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7.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매주 목요일에 읽는 <장자 읽기>를 오늘 오전에 했다. 그리고 동네 전통 시장에 나가 재래식 추어탕을 먹고, 가지, 오이, 토마토, 옥수수 등의 모종을 사가지고 들어 왔다. 오월의 날씨가 여름 같았다. 오늘부터 벌써 <장자> 제5편 "덕충부"를 읽기 시작했다. "덕충부"를 한자로 쓰면 다음과 같다. 德充符. 이걸 말 그대로 하면, "덕이 가득함의 표시"라는 말이다. 여기서 부자는 '符'로, 부호 '부'자이다. "표시", "증거"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니까 "덕충부"란 "덕(德)이 가득해서 저절로 밖으로 드러나는 표시'란 뜻이다.
우리 말에 부절(符節)이라는 말이 있다. 옛날의 사신들이 몸에 지니고 다니던, 돌이나 대나무 같은 것으로 만든 일종의 신분증 같은 것이었다. 사신들이 다니던 '부절'은 온존한 것이 아니라, 반으로 나눈 반쪽이었다. 나머지 반쪽은 임금이 보관하고 있었다. 이 두 개의 반쪽 부절을 딱 맞추어 딱 맞을 경우를 '부합(符合)'이라고 했다. 지금도 일상생활 속에서 사용하고 있다. 예컨대, "개인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부합하다"라고 말한다. '부합'이란 사전적 의미는 "서로 맞춘 부절이 딱 맞드시 두 가지 사물이 서로 꼭 들어맞음'이다. 영어로는 '인덴추어(indenture)'로, "두 통으로 만들어서 서명한 고용 계약서'라는 뜻이고, 이 '부절'을 뜻하는 말이 그리스어로 하면 '쉼볼론(symbolon)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나그네가 한 집에서 오래 머물면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주인과 헤어질 경우, 접시나 은화 같은 것을 반으로 나누어 한 쪽은 자신이 갖고, 나머지 한 쪽은 주인에게 주어 간직하게 하는 풍습이 있었다. 뒷날 주인 혹은 주인의 자손이 나그네 혹은 나그네 자손을 찾을 경우, 조각을 맞추어 보고 은혜 갚음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이 반쪽이 '쉼볼론'이다. 반쪽 "쉼볼론'을 '서로 맞추어 보는 일'은 "쉼발레인'이라는 동사로 불렀다. '상징'을 뜻하는 영어 '심벌(symbol)'이 '쉼발레인'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니까 영어 '심볼'은 '서로 맞추어 보다"라는 뜻이다.
'때진 거울'이라는 뜻을 지닌 '파경(破鏡)'과 비슷한 말이다. 옛날에 죽고 못 사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헤어질 때 한쪽씩 나누어 갖기 위해 거울을 깨뜨린 다음 이를 나누어 신표로 삼았던 모양이다. 나중에 맞추어 보기 위해. 살아 있는 동안, 안 되면 후손들에게 라도 서로 맞추어 보게 하기 위해 거울을 두 쪽으로 가르는 '파경'을 했던 모양이다. 지금은 파경이 '이혼'을 뜻하는 말로 잘 못 쓰이고 있다. 너무 멀리 왔다. 다시 <장자>로 돌아간다.
이 "덕충부' 편에는 육체가 온전하지 않은 사람들을 등장시켜, 그 사람들이 비록 육체적으로 온전하지 않지만, 그 속에 있는 천부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해 진실로 의연하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말했다. 특히 이렇게 자랑스런 삶을 살면서도 그것을 일부러 드러내려 하지 않을 때 저절로 밖으로 드러남을 강조한다. 물론 반드시 글자 그대로 몸이 불구가 되어야만 이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뜻으로 풀 필요는 없다.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닥친 어떤 외부 조건에도 구애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 더욱 아름답게 할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음을 말했다고 보는 것이 좋은 것이다. "덕충부"에 나오는 불구자들은 인간으로 서의 실존적 한계성과 결함을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 모두를 상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불구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우리들의 이야기이고, 이 사람들이 발휘하는 '비보통적' 능력은 모든 인간이 발현할 수 있는 인간 승리의 증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덕을 발휘하는 데에는 장애자나 불구자가 있을 수 없다. 가난하거나, 외부적 조건이 좋지 못해도 덕을 펼치는 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노자의 <도덕경>은 도를 어머니로 표현하는 등 여성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는 뜻에서 현대 "여성 운동가들의 바이블'이라고 한다면, <장자>는 불구자가 도를 실현하고 덕을 발휘하는 데 아무 장애가 없다는 것을 그림처럼 생생하게 실증했다는 점에서 "장애인들의 성서"기 될 수 있다고 <장자>를 풀이한 오강남은 주장했다.
그럼 '덕(德)'란 말은 어떨게 이해해야 하나? 서양에서 말하는 '아레떼(arrete)'가 '덕'이 아닐까?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참 인간이란 (1) 늘 탁월함을 생각하고, (2) 자신과 이웃을 성찰 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여기서 탁월함이라는 말이 탁 와 닿지 않는다. 최진석 교수의 표현처럼, '가장 높은 시선을 지닌다'는 것 같다. '탁월(卓越)하다'는 '남보다 두드러지게 뛰어나다'로 사전은 정의한다. 탁월함을 동양적 사유로 말하면, 덕(德)이 아닐까? 내생각으로, '덕'은 '도(道)가 실제 삶에 구현된 것'이고, 이를 그리스어로는 '아레떼'라고 하는 것 같다. 어쨌든 '각자에게 주어진 잠재력을 최대한도로 발현된 것'을 '아레떼', '탁월함', '덕'이라고 이해하면 될 듯하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 탁월함은 그냥 아무렇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각각에게 해당되는 (1) 짜임새 있는 배열(taxis)-질서 (2) 올바름 (orthotes) (2) 기술(techne)을 통해서 탁월해 진다고 한다. 탁월함에 왜 질서가 필요한가? 질서에서 절제가 나오기 때문이다. 탁월함은 절제에서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아레떼(德덕)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으로, 극단을 피하고 그 중심을 잡는 일이라고 했다. 용기는 만용과 성급함의 중간 어디며, 절제는 낭비와 인색의 가운데이다. 그 가운데를 찾으려는 마음이 중용(中庸)이다. 중용의 존재를 배운 적도 없고, 중용을 자신의 삶에 적용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극단의 유혹에 빠진다. 왜 유혹에 빠지냐 하면, 자신의 보 잘 것 없는 정체성이 보상 받기 위해서는, 자화자찬이 특징인 극단적인 무리에 속해, 자신의 쓸모를 끊임 없이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좌도 없고 우도 없다. 왜냐하면 나에게 우가 상대방에겐 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좌와 우 같은 명칭을 가지고 네 편과 내 편을 가르는 행위는, 열등감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인간들의 속임수일 뿐이다.
오늘은 내 마음을 잘 알려주는 시 한편을 공유한다. 이 시를 소개한 [먼. 산. 바. 라. 기.]님의 덧붙임이 좋다. "누군가 그랬다. '삶에는 정답이 없다. 각자의 해답이 있을 뿐.' 우리는 수많이 겹쳐진 길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서 살아간다. 우리가 하나를 선택할 때 한 길은 활성화되지만 다른 길은 사라진다. 선택이 우리의 온전한 의지의 발현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때는 우연으로 보이고, 다른 때는 운명으로 보인다. 내 앞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있었고, 나는 지금 그중 하나의 길에 서 있다. 길 위에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며 이제는 사라진 다른 길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 시구절이 나를 위로 한다. "주름 깊은 세월을 어루만지며…..."
사는 법/홍관희
살다가
사는 일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길을 멈춰 선 채
달리 사는 법이 있을까 하여
다른 길 위에 마음을 디뎌 보노라면
그 길을 가던 사람들도 더러는
길을 멈춰 선 채
주름 깊은 세월을 어루만지며
내가 지나온 길 위에
마음을 디뎌 보기도 하더라
마음은 그리 하더라
"덕충부"의 시작은 왕태(장자에 나오는 불구자 제1호)라는 인물이 나온다. 형벌로 발 하나가 잘린 그는 물론 가공의 인물이다. 상계라는 사람이 이런 질문을 한다. 왕태가 어찌하여 공자의 본고장인 노나라에서마저 공자와 맞먹을 정도로 명성이 높고, 특별히 말로 가르치지도 않는데 찾아간 사람들이 모두 많이 배웠다고 하는, 불언지교(不言之敎)라는 것이 정말 있는 가란 질문이다. 그리고 그 다음 질문은 몸이 불구이나 마음이 온전하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라틴 속담처럼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라는 것이 정석인데, 이 사람은 오히려 '불건전한 육체에 초건전한 정신'인 셈이니, 이게 어찌 된 것이냐는 문제이다.
공자의 대답은 한마디로 "그는 성인(聖人)"이라는 것이다. 상계가 사람을 외모로 판가름하는 데 반해, 공자는 사람의 속을 본 것이다. 왕태야말로 자기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모두 따라야 할 위대한 성인이라 못박는다. 나는 이 글을 읽다가 사자성어를 하나 개인적으로 만들었다. 성인이 되려면 "용심수종(用心守宗)"헤야 한다. 이 말을 풀이하면, 마음 씀(용심用心)이란, 수종(守宗)하는 것이다. '수종'이란 "命物之化(명물지화) 而守其宗也(이수기종야)"에서 따온 것이다. 성인은 "사물의 변화를 천명에 맡긴 채, 도의 근본을 지키는 것이다" '도의 근본'을 '종(宗)'이라 한다. '으뜸'이란 말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종교(宗敎)을 '으뜸가는 가르침'이라 풀이한다.
공자가 왕태를 성인의 경지에 있는 이유를 열거 한다. 왕태가 용심(마음 씀)을 이렇게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 그는 생사(삶과 죽음)에 초연하다. 우리는 이를 '생사초월'로 읽었다.
- 사물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보아 설령 천지개벽 같은 상황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꿈쩍하지 않는 의연하고 의젓한 사람이다. 우리는 이를 태연자약'으로 읽었다.
- 審乎無假(심호무가) 而不與物遷(이불여물천) 그는 거짓이 없는 경지를 꿰뚫어 보고, 사물의 변화에도 결코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여기서 무가(無假)는 '거짓이 없는 것'으로 완벽한 경지, 궁극 실체의 경지를 뜻한다. 우리는 '불여물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으로 읽었다.
- 변화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우리는 이를 '명물지화(命物之化)'로 읽었다.
오강남은 간디가 말한 진리파지(眞理把持)를 실현한 사람, 궁극적으로 여실(如實), 진여(眞如), 실상(實相), 살재(實在), 타타타(Tathata)를 실현한 사람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이런 사람은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의 입장에서 보아 만물에 경계가 사라지므로,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본문의 표현을 쓰면 "마음을 노닐게 하는", "유심(遊心)"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런 마음이 제1편 소요유의 주제이다. "노닌다"는 것은 "마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발 하나 떨어져 나간 것쯤은 흙덩어리 하나 떨어져 나간 것"으로 밖에 여기지 않는다. 이번 한 주동안은 용심(마음 씀)의 기술을 고민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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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덕이란 무엇인가를 공부하다가, 언젠가 최진석 교수의 글을 읽고 적어 둔 것이다. 최진석 교수는 "창의적 활동, 독립적인 과감성, 지식의 생산 등은 표피적인 답습이나 분석적인 비판으로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사마천은 궁극의 지배력은 재주가 아니라 덕에서 나온다고 말한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이다. 재주가 덕보다 승하게 작용하는, 재승덕(才勝德)은 하급이고, 덕이 재주를 좌우하거나 재주가 덕이 발휘된 결과로 나타나는 덕승재((德勝才)는 상급이라 했다. '재승덕'은 잔머리나 피상적인 잔재주를 부리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갖추어야 할 근본적인 동력은 바로 '덕(德)'이다.
덕은 인간이 인간 수준에서 인간으로 서의 품위를 잃지 않을 수 있는 근거이고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 만드는 내면의 힘이다. 인격의 원천이기도 하다. 재주는 외부를 향하는 원심력이 작동한다. 반면 덕은 자신의 내면을 향하는 집요한 응시로 회복된다. 덕이 작동되는 사람에게는 그 깊이로부터 우러나오는 향기가 발산되고 그 향기가 감화력을 갖게 해준다. 공자도 "덕필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라고 했다. 덕이 작동되는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반드시 그 향기에 감화되어 따르는 사람들이 있게 된다. 덕이 있는 사람은 매력이 있고, 그 매력이 강한 카리스마를 만들어 지배력을 갖게 한다.
덕을 키우려면, 아주 구체적인 일상의 일을 잘 관리하는 힘을 유지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덕의 표현이 된다. 구체적 세계와 그에 대한 접촉 수준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낸다. 예컨대, '주워들은 소문을 여기저기 옮기고 다니는 것'이 덕이 없다는 것이라고 공자는 말한다. 덕을 발휘하는 사람은 넓고 근본적이지만, 재주를 발휘하는 사람은 대개 자신만의 신념이나 지적 체계에 갇혀 좁고 고집스럽다. 좁다란 집단 내에서 형성된 단편적인 명성과 시각에 갇혀 자기를 끌고 가며 원래의 마음을 갖고 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사람에게 덕은 항상 주변으로 밀려난다. 우리는 이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뿐 아니라, 이런 사람들에게 휘둘려서도 안 된다.
인간의 근본적인 동력으로 서의 덕을 가진 사람은 결국 인간으로 서의 품위를 유지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위대한 개인'이다. 그런 사람은 다음과 같다.
- 사회적 책임성을 다른 데서 따지지 않고 먼저 자기 자신에 게서부터 구하는 사람이다.
- 남을 탓하거나 비판하기 전에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는 민감성을 유지한다.
- 거대 이념을 향해 쏜살같이 내달리기보다는 우선 일상을 자기 통제권 안에서 지배한다.
-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 경망스럽지 않고 진중하다.
- 덕을 가진 시민은 지적 민감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믿고 있는 이념을 설파하지 않고 구체적 세계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문제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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