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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참나'를 찾는 여행

'관포지교'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따뜻하다. 산다는 것은 이런 우정을 가지고 서로 믿으며 도와주는 것이다. 거기서 새로운 문명이 나온다. '위대한 개인'이 탄생한다. 거기에 중국의 설계자 관중이 있었다.

중국은 기원전 8세기에 천하의 패권국가였던 주나라가 쇠퇴하면서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된다. 황제의 식음(食邑, 봉건제에서 왕이 제후들에게 내려준 봉토)을 받아 각 지역을 다스렸던 영주들이 이제는 스스로 왕을 자처하기 시작한 것이다.

관포지교의 이야기는 지금의 산둥반도에 위치한 제나라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이야기는 중국 춘추 시대의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의 사귐이 매우 친밀하였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아주 친한 친구 사이의 다정한 교제를 일컬으며, 목슴을 걸 만큼 깊은 우정을 뜻한다. 관중은 이런 유명한 말을 한다. “나를 낳은 이는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아이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淑兒也)”

당시 제나라에서는 폭군 양공이 죽자 왕위 계승을 놓고 규와 그의 동생 소백이 왕위 쟁탈전을 벌인다. 당시 규의 참모였던 관중은 그의 명령으로 소백을 암살하려고 했다. 그러나 관중이 쏜 화살이 허리띠에 맞은 소백은 극적으로 살아난다. 이 일로 전세를 역전시킨 소백은 왕이 되고 규는 자결한다. 그리고 왕을 살해하려 했던 관중은 죽을 위기에 처한다. 그 때 소백의 한 참모가 이렇게 진언을 한다. "전하께서 제나라에 만족한다면 신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천하의 패자가 되고 싶다면 관중 외에는 인물이 없습니다. 부디 관중을 등용하십시오."

소백은 관중을 거두어 자기 사람으로 만든다. 이후 관중은 재상이 됐고, 제나라는 춘추전국시대의 첫 패권을 쥔 나라가 된다. 그 소백이 제나라의 명군주 환공(BC 685-643)이다. 그 때 관중을 소백에게 천거한 그 참모가 관중의 오랜 친구였던 포숙아이다.

우리는 목숨을 건 우정을 빗대 '관포지교'라 부르는 것이다. 얼마나 멋진 우정인가! 관증은 포숙아를 이렇게 말한 것으로 알려진다. “젊은 시절 함께 장사를 하면서 나는 내 몫을 더 많이 챙겼지만 포숙아는 날 욕심쟁이라 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한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세 번이나 패하고 도망쳤지만 그는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내게 노모가 계신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은 이는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아이다.”

관중은 ‘중국의 설계자’라고 한다.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직업을 세분화 해 효율성을 높이려고 관중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적성과 소질을 키워 본인의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관중은 재상이 되어 조세개혁을 통해 세금을 줄여주고, 중상주의 정책으로 백성들을 잘 살게 해주고, 농사에서는 철제 농기구가 확산되며 생산력이 급증하게 하였다.

세금을 줄여준 정책: 정전(井田, 토지를 9등분으로 나눠 8가구가 한 등분씩 소유하고, 가운데 필지는 공동 경작해 수확물을 국가에 바치는 방식) 제도로 백성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토지 이용률을 높이는 한 편 세금을 줄였다.

관중이 상인 출신이라 바다에 인접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중상주의 정책을 펼쳤다.

우경(牛耕, 소를 농사에 이용하는 것)이 시작되었다. 석기나 청동기로는 불가능했던 농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생산력이 급증하자, 관중은 철의 사용량을 늘리며 기술혁신을 주도했다.

나도 이런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 부럽다. '도광양회'하고 있으면 그럴 날이 올까? '도광양회(韜光養晦)'는 '어두운 곳에서 칼을 갈고 있으면 언젠가 빛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즉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빛을  못보면 어떤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되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