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어제는 선거 결과에 대해 수 많은 말들이 쏟아졌지만, 나는 하루 종일 아무 일정 없이 지내며, 많은 성찰을 했다. 몇 분에게 문자를 했는데,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내 욕심이다. 마음을 비우고, 시시하게 살기로 했다. 나의 페북에 올라오는 <과거의 오늘>이 답을 주었다. "가난한 사람은 적게 가진 사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의 여러 말 중 하나를 다시 되새겨 본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다른 이에게 의자가 되는 것인데, 내가 의자가 되려 하기보다, 다른 이의 의자를 찾고 있다. 절제하지 못하고, '주님'을 만나면, 내가 의자가 되기 보다는, 다른 이의 의자로 견딘다. 이번 주는 '질문의 힘'에 대해 성찰하는 중이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누구인가? 이런 질문들은 해답을 원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런 질문들은 자신의 삶을 더 숙고하는 질문을 유도할 뿐이다. 지난 글들은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볼 수 있다.
의자/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도 똬리도 받쳐야 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오늘 아침은 고갱 그림에 나오는 질문 이야기를 한다. 내가 아는 한 연구원은 매일 그림 이야기를 카톡으로 보낸다. 어제 아래 그림이 들어 있었다.
이 그림은 고갱이 타히티 섬에 가 인간 본성에 대한 예술적 탐구를 지속하다 자신의 병든 몸을 끝내기 위해 자살을 준비하면서 그린 그림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이 자살 전 마지막 유작이다. 그는 이 그림을 완성한 후, 자살에 실패하고 6년을 더 산다. 이 작품은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 있고, 가로 크기가 무려 3미터 70센티미터가 넘는 대작이다.
우선 그림을 설명한다. 배철현 교수의 <매일 묵상>에서 얻어온 것들이다. 나름 정리를 하면서 내 생각을 첨삭한 것이다.
▪ 자살노트를 그림으로 그리면서, 고갱은 "너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다. 그런데 배철현 교수는 그건 "신의 위대한 질문"이라 했다.
▪ 오른쪽 세 명의 여인과 어린이가 있는 이 부분은 삶의 시작을 의미한다. 자신을 흙으로 돌아갈 인간으로 그렸다. 어린 아이는 누어 자고 있다. 동물이나 인간이나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기는 마찬가지이다.
▪ 그림 가운데 부분은 청년과 장년 시기의 일상생활을 상징한다. 분홍색 긴 치마를 입은 두 명이 어깨동무하며 자궁과도 같은 검은 색 동굴에서 나오는 모습이다. 그리고 중간에 등장하는 사람이 사과를 따는 모습에서 유추해 보면, 이들은 <창세기> 1장과 2장에 등장하는 원초적인 최초의 인간들인 아담과 이브이며, 이들이 거니는 장소는 에덴동산이다. 에덴 동산에 쫓겨나 여성은 해산의 고통을, 남성은 노동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고 전한다. 자신의 삶이 그리 편하지 않았음을 아담과 이브의 표정으로 표현한 것 같다.
▪ 그림의 왼쪽에 앉아 있는 할머니는 죽음을 맞이 하면서 깊은 상념에 빠져 있다. 할머니 앞에 있는 하얀 새는 인간들이 하는 말들의 부질없음을 상징한다.
▪ 그림 뒤편에 자리잡은 석상은 피안의 세계를 표현한다. 그리스도교와 십자가를 타히티의 여신인 히나('소녀'라는 의미)를 그린 동상으로 과감하게 대치했다.
위 그림의 왼쪽 상단에 세 개의 질문들이 프랑스어로 적혀 있다.
▪ D'où Venons Nous
▪ Que Sommes Nous
▪ Où Allons Nous
이를 우리 말로 번역하면 이렇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고갱이 물었던 질문 1: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 이 질문은 인생의 비밀을 쥐고 있는 질문이라서 우리가 여전히 반복하지만 해답이 없다. 다만 인생 경험을 통해 지혜가 생기고 혜안이 생기면서, 질문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해소될 뿐이다.
▪ 우리는 무슨 경로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이 질문은 이렇게도 바꿀 수 있다. 우리는 왜 인간으로 태어나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인가?
▪ 내가 현재 있는 무대가 왜 여기인가? 참 어려운 질문이다. <욥기> 38장 3절에 신이 욥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에 있었느냐?"이기도 한다.
▪ 우리는 이 질문 만큼은 삶에 중요한 질문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질문과 대답은 실용적이지 않기 때문에 잘 하지 않는다.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 있다. 우리는 왜 인간으로 태어나 이런 고민을 하며 질문하는 것인가? 내가 현재 살고 있는 무대가 왜 여기인가? 참 어려운 질문이다. 그래 나는 며칠 전부터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를 읽고 있다. 이 물음에 제1도인 「태극도」는 이렇게 답한다. 우주의 중심을 태극(太極)이라 한다. 그 중심은 그러나 무극(無極)이다. 보이지 않고,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매이지 않는다. 이 중심의 '활동(動)'으로부터 우주가 장엄하게 돌고, 온갖 생명이 태어나고, 계절과 사건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왜 그런가? 난 이 말로 이해한다.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도덕경』제40장). 이 말은 "도의 핵심 내용은 반대 방향을 지향하는 운동력, 즉 반反이라는 것"이다. 어떤 것도 변화하지 않거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동양 철학이고, 이를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해석한다. 뭐가 "좋은 것"인가? 그걸 누가 아는가? 나는 지금 이 난해하고, 낯설고, 오래된 '지식'으로 여행 중이다.
고갱이 물었던 질문 2: "우리는 누구인가?"
▪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고 그럭저럭 살다가 시간이 되면 흙으로 돌아는 존재이다. 누구나 죽어야 한다.
▪ <창세기>에 의하면 에덴 동산의 수많은 나무 열매 중 신은 두 그루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명령한다. 한 나무는 그 열매를 따 먹기만 하면 영생하는 '생명나무'이고, 다른 나무는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이 담겨 있는 '모든 지식의 나무'이다. 이 나무는 '선악과'로 잘못 번역되어 해석되어 나온 나무이다. <창세기>의 저자는 모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인 생명나무의 열매가 아니라, '모든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따먹도록 서술하였다. 모든 지식의 나무는 그것을 먹는 순간 인간이 왜 사는지, 신은 누구인지, 우리는 누구인지를 묻기 시작하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우리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짧은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는다. 사과를 따는 타히티 인의 얼굴에는 결연함과 평온함이 깃들여져 있다
한 어린아이의 등장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직시하고 인생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은유 같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그 이유는 우리가 속한 사회와 우리는 한 개인을 그 사람 자체로 보질 못하고, 그 사람과 인위적으로 연관된, 사회가 부여한 페르소나(persona, 가면)와 혼동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 사람이 지닌 학력, 권력, 부가 아니라, 그 사람일 뿐이다. 이 사실을 알려면 어린아이 같아야 한다. 우리가 삼라만상의 의미와 우리 자신의 존재 의미를 알기 위해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청명한 마음과 눈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모든 지식의 나무 열매인 사과를 먹을 수 있게 된다.
고갱이 물었던 질문 3: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 우리는 죽으면 끝인가? 우리의 인생은 죽은 후에 그대로 마치는 것인가? 잘 모른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묵상과 준비는 오늘 우리의 삶을 더욱 가치 있고 살만 하게 만든다. 역설적이다.
▪ 마지막 왼편 그림은 죽음에 관한 묵상이다. 모든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은 어린 어린아이가 순식간에 어른이 되어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앉아있다. 오른 손으로는 땅을 디디고 있고 왼쪽은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땅을 짚은 오른 손이 그 왼편에 있는 노파의 그림자와 맞닿아 있다. 고갱은 아마도 화살처럼 흐르는 시간의 흐름을 이 경계로 표현한 것 같다.
▪ 이 노파는 살갗이 고동색과 검은 색으로 죽음이 임박해 왔음을 표현한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이 노파의 눈길이 그 오른 쪽에 앉아있는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눈빛과 같다는 점이다. 시간은 지나면 모두 한 '찰라'라고 하지 않았던가! 고갱은 노파 앞에 하얀색 새를 그려 넣어 우리에게 침묵할 것을 요구한다. 이 그림을 통해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깊이 생각하라는 명령이다.
▪ 왼편 상단에는 타히티의 달의 여신인 '히나'가 제단 위에서 죽음에 대한 다다른 인간을 보고 강복하고 있다. 고갱은 '히나' 여신의 몸 전체를 옅은 파란색으로 칠하였다. '히나' 여신은 양손을 바깥쪽으로 들고 이 과정을 모두 지켜보고 있다. '히나' 여신 옆에는 또다른 타히티 여인이 아담과 이브가 나왔던 동굴의 뒤편을 응시하면서 생로병사의 삶의 순환과정을 표현하였다
우린 위의 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원하지는 않는다. 다만 질문은 자신의 삶을 더 숙고하는 질문을 유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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