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머뭇거림 VS 서슴없음

1624.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2021년 5월 11일)

 

마음 곳을 찾아야 한다. 코로나-19 사람 만나는 일이 어려워지다 보니, 더더욱 마음 장소가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마음은 점점 굳어지고, 동시에 타인을 맞아들일 여백도 줄어든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외로움이 안개처럼 피어 올라 확고하게 우리를 사로잡는다. 다른 이들과 우리를 이어주던 결속감이 느슨해 지면서, 어디에도 마음 둘 곳 없다는 적막함이 스멀스멀 깃든다. 그래 허전함과 적막함을 떨쳐보려 이것저것 손을 대보지만 영혼의 움푹 팬 자리는 좀처럼 메워지지 않는다. 문제는 그럴수록 숙성되지 않은 욕망은 더 집요하게 우리 옷자락을 잡아 끈다는 점이다. 악순환이다. 그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어서 마음 곳을 찾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 모두는 각자의 슬픔을 가지고 있다. 타인의 슬픔에 대한 가장 좋은 위로는 나의 슬픔이 너의 슬픔 못지않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의 어려운 처지를 나의 어려운 처지처럼 느껴보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어쩔 수 없는 어둠과 이길 수 없는 슬픔을 갖고 있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거울을 보며 얼굴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지만, 마음의 얼룩은 걷어내지 못한다. 그래 우리는 연민으로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치심(治心),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오늘 아침 시는 김종삼 시인의 것을 택했다.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다른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와 자신의마음을 곳을 만들어 놓기로 했다. 아침에 친구의 담벼락에서 시를 만나, 다시 읽으면서 다짐한다.

 

 

장편2/김종삼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상(均一床) 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2017 11 27 이진성 헌법재판관이 취임식에서 낭송해 화제가 시이다. 장편이란 200 원고지 15 정도의 짧은 분량에 따른 소설의 갈래 이름이다. 장자가 손바닥 () 이다. 우리가 흔히 꽁트 혹은 엽편(葉篇)이라 부르는 것이다. 손바닥 만큼 짧은 문학작품이다. 다른 말로 하면 소품(小品), 혹은 작은 풍경이다. 시는 짧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

 

시가 말하는 것은 남녀노소와 빈부귀천 따지지 않고, 우리 모두는 평등하다. 이진성 헌법재판관은 판결에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다고 했다. 헌법에 입각하여 모든 사건은 판단되어야 한다. 보수라서 혹은 진보라서 그에 치우친 판결이 있을 없다는 말이다.  행여 혈연, 지연, 학연 혹은 외의 친소 관계로 섣불리 상대를 판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시인과 재판관이 꿈꾸는 세상은 우리 모두가 앞에 차별 받지 않는 사회였을 것이다.

 

시를 읽으면서, 가지 그림이 그려진다.

  • 밥집이 조선총독부보다 위세가 느껴진다.
  • 소녀는 태연하였다. 영감의 인색한 태도와 소녀의 태연하고 당당한 태도가 대비된다. 가난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 서의 도리를 다하고 사는 소녀의 고귀한 품격을 보여주고 싶은 시인의 간절한 마음이 엿보여 훈훈하다.
  • 소녀의 손에 주목해 본다. 구걸할 그녀는 손을 오므리고 있었을 거다. 그녀가 이번에는 손을 편다. 친구는 담벼락에서 "오므린 것들은 착하다" 문장을 소환했다.

어제 나는 우리가 사랑 가운데 서로를 대하기 위해 필요한 태도가 머뭇거림이라는 시몬느 베이유의 말을 인용했다.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머뭇거림은 답답함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머뭇거림 속에는 함부로 말하거나 판단하거나, 응대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이 담겨 있다. 지나칠 정도로 단정적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 자기도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다. 확신은 고단한 생을 지탱해주는 든든한 기둥이지만, 그 확신이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폐쇄성에 갇힐 때는 아집에 불과할 있다.

 

오늘 아침 다시 노자의 <도덕경> 45장을 불러낸다. 노자는 다음  5 가지 '고졸(古拙)의 멋' 세계, 즉 결(), (), (), (), () 모습을 보여준다. 노자는  그게 5가지 도()의 세계라고 했다. 나는 이게 '머뭇거림' 세계라 본다.

  • 대성(大成)의 세계가 아닌 결()의 세계: 대성약결(大成若缺) - 'Big ME'대신 'Little ME' 세계,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모자란 듯하다' 것을 알고, 조금 모자란 세계를 말한다.
  • 대영(大盈)의 세계가 아닌 충()의 세계: 대영약충(大盈若沖) - 가득함대신 비움으로, '완전히 가득 것은 듯하다' 것을 알고, 뭔가 조금 듯한 세계를 말한다. 채우려 하지 않는 세계 말이다.
  • 대직(大直)의 세계가 아닌 굴()의 세계: 대직약굴(大直若窟) - 직진, 바른 길에서 곡선, 구부러진 길의 , '완전히 곧은 것은 굽은 듯하다' 것을 알고, 뭔가 반듯하지 못한 세계를 말한다.
  • 대교(大巧)의 세계가 아닌 졸()의 세계: 대교약졸(大巧若拙) - 화려와 정교함에서 질박과 서투름으로, '완전한 솜씨는 서툴게 보인다' 것을 알고, 뭔가 어설프고 서툴게 보이는 세계를 말한다.
  • 대변(大辯)의 세계가 아닌 눌()의 세계: 대변약눌(大辯若訥) - 웅변에서 눌변으로, 완전한 웅변은 눌변으로 보인다' 것을 알고, 뭔가 말도 제대로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같이 보이는 세계를 말한다.

 

<도덕경> 45장을 내 나름대로 번역하면 이렇다. "다 완성된 것도 빈틈이 있어야 그걸 쓰는 데 불편함이 없고, 가득 채웠더라도 빈 곳이 있어야 언제라도 쓸 수 있다. 구불구불한 길이 바른 길이며, 질박하고 서툴러 보인 것이 화려하고 정교한 것이며, 어눌한 눌변이 곤 완벽한 말 솜씨인 것이다."

 

몇일 전부터 나는 "'서슴없이' VS '머뭇거림'" 대해 묵상하고 있다.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는 "사람을 특별하게 만드는 " '머뭇거림'이라 했다. "'머뭇거림' 겸허함의 자세로 지금 우리 시대에 필요한 태도" 강조하기도 했다. 오늘 아침 시처럼, 사람을 외모로 사람의 마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사람의 마음은 우리가 쉽게 없다.

 

김기석 목사는 2017 노벨 문학상을 가즈오 이시구로(일본에서 태어난 영국 소설가) 최근 , <클라라와 태양> 소개하였다. 나는 그의 소설 <남아 있는 나날> 읽었던 기억이 난다. 최근 작품을 오늘 주문할 생각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최근 소설 <클라라와 태양>에서 클라라는 인공지능이다. 가즈오가 작품을 통해 묻는 것은 "인간을 인간 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한다. 읽고 여러 가지를 공유해볼 생각이다.

 

사람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 마음 곳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AI 로봇 클라라를 친구로 조시의 아버지가 AF(아티피셜 프렌드의 약자) 클라라에게 묻는다. "너는 인간의 마음이란 믿니?" 그러자 클라라는 다소 혼돈을 느꼈다고 한다. 조시의 아버지 폴은 인간의 마음이란 '사람을 특별하고 개별적인 존재로 만드는 '이라 정의했다고 한다. 사실 우리는 누군가의 습관이나 특징, 말투나 행동거지를 아는 것만으로 그를 이해했다고 말할 없다.

 

김기석 목사님은 "마음은 방이 많은 집과 같아서 방들을 하나하나 열고 들어가 방의 정보를 조합하면 있는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말했다. " 속에 다른 방이 있고,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른 방이 앞에 드러나기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미로와 같다" 말하였다. 마음도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겠는가?

 

우리는 흙에서 흙으로 되돌아간다. 우리는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 세상에 왔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떠나야 한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걸린 외줄 위를 위태롭게 걸어가는 것이 인생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미국 시카고 미술관에 걸려 있는 고갱의 그림 제목이지만 우리 모두의 질문이기도 하다. 흙에 불안을 더하면 인생이고, 인생에서 불안을 빼면 흙이다. 불안은 떨쳐버릴 수 없는 숙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숙명을 안고 살면서 지향을 잃지 않을 때 삶은 의젓해 진다. 지향이 중요하다. 지향이 내가 마음 곳이다. 오늘 아침 글은 김기석 목사님의 글을 읽고 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오랜만에 글을 따뜻하게 그리고   쓰시는 목사님을 만났다. 존경한다. 그리고 사유의 방향이 훌륭하시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블로그 https://pakhanpyo.blogspot.com 누르시면 된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삶은 특권이자 모험이다. ‘이런 들 어떠하리 저런 들 어떠하리’ 하며 바람 부는 대로 나부끼는 것도 인생이고, 지향을 분명히 하고 올곧게 걷는 지사적 실존도 인생이다. 어느 것이 더 낫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각자 내적 이끌림에 따라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제멋대로 살 수 없는 것은, 삶은 관계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타인은 기쁨의 샘일 때도 있지만 우리 삶을 제한하는 질곡일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타인을 조종하려는 충동이 우리 자신 속에서 스멀스멀 자리 잡을 때가 있다. 자기 의사를 타인에게 부과해 그가 내 뜻을 수행하는 것을 볼 때 만족을 느끼 때문이다. 그걸 우리는 권력에의 의지라 한다. 그 권력에의 의지는 분수를 모르기에 언제나 한계를 넘는다. 성경은 이러한 과도함 혹은 오만함이 죄라 말한다. 죄는 남을 해칠 뿐 아니라 자기도 파괴한다. 여기서 서슴없음과 당당함은 자신을 강자로 여기는 이들의 한결같은 태도이다. 이기심과 결합되면 몰염치함으로 변질된다. 몰염치는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다시 다짐한다. 머뭇거리며, 주저하는 삶을 살고 싶다. '머뭇거림'은 다음을 내포한다.

  •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지 않으려는 겸허함,
  • 함부로 속단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
  •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것조차 수용하려는 열린 마음.

 

모든 틈은 깨진 상처인 동시에 빛이 스며드는 통로인 것처럼, 머뭇거림은 우유부단 함처럼 보이지만 나와 타자가 함께 숨 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머뭇거림이 사람을 자기 초월의 방향으로 인도한다. 세상의 어떤 이론도 지혜도 인간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이해에 가까워질 수는 있겠지만 근사치일 뿐이다. ‘알 수 없음'이야말로 생명의 실상이다. 그러니 온기가 담기지 않은 말을 내려놓고 혐오감을 드러내는 일을 삼가고, 다른 이들을 위해 좋은 것들을 남겨둘 줄만 알아도 삶이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