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5.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2021년 5월 12일)

어제는 2주 한 번씩 만나는 함께 책 읽고 인문정신을 실천하자고 만나는 미인모임을 하고 왔다. 미인모임은 미술과 인문학을 합친 말이다. 시작은 양정무 교수의 <미술 이야기>를 같이 읽으며 미술을 통한 인문학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금년에는 문학 작품 하나와 생태, 에너지, 기후 위기에 관한 책을 읽으며 상상과 현실의 균형 맞추기를 하기로 했다.
문학작품은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최문규 옮김)의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택했고, 지구 환경을 위한 책으로는 최원형이 지은 <착한 소비는 없다>이다. 두 번째 책이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지속 가능한 사회는 일상에서 실천하는 작은 수고로움에서 출발합니다. 기후 위기를 이야기하는 지금 이 작은 수고로움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라고 하며, 이런 실천을 하자고 권한다.
- 물건을 사기에 앞서 꼭 필요한 물건인지 적어도 세 번 자신에게 물어보기
- 80여 가지 광물이 들어가는 스마트폰 수리해서 오래오래 사용하기
- 유행을 따르기보다는 나와 우리 미래를 생각하는 못 입기
- 식당에서 먹지 않을 반찬은 미리 치워 달라고 하기
-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쯤은 고기 먹지 않기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를 내신 중앙대 김누리 교수는 우리 사회의 시대착오적인 현상 중의 하나가 소비주의 문화라고 강조했다. 지금 한국처럼 소비주의가 이렇게 전면적으로 아무런 비판 없이 확장되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유럽에는 완전 소비 없는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나도 도전해 볼 생각이다. 어쨌든 최근에 최대한 소비를 하지 않으려 한다. 환경 보호를 위해 소비를 최소화 하려 한다.
소비할 때마다, 우리는 '미래 생명에 대한 책임'을 당연히 가져야한다. 우리의 삶이란 사실 지구에서 잠시 살다가 떠나는 것이고, 지구는 다음 세대인 미래 생명이 살아야 할 터전이므로 소비를 줄이는 것은 최소한의 책임 의식을 보여주는 일이다. 그래서 유럽의 많은 학생들이나 어른들은 소비할 때 죄책감을 느낀다. 코로나-19와 기후 위기를 보면서, 우리도 이젠 지나친 소비주의를 부끄러워 해야 한다. 온통 소비만 강조한다. 소비를 해야 일자리가 생기고, 경제가 발전하고, 잘 사는 나라가 된다는 논리가 우리 사회에 지배적이다. 소비주의와 물질주의 논리가 지배적이다. 생태적 상상력, 환경 윤리 의식을 찾아 보기 어렵다. 야수 자본주의가 판을 친다.
내게 필요한 것은,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스펀지"이다. 이 시를 소개한 김정수 시인의 덧붙임에서 위로를 받는다. "생명은 한꺼번에 자라지 않는다. 서서히 자라고 서서히 죽음을 맞이한다. 혼자 성장한 줄 알지만 물과 햇빛, 정성스러운 손길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시인은 생명이 탄생하는 숭고한 시간에서 “초 단위로 살아”야 하는 삶의 절박과 “가녀린 침묵”을 본다. 나는 마음 둘 곳이 찾는다. 그 곳은 공간일 수도 있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일 수도 있다. 그곳이 유토피아일수도 있다. 오늘 사진은 요거트에 함초 소금과 보리 새싹 분말을 넣은 것이다. 둘 다 공동체에서 건강을 생각하라며 선물하신 거다. 여기가 내 마음 둘 곳이다. 그리고 그곳에 내마음 두고, 이제 나도 세상의 스펀지가 되리라.
스펀지/권지영
얇은 솜 위에 올려 둔 콩이
물을 머금더니 발이 튀어나오고
햇빛 닮은 쉼표 하나 찍어준다
초 단위로 살아서
사방으로 뻗어가려고
가녀린 침묵을 세운다
연두로 물들이는 세상 아래
촉촉한 스펀지가 울고 있다
콩 한 알이 울어야 할 슬픔을
모두 뱉아 내고
거룩한 울음 앞에
우두커니 서서
쉼표로 돋아난 발자국을
꼼지락거린다
오늘도 김기석 목사님의 다음 이야기를 공유한다. 목사님으로부터 함을 얻는다. "유토피아는 ‘없는 장소’라는 뜻이다. 오로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곳이라는 말이다. 조선 시대의 화가 안견이 꿈속에서 거닐었다는 무릉도원이든, 제임스 힐턴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나오는 샹그릴라든, 장자가 꿈꾸었던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든 다 마찬가지다. 그런 장소에 대한 꿈은 아름답지만 슬프다. 그 꿈에 담긴 절실한 소망은 역설적으로 현실의 척박함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진동한동 달리느라 사람들은 자기를 돌아볼 여유를 누리지 못한다. 누리지 못하는 삶은 그늘로 남는다."
욕망이라는 것이 우리 생존의 동력이지만, 욕망의 벌판에서 질주를 거듭하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 자신이 고립돼 있음을 자각할 때가 온다. 욕망은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개별 화하기 때문이다. 특히 구별 짓기의 욕망에 사로잡히는 순간 타자를 위한 여백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욕망의 재배치가 필요하다.
우리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그 기준은 욕망과 행동이다. 쉽게 말하면, 나란 누구인가를 알려면. 나의 욕망과 행동을 살펴보면 된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싶으면 욕망과 행동을 바꾸면 된다. 그런데 왜 안 할까?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인식과 사유라는 정신활동을 하지 않으면 행동의 패턴이 절대 안 변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가장 일차적으로 욕망의 지배를 받는다. 이때 욕망은 충동에 가깝다. 삶을 능동적으로 추동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쾌락을 증식하는 쪽으로 수동적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엇이든 내 것으로 소유하고, 거기에서 오는 쾌락을 만끽하고, 그게 뜻대로 안 되면 화를 내는 식의 패턴을 갖는다. 그리고 그러한 패턴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그게 어리석음이, 불교 용어로 말하면, 무명(無明)이다. 본성을 완전히 가리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태양이나 산과 들로부터 공짜로 얻는 게 많다. 그러니 우리는 늘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속에서는 돈이 돈을 낳는다는 사실만 믿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졌다. 오로지 박탈감만 느낄 뿐이다. 그래 현대 인들은 벌어도 벌어도 불안해 한다. 그들은 스펙이나 재산하고 등가가 되어 버렸다. 나란 존재가 화폐로 환원되니까, 자존감이 떨어진다. 그래 도박이나 성에 중독되거나 다른 이들 한테 갑 질을 한다. 그리고 소유와 쾌락을 중심으로 욕망을 추구하다 보니 늘 불만족이다.
이 사슬을 끊으려면 욕망과 행동의 동선(動線)을 다시 그려 보아야 한다. 재배치가 필요하다. 고립과 단절이 아니라, 대칭성을 회복하는 방식으로 동선을 재배치해야 한다. 등가교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욕망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소유와 증식을 향해 나아갈 때, 그리고 쾌락의 무한질주를 하기 시작할 때가 문제이다. 게다가 자본주의가 더 부추긴다. 그러니 그 구조와 사슬을 철저하게 성찰하고 그런 욕망의 궤도를 자아라고 생각하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소유와 쾌락은 생명의 본성과는 거리가 멀다. 거기서는 창조가 아니라, 쾌락 혹은 퇴행이 일어난다. 그러니까 행동의 동선을 다시 그려야 한다. 그러려면 욕망도 재구성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고립과 고독은 삶을 무겁게 만든다는 점이다. 영혼의 회복력을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언제라도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 마음 둘 곳이 있어야 한다. 공간으로서의 장소이든 사람들이 맺는 관계이든 상관없다. 미셸 푸코는 현실화된 유토피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헤테로토피아가 그것이다. 그곳은 어떤 권력 관계도 작동하지 않는 세계다. 여기가 새롭게 꿈꾸는 '메타버스'일까? 위에서 아래로 계열화된 질서가 아니라, 마치 잔뿌리들이 한데 어울린 평등한 생태계이다. 사람들을 가르던 온갖 장벽이 무너지고, 낯선 이들이 우애를 나누며 일체를 경험할 때 삶은 가벼워진다고 믿는다.
공동체가 바로 그런 곳이어야 한다. 모든 구성원들이 평등하게 연결돼 생명과 평화의 생태계를 이루는 곳 말이다. 현실이 지옥처럼 느껴진다고 투덜거리기만 할 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 작은 천국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고립을 넘어 연대하려는 용기 아닐까? 용기를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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