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11월 5일)

비상사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정신이 아니라 몸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몸이 정신보다 훨씬 신속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의 것들이 무너져 내리면 지각은 사라지고 몸이 반응한다. 긴급한 상황에서 몸은 모든 가능한 사태에 대비한다. 먼저, 위험 상황을 지각하고 신체가 뻣뻣하게 얼어붙는다. 그리고 반사 반응이 서서히 감정으로 나타난다. 감정은 지각의 다음 단계이다.
비상사태에서 신체는 에너지 소모가 큰 대기 상태를 유지한다. 호르몬 코르타솔과 아들레날린이 분비되어 삼장이 빨리 뛰고 호흡도 가빠진다. 코르타솔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신경계를 흥분 시켜 혈압을 올리고 호흡을 가쁘게 하며 혈당을 높이고 면역 기능 떨어뜨린다. 아드레날린은 위기 상황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뇌과 근육에 산소와 포도당 공급을 늘리고 심장 박동을 강화하며 동공을 확장하여 신체 능력을 일시적으로 향상시킨다. 최선의 상황을 기대하며 최악의 상황을 준비한다. 이 과정은 혼돈이 질서로, 즉 가능성이 현실로 바꾸기 전에 거쳐야 할 자각 과정이다.
살아 있는 것들은 관심을 받지 못하면 죽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삶은 인위적인 노력이 더해져야 유지된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명료하고 분명하게 표현하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확연히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을 안개속에 감추면 문제가 생긴다. 삶이 정체되고 혼탁해 지는데도 막연하고 모호한 태도를 고집하는 이유는 두려운 진실을 받아들일 용기가 부족할 때 숨을 곳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면, 그 현실을 지배하고 장악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를 규정한다는 것은 문제의 존재를 인장한다는 뜻이다. 아프다고 고통을 회피하면 끝없이 지속되는 절망과 막연한 실패에서 비롯된 만성적인 통증에 시달리며 소중한 시간을 흘려 보내게 될 뿐이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혼돈이 얼굴을 드러낼 때, 우리는 말을 통해 혼돈을 바로잡고 질서를 다시 찾을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어떤 것이든 분류하고 정돈해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렇 게나 불분명하게 말하면, 어떤 것도 모호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목표도 명확하게 표현되지 않아서 불분명하다. 불확실성의 안개가 걷히지 않는 한 세상을 헤쳐 나가기 위한 협상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최고 수준의 삶에 이르면, 영혼과 세계는 언어를 통해 체계화되고, 언어를 통해 연결된다. 명확히 이해되지 않는 끔찍한 혼돈으로 붕괴된 상태에서도 새롭고 긍정적인 질서의 가능성은 존재한다. 그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명료한 생각과 용기 있는 결단이 필요하다. 문제에서 탈출하려면 먼저 문제 자체를 인정해야 한다. 문제를 빨리 인정할수록 문제에서 탈출할 수 있는 시간이 빨라진다.
우리는 복잡하게 뒤얽힌 혼돈을 분석하고, 우리 자신을 포함해 모든 것의 특성을 정확하게 규정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며, 세계를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한다. 여기서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 정확한 표현은 정밀한 구분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실제로 일어난 끔찍한 사건과 일어날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모든 가능한 사건을 구분할 수 있다.
적절한 단어를 찾아내고, 그 단어들로 올바른 문장을 만들고, 그 문장으로 올바른 단락을 구성해야 한다. 과거는 정확한 언어로 핵심을 포착했을 때 온전하게 되살아난다. 눈앞의 현실을 명료하게 서술해야 현재가 미래를 방해하지 않는다. 현재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방치하면 미래가 혼탁하고 불쾌한 모습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정확한 언어로 말해야 한다. 그러면 혼돈에서 질서로 나아갈 수 있다. 용기 있게 진실을 말할 때 현실은 단순해지고 깨끗해지며 명확히 규정되어 삶이 편안해 진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정확한 언어로 표현하면 복잡하게 서로 연결된 전체에서 떨어져 나와 쉽게 지각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변한다. 이런 식으로 주변을 단순화하면 모든 것이 명확하고 유용한 것으로 변한다. 그러면 복잡성으로 인해 생기는 불안이나 불확실성에 압도되지 않고, 주변의 것들을 활용하며 살아갈 수 있다. 반면에 모든 것이 서로 혼란스럽게 되 섞이면 세상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 진다.
대화할 때도 주제를 의식적으로 명료하게 규정해야 한다. 특히 까다로운 문제를 두고 대화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렇지 않으면 대화의 주제가 '모든 것'이 된다. 이런 무분별한 대화는 바람직하지 않다. 과거에 일어난 문제, 지금 존재하는 문제, 훗날 닥칠 수 있는 문제 등 여러 문제가 주제로 오르면, 대화가 말다툼으로 변한다. 생산적인 대화를 하려면 다음과 같이 해야 한다. '나를 불행하게 하는 건 정확히 ...이다. 따라서 대안으로 내가 원하는 것은 정확히 ...이다. 당신이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정확히 ...이다. 이렇게 한다면 당신과 내가 더는 불행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려면 먼저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정확히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정확히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정리한 내용을 솔직히 털어놓음으로써 혼돈에서 질서의 세계를 끌어내야 한다. 그러니까 불행과 혼돈에서 벗어나려면 정확하고 정직하게 말해야 한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 칼릴 지브란의 시를 공유한다. 결혼 관계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모든 관계도 서로 진실된 관심을 주고, 서로의 공간을 지켜주며 상대를 진실로 걱정하고, 자기만의 생각을 고집하지 않고, 상대방을 바꾸려 하지 않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치 같은 음악이 울릴지라도 기타줄이 따로 있듯이 말이다.
결혼에 대하여/칼릴 지브란
그대들은 함께 태어났으니
영원히 함께 하리라
죽음의 흰 날개가 그대들의 삶을 흩어 놓을 때에도
그대들은 함께 하리라
아니, 신의 고요한 기억 속에서까지도 함께 하리라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리하여 하늘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그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그대들 영혼과 영혼의 두 기슭 사이에서
출렁이는 바다가 되게 하라
서로의 잔을 채워주되 하나의 잔으로
함께 마시지는 말라
서로에게 저희 빵을 주되 같은 조각으로 먹지는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그대들 각자는 따로 있게 하라
비록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서로의 마음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마음 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생명의 손길만이 그대들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으니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 있는 것처럼
참나무와 편백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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