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3.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2년 11월 2일)

오늘은 <이태원 참사>의 슬픔을 참고, 몇일 전에 다짐했던, <나를 깨우는 하루 한 문장 50일 고전 읽기>라는 부제의 <<어른의 새벽>> 읽기 3회를 우선 한다. 오늘의 주제는 "저녁을 내려놓으면 하루가 달라진다"는 거다. 이 문장을 읽고, 나는 내 만트라 "내일은 없다. 오늘이 좋습니다"를 기억했다. 이 만트라를 소환하면, 지치고 무기력하며 화가 나가도, 불현듯 내가 '오늘만 산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막 일어난 감정과 생각이 바뀌며 편안해 진다. 어떻게 생각과 감정을 바꾸는가? 내일이 없으니 오늘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을 다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때 나를 옭아매던 어떤 한계에 갇힐 이유가 없다는 생각과 감정을 다시 갖게 되고, 오히려 일상의 습관을 놓치지 않게 된다. 그냥 게으름 피우고 싶은 마음까지 각성하게 하게 한다. 그리고 또 재미난 것은 어떤 상대가 나를 괴롭히면 내일은 내가 없을 테니 그가 원하는 대로 다 받아주어도 된다고 감정을 바꾼다.
생각 있는 사람의 삶은 오늘만 산다. 그리고 지금-여기에서만 산다. 이 사실을 소환하는 수준에 따라 그 강렬함의 차이가 있다. 어떤 이는 수동적으로 연기론에 따른 인연을 따르지만, 어떤 이는 적극적으로 인연을 창조하는 힘을 쓰기도 한다. 이렇듯 한 생각을 바꾸면 이런 변화가 가능해진다. 누구나 그럴 수 있다. 다만 깨달은 사람은 습관이 생겨서 아무런 망설임이나 혼돈 없이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런 변화가 이루어진다는 차이가 있다. 애써 마음의 에너지를 짜서 사용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다음 세 가지이다. 즉 지혜, 아니 나란 누구인 가를 깨닫고, 이어서 절제, 용기를 갖는 것이다. 이게 삶을 '잘 살 줄 아는 방법인 것 같다. 내 마음 속에, '내가 만든' 이런 원칙들이 자리 잡을 때,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런 절제로 내가 나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더 배워서, 자신의 존재 그 자체를 즐기고 기뻐하며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이게 내 삶의 철학이다.
그런데 나에게 부족한 것이 절제이다. 위에서 말한 책의 저자 우승희는 <<사기>> 한 구절을 소개한다. "술이 극도에 이르면 어지럽고, 즐거움이 극도에 이르면 슬퍼진다." 사물도 지나치면 안 된다. 지나치면 반드시 쇠한다. 나는 <<주역>>이 주장하는 "극즉반(極即反)"이라는 말을 믿는다. '세상에 모든 것은 극점에 이르면 반드시 돌아간다.' 그리고 <<주역>>의 <건(乾)괘>에는 "항용유희(亢龍有悔)"라는 말이 있다. '너무 높이 올라간 용이나 후회가 있다"는 뜻이다. 가득 찬 것은 다시 비워져야 하고, 높은 곳에 오르면 내리막 뿐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끝을 모르고 치닫는 것은 위험하다. 극도에 이르기 전에 적당함을 유지하는 것, 즉 "중(中)"에서 머무르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장자는 "산림이나 들판에서 노닐면 아름다운 경치는 우리를 매우 즐겁게 만들어주지만 그 즐거움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슬픔이 뒤따른다"라고 했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경치가 슬픔을 가져다 주는 것처럼, 즐거움이 넘치는 시간 역시 채 끝나기도 전에 허무와 슬픔을 남긴다. 또한 그 감정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어김 없이 또 다른 즐거움을 찾는다. 그래서 우리들의 저녁은 극단의 기쁨과 슬픔이 반복되는 시간이 된다. 저자가 내 놓는 해결책은 순간적인 쾌락의 감정이 아니라, 좋다고 여겨지는 삶의 모습을 찾는 거다. "극도의 기쁨과 슬픔으로 부터 아침은 우리를 보호한다. 저녁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일상의 충실함으로 부터 멀어지는 일은 없다:는 거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래 저녁을 지나치게 즐길 필요는 없다는 거다.
저녁 시간이 늘어날수록 다음 날은 그만큼 사라진다. 장자는 "하루하루를 떼어버리면 일 년이란 있을 수도 없고, 안이 없으면 밖이 없다"고 했다. 즐거운 시가이 자꾸 늘어나고 자꾸 쌓이다 보면 온전히 보낼 수 있는 하루는 점점 더 줄어든다. 그러다 보면 단 하를 잃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일게 된다. 반대로 저녁을 정리하는 시간으로만 삼으면 즉각적인 즐거움 멀어진다. 그러나 그 다음 하루를 온전하게 보낼 수 있고, 그 하루가 쌓이면 결국 삶 전체를 다시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저녁을 즐기는 것을 포기하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저자는 "나라는 사람이 중심에 없는 즐거움 보다는, 나의 결정에 의한 절제가 오히려 더 큰 위안과 기쁨을 준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하며 저녁의 즐거움을 포기하자, 아침이 온전하게 주어졌다고 한다.
공자는 "활 쏘기는 군자와 비슷한 것이니. 정곡을 잃으면 돌이켜서 그 자신에게 구한다"고 했다. 삶의 중심을 잃고 나를 바로 세우지 못한다면 돌이켜서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몇 년 전에 기록해 둔 배철현 교수의 말이다. "나의 하루를 빛나게 만드는 첫 단추는 ‘마음의 과녁’을 정하는 수고다"라며, 그는 "인간의 바깥 모습은 자신의 안 모습의 정확한 표현이며 균형"이라 했다.
‘안’의 정돈과 절제가 없는 ‘바깥’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가식이며 사치다. '안'의 수련은 바깥의 개성으로 조화롭게 드러난다. 그 사람을 그 사람답게, 아름답게, 독창적으로 만드는 개성個性은 내적일 수밖에 없다. 개성은 눈에 드러나지 않으며, 잠복(潛伏)한다. 말과 행동은 개성을 조금씩 보여주는 통로다. '안'이 없는 바깥은 없다. 개성이 없이 겉모습에 집착하는 사람은 구차스럽다. 바깥은 '안'이 힘을 통해 확장된 것이다. 바깥은 '안'이라는 침묵 훈련을 거치지 않으며 변명에 불과하다. 그 '안'은 그 사람의 스타일이다.
오늘 읽고 있는 책의 저자 우승희는, 그런 차원에서, 중심을 지키고, 매일매일 하루를 되찾는 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즐거운 것과 좋은 것의 차이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 그녀는 "극에 치닫는 즐거움은 좋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큰 슬픔을 가져올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저녁을 놓고 아침을 되찾자, 저자는 일상의 삶이 변화했다 한다. 우선 매일 하기로 한 것을 하루도 놓치지 않고 할 수 있게 되었다 한다. 즐거움으로 흘려 보냈던 찰나의 순간이 나의 의지로 붙잡을 수 있는 시간들로 채워졌다 한다. 저녁의 의식적인 절제를 통해 하루 전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거다. 그것은 삶의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휘발성을 가진 즐거움을 포기하고자 하는 노력인 것이다. 위에서 말한 '균형'을 위해.
저녁 이야기를 좀 더 해 본다. <창세기> 제1장 5절을 보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가 나온다. 아침이 먼저가 아니고, 저녁이 먼저이다. 저녁은 아침의 어머니이며, 아침은 저녁이 선물해준 소중한 시간이다. 저녁이 없다면 아침은 없다. 혼돈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질서가 나오는 이치이다. 다시 말하면 어머니인 저녁이 있어, 아침이 있는 것이다. <창세기>는 "저녁이 됐다. 그리고 아침이 됐다. 첫째 날"같은 정형화된 문구로 이루어져 있다. 신은 7일 동안 매일 다른 것을 창조했다. 그에게 하루는 어제와 구별된 '처음이자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저녁은 신이 나에게 선물한 하루의 마지막이다. 그 저녁이 있어 내일 아침이 다시 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아침이 먼저 등장하고 그 다음 저녁이 나오는데, 창세기의 배치는 다르다. 순서를 바꾸었다. 저녁은 다음 날 아침을 탄생시키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저녁은 잠을 통해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겠다는 쉼과 다짐의 시간이다. 이런 말이 생각난다. 뒷면이 먼저 결정되어야 앞면이 결정된다. 오늘부터는 저녁 시간을 잘 보낼 생각이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는 저녁이 힘든 사람에게 위로가 되는 시이다. "자운영, 조약돌, 첫눈이 등장하는 첫 구절이 곱다. 자운영, 조약돌, 첫눈은 모두 사소하지만 귀하고 예쁘다. 시인은 우리도 그것들처럼 작지만 소중한 존재라고 말한다. 세상 누구도 하찮거나 비루하지 않다. 너도 나도, 우리 모두는 귀한 존재다. 얼마나 귀한 존재냐면, 우리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눈물 날 정도로 아름답게 만든다. 또한 우리는 눈물 나는 세상마저 아름답게 만들기도 한다. 이 시에서 가장 좋은 구절, 가장 힘이 되는 구절이 바로 이 부분이다. 세상은 내가 있어야 존재하고, 소중한 나로 인해 아름다워진다. 이 시가 말해주기 전에는 또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나민애)
그대/정두리
우리는 누구입니까
빈 언덕의 자운영꽃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 없는 반짝이는 조약돌
이름을 얻지못할 구석진 마을의 투명한 시냇물
일제히 흰 띠를 두르고 스스로 다가오는 첫눈입니다
우리는 무엇입니까
늘 앞질러 사랑케 하실 힘
덜어내고도 몇 배로 다시 고이는 힘
아! 한목에 그대를 다 품을 수 있는 씨앗으로 남고 싶습니다
허물없이 맨발이 넉넉한 저녁입니다
뜨거운 목젖 까지 알아내고도 코끝으로 까지
발이 저린 우리는 나무입니다
우리는 어떤 노래 입니까
이노리나무 정수리에 낭낭 걸린 노래 한 소절
아름다운 세상을 눈물나게 하는
눈물나는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그대와 나는 두고 두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네게로 이르는 길
네가 깨끗한 얼굴로 내게로 되돌아 오는 길
그대와 나는 내리 내리 사랑하는 일만
남겨두어야 합니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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