도,
줄기나 가지가 무엇인가에 사정없이 꺾여도,
감당하기 버거운 폭풍우가 거세게 불어쳐 와도,
채 익지 않은 채로 열매를 잃어야 하는 애처로운 날에도,
서릿발과 눈보라가 무자비하게 몰아쳐 오는 시린 날에도,
 
나무는 풀은 제 삶으로부터 단 한 순간도 도망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모든 날들과 기꺼이 함께한다."
 
한 편의 시와 같은 글이었다.
 
더 나아가, 자연의 생명들은 무엇보다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내는 삶으로,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다른 온갖 생명을 보듬고 품어낸다. 그 생명들을 기억하기 위해 이름들을 나열해 본다.
 
"굼벵이·지렁이·지네·고슴도치·노래기·땅강아지·개미…,
벌·나비·나방·반딧불이·딱정벌레…,
노루·고라니·멧돼지·족제비·너구리·오소리…,
꿩·동박새·직박구리·멧비둘기·딱따구리·동고비·올빼미·부엉이·새매·온갖 철새들…."
 
이렇듯 때로는 중립적이거나 자신을 돕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신을 파먹으며 해를 가하는 모든 존재들을 나무와 풀은 기꺼이 품어낸다. 이 얼마나 눈물겹고 아름다운가! 사랑에 관한 진실은 숲이 전하는 가장 아름다운 지혜이고, 생명성의 특징이다.
 
김 교장은 다음 질문을 던지고 바로 답을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1) "우리는 왜 제 스스로 삶을 감당하기가 그토록 어렵고, 자신과 이웃을 사랑할 힘은 그토록 미약한가?" 그 중요한 이유 하나는 우리 공부가 생명성을 채워가는 공부로 연결되기보다 반생명적 방향으로 향하는 삶을 겨냥해 왔기 때문이다.
(2)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의 차이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은 생명성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늠하게 한다.
(3) 생물학에서는 생물이 무생물과 구분되는 특성을 대략 이렇게 꼽는다. ‘생물은 세포를 기본 단위로 하고, 물질대사를 통해 에너지를 변환하는 능력을 가졌으며, 자기증식능력과 항상성 유지능력을 가지고 있다.’ 근대 이성의 특성을 따르고 있는 저 정밀한 생물학적 규명은 오늘날 유전공학 분야가 이루고 있는 눈부신 업적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겠으나, 우리가 삶을 감당하고 사랑하게 하는 데는 별 역할을 하지 못하지 않는가?
 
이런 질문을 던진 후, 김 교장은 '살아 있는 존재들을' 다음과 같이 규명한다. 살아있는 존재들은
  • 모두 새로워지려 한다.
  • 새로워지기 위해서 기어코 모험한다. 다시 말해 건너 가기를 한다.
  • 그래서 더러 아프다.
  • 살아있는 존재는 죽은 것보다 더 따뜻하다. 그리고 부드럽다. 그리고 더 잘 흔들린다.
 
김교장은 태아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녀석은 새로운 세계를 향해 그 위험하고 좁은 산도(産道)를 한사코 통과하여 나온다. 이제 천장을 향해 눕혀 둔 그 아이는 기필코 180도 방향을 바꾸기 위해 뒤집는다. 배밀이를 하고, 익숙해지면 드디어 기기를 시도하고, 기다가 마침내 일어선다. 일어선 그 아이는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며 기어코 걷기 시작한다. 그리고 뛰는 경지의 새로움에 이른다. 이 즈음이면 이제 가르친 적 없는데 질문하기 시작한다. 질문법을 배운 적이 없는 그 아이가 스스로 던져 대는 질문은 크게 세 단계를 거치며 세계와 삶을 알아가고자 작동하는 흐름으로 진행된다."
  • 우선 무엇이냐고 묻는다(what). 스스로 분별하고 싶어 하는 단계이다.
  • 다음에는 왜라고 묻는다(why). 이제 인과가 궁금해지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사춘기 무렵이 되면 대단히 중요한 질적 전환의 단계에 이르는 질문을 (그 아이의 기질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은 퉁명스럽게) 던진다. “왜?, 뭐?” 이 불만을 품은 듯한 질문의 참뜻은 이전에 알고자 했던 단순한 분별과 인과를 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왜 재미도 없는 학교를 가라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렇게 하면 뭐가 달라지는 거냐고?”처럼, 서툴지만 궁극을 알고 싶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 그러니 차라리 이때의 “왜? 뭐?”는 “for what? so what?”에 가까운 질문으로 헤아려야 한다. 드디어 그 인간에게서 철학이 시작된 것이다.
 
사람만이 아니다. 땅에 떨어진 도토리 한 알도 날마다 새로워지려 한다. 그래서 날마다 모험한다. 그렇게 껍질을 벗고 땅을 뚫어 뿌리를 내리고 빛을 향해 잎과 줄기와 가지를 키워낸다. 물고기나 개구리의 알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경로를 통해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모두 모험과 함께 새로워지는 것이다. 모험하는 그 모든 순간에는 크고 작은 아픔과 상실이 함께 놓여 있다. 뜯기고 부러지고 잘리고, 잘못하면 송두리째 잡아먹히고…. 주저하거나 움츠러들거나 흔들리는 순간들이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과 나란히 걷고 있다. 그것이 삶이고 살아있음의 증거다.
 
김 교장은 우리들에게 살아 있는 존재인가, 아니면 죽은 존재인가. 다음과 같이 묻는다.
  • 당신은 새로워지려 하십니까?
  • 그래서 기꺼이 모험하며 사십니까?
  • 삶이 더러 아픕니까? 아픈 것이 마땅하다 여기십니까? 아프지 않으려 하십니까?
  • 당신은 점점 부드러워지고 더욱 따뜻하고 자주 흔들리며 사십니까?
 
아니면 이 모든 방향과 반대로 향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사람들은 웃거나 혹은 진지하게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고 했다. “나는 반대로 향하고 있었네요.” 뒤이어 사람들에게 너무 자책하지 말자고 다독인다. 이제라도 각성하고 살아있는 삶을 향해 살아있는 존재들의 특징을 하나씩 하나씩 삶으로 다시 데려와 보자고 다시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고 했다.
  • 새로워지려 하고,
  • 그래서 기꺼이 모험하고,
  • 아픔이 살아 있는 삶의 특징임을 받아들이고,
  • 더 자주 부드럽게 미소 짓고, 때로 흔들리는 나를 자책 없이 응원하며 살아보자고 제안한다는 거다.
 
나 자신부터 이 4 개의 질문을 노트에 적어 놓고 아침마다 질문하고 답할 생각이다. 끝으로 김용규(여우숲 생명학교 교장의 말을 다시 직접 들어 본다. "이 질문과 다독임은 실은 나 스스로와 우리 자신에게 ‘그대 살아있는가?’ ‘타고난 생명성과 함께, 살아있음의 기쁨을 누리며 살고 있는가?’ ‘살아있음의 기쁨을 향해 살아가자!’라고 던지는 물음이요 다독임이다. 이 물음과 다독임은 대단히 근본적인 것이며 또한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생명성 가득한 존재만이 제 스스로 삶을 감당하고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온전한 삶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도 "사람은 사랑한만큼 산다"이다. 아침 사진도 먼지가 가득한 큰 길가에서 만난 어린 풀꽃이다.
 
 
사람은 사랑한만큼 산다/박용재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저 향기로운 꽃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저 아름다운 목소리의 새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숲을 온통 싱그러움으로 만드는 나무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이글거리는 붉은 태양을 사랑한 만큼 산다
밤하늘의 별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홀로 저문 길을 아스라이 걸어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나그네를 사랑한 만큼 산다
예기치 않은 운명에 몸부림치는 생애를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그 무언가를 사랑한 부피와 넓이와 깊이만큼 산다
그만큼이 인생이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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