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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어제는 지인의 생일 파티를 했다. 물리적 거리를 두라고 하는데, 몇몇이 그냥 모였다. 저녁 이른 시간부터 '주님'과 함께 부활의 기쁨을 누렸다. 나는 주님을 모실 때마다, 새로운 건배사를 한다. 내가 '스페로!(spero!)'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스페라(spera)'라 외치게 한 후 마신다. 그 뜻은 '나는 희망한다.' 그러니 "너도 희망하라!'이다. 이 말은 '나는 숨쉬는 동안 희망한다'는 라틴어 'Dum spiro, spero에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라틴어 한 구절에 'Dum vita est, spes est'가 있다. 이 말은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는 뜻이다. 요즈음처럼 어울리는 다른 문장은 없다. 살아 남아,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오늘 아침 사진은 지난 주에 찍은 것인데, 명자나무 꽃이라 한다. 빨간 화등 주렁주렁 달고 있는 이 꽃은 아가씨나무 꽃 또는 산당화라고도 한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는 페친인 이호준 시인의 포스팅을 언젠가 적어 둔 것이다. 나는 아침마다 <사진 하나, 시 하나>를 쓰다 보니, 세상을 자세하게 본다. 사진 찍고 싶어서. 그리고 대상을 자세히 보니, 그림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질문이 시작된다. 이 꽃 이름은 뭐지? 오늘 아침도 어제에 이어 질문에 관한 글을 이어간다. 지난 글은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볼 수 있다.

명자나무꽃/이호준

명자가 빨간 치마자락을 감았다.
환장하게 곱더라
새초롬 흘겨보며 요염을 떠는데
잡것
화무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운다 했거늘
내 어찌 한 철 요망이냐 그랬더니
제가 백일홍보다는 못하여도
내 봄날은 붉디 붉게 버티리니
영감은 가던 길 가시오 하더라
명자, 아니 산당화 요것이
내 붉은 심장을 네가 아직도 못 알아보느냐

한근태는 자신의 책, 『고수의 질문법』 서문에서 질문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한다.
1.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고자 묻는 질문
2. 자신은 알고 있지만 상대방에게 답을 생각해보도록 유도하기 위해 묻는 질문
3. 자신도 모르고 상대방도 모르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함께 답을 찾기 위해 던지는 질문

이 세가지의 공통점은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의도가 없는 질문은 목적 없는 질문이다. 그건 의미 없는 혼잣말이다. 실제로 살면서, 알맞은 때와 내용으로 하는 질문이 쉽지 않다. 그래 질문을 잘 하는 사람이 '고수(高手)'이다. 고수란 '장기나 바둑에서 수가 높은 사람'을 뜻하지만, '어떤 분야나 집단에서 기술이나 능력이 매우 뛰어난 사람'을 말하기도 한다.

사실 별 생각 없이 살다 보면, 질문이 없다. 다 안다고 생각하고, 질문하지 않는다. 모른다고 생각하고 모르는 게 있어야 질문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질문은 우리를 성장시킨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코로나 19 이후 세상이 어떻게 변할까 물어야 한다. 아는 것과 안다고 착각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불치하문(不恥下問)'이란 사자성어를 좋아한다.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한근태는 이 사자성어를 "수치불문(羞恥不問), 모르면서 묻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 하라"로 바꾸었다. 그렇다.

니체에 의하면, 인간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만 듣는다고 했다. 우리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 앞에서는 도망친다. 사실 우리들의 삶 속에서는 대답하기 좋은 질문보다는 대답함으로써 고통스러워지는 질문, 대답을 자꾸 미루고 싶은 질문, 대답 자체가 곤란한 질문들로 가득하다. 어쩌면 살아 가면서 정말 중요한 질문들은 대답하기 힘든 것들이 더 많다. "왜 "호모 데우스"를 꿈꾸며, 인공지능이 인간지능을 추월하려는 소위 '4차산업혁명'을 운운하는 이 시대에 코로나19가 창궐하는가?" "우리가 진실로 꿈꾸는 삶은 무엇인가?" 정여울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어떻게든 더 나은 대답을 내놓기 위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성장한다"고 했다. 내 생각으로도 대답하기 어렵거나 할 수 없는 질문들에 대답하면서 우리는 그동안 몰랐던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우리 문화는 질문하지 않는다. 학회에 가 보면, 예상 질문을 가져 오라고 한다.

질문을 잘 하려면 겸손해야 한다. 자신이 최고라고 하는 사람에게 질문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질문을 하는 것은 정신적인 토대(質, 바탕)을 단단히 하고, 새로운 오르막 길의 문을 향해 한 발을 내딛는 것과 같다. 학문(學問)이란 한자의 의미는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물음(問)을 배우는 것, 즉 질문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훌륭한 학자는 남들이 보지 못했던 질문을 던진 사람들이다. "문제를 해결할 시간이 1시간 있고 그 해결책에 내 인생이 달려 있다면, 나는 우선 어떤 질문을 제기하는 게 적합한지 판단하는데 55분을 쓸 것이다. 일단 적절한 질문을 알기만 한다면 문제 해결엔 5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 아인슈타인의 이야기로 오늘 아침 글쓰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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