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6.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2021년 2월 22일: <걸리버 여행기> (1)
나는 최근 <이솝우화>를 읽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곳에서 간접적으로 소개되는 이솝우화를 읽었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그리스어로 쓰인 원작을 번역한 358편의 우화 전집을 읽고 있다. 지금까지 (사단법인) 새말새몸짓(이사장 최진석)의 <책 읽고 건너가기>를 잘 따라 오고 있다. 다음 달부터는 우리마을 10대학이 주관하여 더 많은 이들과 함께 선정된 책을 읽고, 그 책을 리-라이팅하고, 최진석과 고명환이 하는 책수다에 참여할 생각이다.
<이솝 우화>를 읽다가,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를 쓰면서 매주 일요일은 '이야기'를 화두로 삼아 다른 스타일의 글을 쓰기로 했다. 이제까지 글들이 너무 논증적이었다. 최진석 교수는 <이솝우화>를 선정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논증이나 논변에 빠지는 사람보다 이야기 하는 사람의 영혼이 한 뼘 더 높다. (…) 치밀하게 짜진 논변의 숲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잃는다." 논증적인 글에서는 영혼이 건조하고, 자신감을 잃는다는 말 같다.
그래 나는 <장자>를 좋아한다. 대부분이 우화이기 때문이다. 몇일 전부터 나는 "습정양졸(習靜養拙)"라는 사자성어를 마음에 품고 있다. "고요함을 익히고 고졸함을 기른다"는 말이다. 오늘은 '졸'에 방점을 찍는다. 흔히 '고졸하다'라고 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기교는 없으나 예스럽고 소박한 멋이 있다"는 말이다. 논리적인 글보다 이야기 속에 그런 '고졸 스러움'이 있다. 도자기 가게에 가면, 기계에서 찍어 나온 듯 흠잡을 데가 없이 반듯반듯하고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구도를 가진 도자기는 상식적이라 눈길이 안 간다. 뭔가 균형도 잡히지 않은 것 같고, 어딘가 거칠고 투박한 것 같으면서도 구수하고 은근하고 정답고 살아 숨쉬는 듯한 것이 마음에 끌리고 편하게 느껴진다. 그게 내가 '키우고 싶은 '양졸(養拙)' 이다.
논증적인 글보다 이야기 속에 그런 '졸'이 있다. 이게 이야기의 힘이다. <이솝 우화> 속에 그런 멋이 있다. 사실 대부분의 이야기가 그렇다. 문학의 길이다. 이 길에는 이정표가 없다. 우리는 이정표가 없는 곳에 가면, 두렵고 불안하다. 그러나 그 속에서 가끔은 길을 읽어 볼 일이다. 그렇게 떨고 무서워해야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진석 교수는 "이정표가 하나도 없는 공터에 들어가야 대화가 열리고, 길이 생긴다'고 하며, "거기서 길을 찾지 말고, 길을 내려는 자신"을 보라고 했다.
매주 월요일마다 이런 류의 이야기를 하나씩 소개할 생각이다. 오늘은 <이솝 우화> 이야기 전에. 우연히 어떤 분의 카톡에서 읽은 이야기를 한다. "저녁 무렵, 젊은 여성이 전철에 앉아 있었다. 창(窓)밖으로 노을을 감상하며 가고 있는데 다음 정거장에서 한 중년(中年)의 여인(女人)이 올라 탔다. 여인(女人)은 큰소리로 투덜거리며, 그녀의 옆자리 좁은 공간에 끼어 앉았다. 그러고는 막무가내로 그녀를 밀어붙이며 들고 있던 여러 개의 짐가방을 옆에 앉은 그녀의 무릎 위에까지 올려 놓았다. 그녀가 처한 곤경을 보다 못한 맞은편 사람이 그녀에게 왜 여인(女人)의 무례한 행동(行動)에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처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사소한 일에 화(禍)를 내거나 언쟁을 할 필요는 없지 않겠 어요? 우리가 함께 여행하는 시간은 짧으니까요. 나는 다음 정거장에 내리거든요." 함께 여행하는 짧은 시간을 우리는 얼마나 많은 다툼과 무의미한 논쟁으로 우리의 삶을 허비하고 있는가? 너무나 짧은 여정인 데도 서로를 용서하지 않고, 실수를 들춰내고, 불평하며,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 하는가?"
인생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뻔한데. 뭐 그렇게 힘들게 갈 것 있나?. 간 밤에 친구가 밴드에 올린 이야기 하나 더 한다. 전남 곡성에 107세의 할아버지가 계시는데, 그가 오랜 산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삶의 한 지혜'를 배운다.
"그냥 안 죽고 살면 오래 산다. 어떻게 안 죽는가? 즐겁게 살면 오래 산다. 어떻게 삶을 즐겁게 사는가? 웃으며, 긍정적으로 산다. 미운 사람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그냥 내버려 둔다. 그러면 지들이 알아서 때 되면 다 죽는다. 절대 화 내지 마! 화날 때는 그냥 웃어."
이게 그 답이다. 그래 나는 이렇게 한다. '내가 즐거워야 남을 웃길 수 있다.' 그리고 살면서 무슨 일을 할 때 , '심적 부담감'을 느낀다면 그 일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돼심더"라고 말한다.
이젠 시의 전문을 공유하지 않는다. 필요하시면 찾는 수고를 하시라.
됐심더 / 곽효환
가난하고 쓸쓸하게 살았지만 소박하고 섬세하고 애련한 시를 쓰는 한 시인이 선배 시인의 소개로 고고했으나 불의의 총탄에 세상을 뜬 영부인의 전기를 썼다 불행하게 아내를 잃은 불행한 군인이었던 대통령이 두 시인을 안가로 초대했는데 술을 잘 못하는 풍채 좋은 선배 시인은 그저 눈만 껌벅였고 왜소했으나 강단 있는 두 사내가 투박한 사투리를 주고받으며 양주 두 병을 다 비웠다 어느 정도 술이 오르자 시인의 살림살이를 미리 귀띔해 들은 대통령이 불쑥 물었다
"임자, 뭐 도울 일 없나?"
잠시 침묵이 흐르고 시인이 답했다
"됐심더"
강과 바다가 만나 붉게 타오르는 강어귀 언덕에서 가난 섞인 울음을 삼키던 여학교 사환이었던 소년은 꿈꾸던 시인이 되어서도 그렇게 일생을 적막하게 살았고 만년을 쓸쓸히 병마에 시달리다 눈을 감았다
이 시를 소개한 [먼. 산. 바. 라. 기.]님의 한 마디: "억만금을 준 대도 '아니오!' 할 수 있는 나를 지탱해 주는 그 무엇이 있는가 말이다."
그리고 <걸리버 여행기> 이야기를 몇 번에 나누어 리-라이팅할 생각이다. 지난 달에 "새말새몸짓"의 선정 도서 <걸리버 여행기>을 읽고, 생각이 너무 많아 정리를 못하고 있던 참에, 오늘 아침 페이스북에서 최진석 교수가 쓴 독후감을 읽었다. 어린 시절에는 소인국과 대인국 이야기만 알고 있었는데, 나도 이번 기회에 완역본을 읽었다. 왜 조지 오웰이 "세상에 여섯 권의 책만 남긴다면 그 중의 하나로 이 책을 고른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환상적인 모험에 숨겨진 인간과 사회에 대한 신랄한 풍자"가 아직도 머리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호기심(好奇心)을 사전적으로 말하면, "새롭고 신기한 것을 좋아하거나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나는 어제 딸과 산책하면서, "너는 젊은 데, 호기심이 없는 게 문제 같다"고 했더니,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말을 다 들어 보고, 난 "수준이 낮은 호기심들이군" 했더니 화를 냈다. 잘 모르지만, 호기심도 등급이 있다.
<걸리버 여행기>에서 걸리버의 운명은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저자인 조너선 스위프트의 운명인 것이다. 소위 이런 고전을 쓰려면, 다음과 같이 세 가지가 요구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1) 여행을 통해 새로운 곳으로 건너 가려는 끈질긴 욕구와 기질 (2) 축적된 엄청나고 다양한 지식의 두께 (3)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사랑과 사랑하는 마음에서 발견된 문제 의식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고 싶은 사명감. 3박자가 갖추어 져야 한다고 나는 보았다. 최진석 교수도 고명환과 함께 했던 <북 토크>에서 이렇게 말했다.
<걸리버 여행기>의 독후감에서, 최진석 교수는 "모든 인간은 '나'이다. '우리'는 정해져도, '나'는 정해질 수 없다"라며 시작했다. 나는 'Be yourself!' '가장 나 답게 살자!'고 자주 다짐한다. '베스트 원(best one)'이 되려고 안간 힘을 쓰기 보다는 '온리 원(only one), 즉 고유하고 유일한 존재 로서의 '나'를 갈고 닦으려고 공부하고 글을 쓴다. 이건 '있는 그대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거다.
이런 '나'를 만드는 시작은 호기심 부터이다. "호기심은 현재의 상태를 - 깊이로든, 높이로든. 넓이로든, 의미로든 - 넘어서서 다음을 꿈"(최진석)꾸게 한다. 그러니까 호기심에는 등급이 있다. 예를 감각적인 호기심과 지적 호기심은 높이가 다르다. 지적 호기심을 가지려면,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축적된 지식의 두께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과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명감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호기심이 마르면 멈추고, '우리'에 갇힌다. '우리'에 갇힌 자는 일상이 아무리 변화무쌍해도 사실은 죽을 날을 기다리는 무성영화 속의 조연에 불과하다"고 최교수는 말했다. 이런 호기심은 궁금증에서 나온다. 궁금증은 "무엇이 알고 싶어 몹시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다. 걸리버는 "낯선 나라들을 보고 싶은 줄기찬 욕망때문에 더 이상 체류할 수 없었다"고 말하며, 지난 여행에서 "겪은 불운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목마름"에 항상 들떠 있는 모습으로 나온다.
궁금증을 크게 가진 여행자들은 인생에서 종종 낙오한다. 걸리버의 경우, "그 나라를 한 번 둘러보면서 어떤 것들을 발견할 수 있겠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느 딸과 산책을 하면, 자주 멈춘다. 들 길의 꽃이나 나무가 궁금한 것이다. 그런 나를 딸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내 딸은 호기심이 없기 때문이다.
최교수에 의하면, 인생에서 준비된 낙오는 빛나고 아름답다고 했다. 나는 준비되지 않은 낙오를 겪고, 그렇게 살고 있다. 그래 내 삶은 행복하고 아름답다. 나는 '나'로 자유롭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위로를 주는 문장들이다. "고작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인생이라면, 무성영화 속의 조연이나 '그들 가운데 한 명(one of them) 이상이 되기 어렵다.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 본선 쪽"으로 노를 저었던 모든 성실한 자들은 낙오해야만 얻어지는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삶의 성취를 맛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내일로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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