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간다. 그래서 나는 춤을 좋아한다.
<미움받을 용기>에서 읽은 것으로 기억된다. "인생이란 찰나의 연속이다." 이와 비슷한 문장으로 "삶은 순간들의 합이다"도 나는 좋아한다.
인생이란 선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점이 연속되는 것이라고 본다. 선처럼 보이는 삶도 점의 연속, 즉 순간(찰나)의 연속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거기서 행복해야 한다.
길위에 있는 인생이 아니라, 항상 '지금 여기'를 사는 인생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걷고 달리지만 말고, 춤을 추듯 살아야 한다.
키네시스(Kinesis)적 인생(목적지에 도달하려는 인생)이 아니라, 에네르게이아(Energeia)적 인생(지금 하고 있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상태)을 살아야 한다.
키네시스라는 말은 '일반적인 운동'을 말한다. 시작과 끝이 있는 하지만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그 여정은 불안하다. 에르네기아는 지금 하고 있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상태가 된 운동을 말한다. 과정자체를 결과로 보는 운동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지금 여기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진지하고 빈틈없이 해나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인생을 평가할 때도 어디에 도달했는가만 보지 말고, 어떻게 살았는지 그 찰나를 보도록 한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킴벌리 커버거, <지금 알고 있던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우리는 지금 어디쯤 있는 거지? 그냥 흘러가는 대로 가보자."
과정이 중요할 뿐이다. 사는 것이 어떤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다. 사는 것은 매 순간의 합이다. 그런 그냥 흘러가는 대로 가보며, 순간을 최선을 다해 즐기며 사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너무 따지지 말고 그냥 이렇게 하면 된다. "난 항상 널 사랑할 거야." <라라랜드>을 보고 들은 생각이다
세상의 모든 연애는 타오르는 불꽃과 서로에 싫증이 나는 권태가 반복된다. 사랑은 정신적 교감일 수도 있고, 육체적인 결합일 수도 있다. 후자인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과정은 "욕망-절정-결핍"의 반복이다. 불꽃과 같다. 뜨겁게 타오르는 욕망만큼이나 화려한 불꽃의 발화, 하늘을 수놓은 절정, 이내 사그라드는 죽음. 그러나 사랑은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하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란 연인들은 서로를 이해하는 인내가 필요하고, 서로의 보조를 맞추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잘 안다. 그래도 마음이 가는 사람과 사랑을 해야 한다.
불은 적극적인 욕망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사로잡힌 대상을 태워 무화시키는 이율배반적이다. 술이 그렇다. 술을 마시면 본능에 보다 더 충실하다. 그러나 도가 지나치면 파멸로 간다. 다 불타버리듯이 파괴된다. 그러나 우리의 '불놀이'는 찰나적이다. 술마시는 일도 찰나적이다. 절정의 순간이 짧다. 절정의 완성된 시간이 곧바로 소멸로 흩어진다. 그래서 절정은 죽음이다. 우리의 삶이 그렇지 않은가? 삶도 지금 이 순간 여기서 느끼는 절정감이 행복이다. 이 행복을 오지 않을수도 있을 미래를 위해 담보하거나 미루는 것은 욕망을 잠재우고 그 찰나의 순간을 빼앗기는 것이다. 그러한 순간이 일상 속에서 오지 않으니까 우리는 술을 마신다. 네 일상에 불을 지르는 것이다. 그래서 술을 마시는 일은 불놀이와 같다.
불꽃은 터지면 이내 사그라진다. 사랑도 그렇다. 술마시기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랑은 서로의 뜨거워진 육체만큼 이별을 맞은 뒤 차갑게 식어버린다. 술마시기도 술이 깨면 그 뜨겁게 했던 술의 양만큼 몸을 힘들게 한다. 그래서 사랑과 불꽃 그리고 술마시기는 "순간의 미학"이다. 그리고 그 순간의 황홀경, 오르가즘에는 '죽음'과 '결핍'이 숨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을 끊임없이 찾아 헤맨다. 언젠가 죽고 말 불꽃인 것을 알면서도. 그런 의미에서, 술을 못마시거나 안 마시는 것은 그 죽음과 부활이 주는 순간의 오르가즘, 황홀경을 모른다. 헤어지는 것이 무섭다고 사랑을 거부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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