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일요일의 묵상: 욕심

1601.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위대한 개인은 수련을 통해 다시 태어난다. 인간이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역할을 발견하여 몰입할 , 자신이 반드시 되어야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인성을 회복하여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기적인 욕심과 욕망으로 파멸되어질지 모른다.

 

사실 우리들의 삶은 본래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헤르만 헤세 식으로 말하면, 자신을 향해 없이 걷는 일이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만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다고 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이렇게 시작한다. " 속에서 솟아 나오는 ,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그런데 우리는 자신 자신하고는 상관 없는, 혹은 자기 자신하고 연관된 타인들이 좋다고 제시한 세계관, 종교관, 삶의 철학을 수용하여 자기 삶의 문법을 구축하려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래 위해 세운 집처럼 무너질 밖에 없다.

 

윤홍식은 인간의 마음을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에고', 다른 하나는 '참나'라고 부른다. 자신, 진아(眞我) '아트만' 가지 전혀 다른 의미가 숨어있다. 하나는 소문자 atman으로 경험적 자아라 한다. 나라는 개별적 인간의 경험에 의해 형성되어 타인과 구별되는 존재로서 자아(自我)이다. 윤홍식은 이걸 '에고' 한다. 에고는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가 무한 세계의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고 유일한 세계, 나아가 진리를 머금은 유일한 세계라고 우긴다. 배철현 선생은 그런 사람을 "무식하다" 말한다. 다른 하나는 대문자Atman으로 삼라만상의 근원인 '브라만' 일치하는 '초월적인 자아'이다. 윤홍식은 그걸 '참나'라고 한다.

 

에고는 너와 나의 구분이 있고, 시간과 공간 속에서 지배 받는 욕심의 세계이다. 반면 '참나(진아眞我)'는 양심의 자아이다. 이 곳에 있는 인간의 본성, 아니 본심은 성스러운 영역이고, 이 세상의 논리와 다른 세상이다. 너와 나의 구분이 없고 시간과 공간의 개념도 없다. 에고라는 욕심의 자아 세계는 '호리피해(好利避害, 이익을 좋아하고, 손해를 싫어한다)'로 요약된다면, 참나라고 하는 양심의 자아 세계는 '호선오악(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한다)'의 세상을 말한다.

 

'거인욕, 존천리(去人欲, 存天理)'라는 말이 있다. 그건 '인간의 욕심을 버리고, 하늘의 이치를 따르라' 뜻이다. 에고의 욕심(호리피해, 好利避害)을 버리고, '참나'가 지니고 있는 양심(良心=인성人性), 아니면 다음과 같이 우주의 원리인 "6바라밀(세상을 건너는 일, 세상을 사는 일, 6 가지 인격의 기둥)"에 머물라는 것이다. 바라밀이란 말은 '파라미타'에서 것이다. 파라미타는 '파람(저 멀리)+이타(도달하다)' 합성어이다. 뜻은 궁극, 즉 멀고 험하게 보이는 부처가 되는 길을 꿋꿋하게 걸어서 이른다는 것이다. 지금 까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吾='참나의 나', ‘진아’, ‘상아’, ‘진재’, 참 주인

我=나, 우리, 외고집, 성심, 정해진 마음, 에고의 나

 

배철현 선생은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인간의 마음이 가지인데, 하나는 외부의 유혹에 경도된 '욕심'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되어야 하고 자신이 있는 마음인 '본심'이다. 본심은 그것이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지 가만히 추적하고, 그것을 찾기 위해 매일 수련할 , 슬그머니 등장하는 밤하늘의 작은 별이다. 반면 욕심은 '과유불급'이라는 진리를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의 마음이다. 욕심은 배가 부르면서도 자신 앞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게걸스럽게 먹으려는 식탐과 같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아침은 욕심 이야기를 하려한다. 에리히 프롬은 "욕심은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을 소진 시키는 바닥 없는 구멍"이라 했다. 배철현 선생은 욕심을 "만족을 모르는 헛것을 갈망하는 괴물"이라 했다. 그러면서 선생은 "성공한 사람"이란 "스스로에게 만족할 아는" 사람, "자신에게 만족스러운 가지를 찾았거나 찾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며,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또한 이러한 성공의 방해꾼을 다음과 같이 가지로 보았다.

 

번째 방해꾼은 부러움이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수렴을 적이 없고, 자신을 우주 안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로 대접하지 못하는 사람은 대개 남을 부러워 한다.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섬기는 사람은 남을 부러워 하지 않는다.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남을 부러워 하는 사람은 자신을 위한 최선의 기준을 스스로 만든 적이 없기 때문에 남의 기준을 자신의 기준인 착각한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길이 고유한 것인 알고 집착하기 시작한다. 그런 사람을 배교수는 무식(無識) 사람이라 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위한 최선을 모르는 어영부영 사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남을 부러워하는 , 남이 소유한 것을 나도 갖고자 하는 , 남이 말하는 성공을 자신의 성공으로 착각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번째 방해꾼은 흉내이다. 흉내는 부러움의 표현이다. 부러움은 정신적인 활동이라면, 흉내는 육체적인 활동이다. 사람은 자신만의 고유한 생각을 표현할 독창적이며 매력적이다. 반면 흉내를 내는 사람은 진부하다. 그렇지만 우리 대부분은 자신도 모르게 흉내를 내며 살아간다. 용기를 내어 자신만의 고유한 선율을 연주해보지만 이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불협화음으로 들릴 있다. 그렇지만, 고유함에는 진정성이 깃들어 있어서 듣는 이의 마음 속에 있는 진정성과 공명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아름다운 선율로 변화한다. 배교수에 의하면, "흉내는 자신의 고유함을 포기하려는 자살행위" 했다.

 

인생이라는 마라톤에서 고유한 나를 위한 최선의 경주는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 아니다. 자신과의 경쟁이다. 달리기를 위해서 가장 가볍고 간편한 복장이 필수인 것처럼, 삶의 달리기에서도 단출함, 단순한 삶이 필요하다. 또한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우리를 목표점에서 이탈하게 만들고, 우리의 시선을 희미하게 만드는 마음의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 마음의 유혹을 선생은 '욕심'이라 하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욕심은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괴물"이라 했다.

 

단테는 <신곡>에서 욕심을 다음같이 끊임 없이 휘몰아치는 태풍에 비유했다. "지옥의 휘몰아치는 바람은 결코 쉬는 법이 없다. 바람은 이영혼들을 자신의 힘으로 끌고 다닌다. 그리고 그들을 바람에 날려 보낸다. 그들은 뒹굴고, 부딪히고, 결국은 괴로워 소리친다." (<지옥> 5 31-33)

 

배철현 선생은 욕심은 "끝도 없고 만족도 없다" 하면서, "그것은 배가 부른 데도 먹으려 하는 비이성적 습관이며, 권력을 자가 많은 권력을 휘두르려는 횡포이다. 한자 욕심(慾心)에서 ()자를 해자하면, 배가 불렀음에도 많은 곡식() 하품()하듯 입을 벌려 넣으려는 마음()이다. 정확히 말하면, 깊은 골짜기()에서 끝없이 흘러내려 오는 물을 자신의 작은 입을 벌려() 마셔보겠다는 마음()이다. 사실은 자신을 매일 값싸게 만드는 마음의 마약이다.

 

반면 '본심', '참나' 욕심에서 벗어나 자신으로 돌아와 자신에게 온전하고 타인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게 한다. 인간은 모두 그런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걸 회복해야 한다.

 

그래 오늘 아침은 내가 언젠가 적어두었던 것을 형식으로 만들어 공유한다. 인간의 본성, 인성 아니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에게 배웠다/박수소리

 

우리는 오로지 소비하기 위해 태어난 같다.

이상 소비할 없게 되면

좌절감을 느끼고 가난을 괴로워하며

스스로 하찮은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가난한 사람이란 적게 가진 사람이 아니라,

끊임 없이 많은 것을 바라는 사람이다.

 

나는 가난하지 않다. 단순하게 뿐이다,

사람이 사는 데는 그다지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나는 농부다.

인생과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이 그렇다.

 

인생은 기적이다.

인생만큼 가치 있는 것은 없다.

 

세상은 언제나 혁명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것이 총과 폭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혁명이란 사고의 전환이다.

유교나 기독교도 당시에는 혁명적이었다.

 

나는 어릴 때의 꿈이 고물상이었다는 의사를 알고 있다.

물성을 회복시키고 싶었다고 한다.

 

내가 인문운동가가 되려는 것과 같은 결이다.

우리도 인성이 회복되었으면 한다.

물건에 소비하지 말고, 사람과 서비스에 소비해야 한다.

그게 소유의 증식에서 존재의 상생으로 가는 길이다.

 

 

배철현 선생은 인간의 본성, "본심은 눈으로 확인할 없는 웅장한 나무의 뿌리와 같다" 말했다. 오늘 아침 사진처럼 나무가 언제나 중력을 거슬러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를 있는 이유는, 높이와 너비에 어울리는 뿌리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본성, 본심은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원래의 마음, 참마음이다. 그걸 '참나'라고 하며, 영어로는 대문자 S, 'Slef' 한다. 배철현 선생에 의하면, 그것은 "인간 마음 깊은 곳에서 누군가의 발굴과 발견을 기다리고 있다" 했다. 그러면서 "교육은 본심을 정성스럽게 발굴하는 체계"이고, " 본심은 이웃과 심지어는 원수와도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통하기 때문에 인류, 자연 그리고 우주 보편적"이라 했다.

 

중국의 노장 사상은 좁게 이야기 해서 유교의 사회참여에 반대해서 생긴 사상이며, 크게는 인간의 물욕을 경계하는 가르침을 주요 내용으로 갖는다. 물질, 명예, 경쟁, 승리 같은 성공 일변도로 편성된 소유와 증식의 방향을 것이다. 그런 방향으로 가는 사회적 상식의 허점을 찾아내 이런 것들이 얼마나 인간을 힘들게 만들고 피폐화 시키는 부질 없는 짓인지를 지적하면서 여기에서 벗어날 있는 지혜를 가르친다. 그런 것들을 포기하고 얻는 마음의 평화가 얼마나 값진 가를 말한다. 존재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질만 갖추면 경계선을 넘지 않아야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있다고 가르친다.

 

길은 자연의 도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다. 자연을 스승으로 삼으라는 말이다. 일상에서의 구체적인 실천 사항은 다음과 같이 3()이다.

(1) 무위(無爲):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무위하면 되지 않는 법이 없다는 말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지만 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2) 무형(無形): 외관의 형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다. 무위 방식으로 말하면, 형태를 버려야 진정한 형태에 도달할 있다는 말이다.

(3) 무용(無用): 쓰임새 같은 이기적 목적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다. 쓰임새를 버려야 진정한 쓰임새를 얻을 있다는 말이다.

 

무언가를 잘해야 하고, 형태를 만들어내야 하며 확실한 쓰임새를 제시해야만 성공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탈물(脫物)이다. 장자는 이걸 '승물(乘物)'이라 했다. 이어령 선생의 말이 생각난다. 말과 달리기를 해서 이기지 못할 같으면 말에 올라타라고 했다. 물건을 올라 타는 것이 승물이다. 다르게 말하면 탈물이다. 탈물 또는 승물은 그대로 물질에 대한 욕심과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가르침이다. 이것 만이 물질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가르침이다. 승물 또는 탈물은 물질과 친하게 어울리는 것이다. 물건을 취해서 얻으려는 욕심이 생기면 끝없이 물질과 경쟁관계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