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2021년 4월 14일)
"가족으로 해결이 안 된다. 가족은 의무 관계이고 연애는 쾌락이지 절대 내 근원적 문제를 해소해 주지 않는다. 각자 철학자가 돼야 한다. 다들 자기 인생의 철학을 할 때가 됐다."
지난 주에, 나는, 코로나-19 이후, 많은 것이 바뀌고 있는 세상에서 삶의 나침반을 잃어버린 듯 공허감을 겪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정신적 가치를 모색하는 사람들의 인터뷰인 "삶이 묻는 것들에 답하다"(인문학 재단 플라톤 아카데미와 신동아)를 SNS를 통해 알게 되었다. 매주 수요일은 시대정신을 찾아 성찰하는 날이다. 그래 그 인터뷰를 읽고 갈무리한 내용을 공유한다.
첫 주자가 고미숙이었다. 제목은 "'행복한 가족'은 환상"이라는 주제였다. 고미숙은 공부 공동체 <감이당>을 운영하는 고전연구가로 소개되었다. 나는 올해 초에 감이당의 모토를 알게 되었다. 참 인상적이었다. 다시 소환해 본다. '도심에서 유목하기/세속에서 출가하기/일상에서 혁명하기/글쓰기로 수련하기"였다.
(1) 도심에서 유목하기: 자본의 한 가운데서 자본에 포기되지 않는 길을 열어 가겠다는 것이다. 유랑은 이제 멈추고 진정한 유목을 할 생각이다. 유목은 유랑과는 다르다. 유랑이 그저 여기에서 저기로 흘러가는 거라면, 그래서 공간은 끊임없이 변이하지만 존재성은 달라지지 않는 거라면, 유목은 길위에서 타자를 만나 스스로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2) 세속에서 출가하기: 출가의 핵심이 노동, 화폐, 가족이라는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세속적 삶 속에서도 욕망의 변환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3) 일상에서 혁명하기: 지금까지 혁명은 늘 거대담론의 전망 속에서 시도되었고, 제도와 시스템의 혁신으로 귀결되었다. 그 결과 물질적 영역은 비약적으로 진화했지만, 사람들의 일상은 낡은 습속으로 반복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상과 습속의 뿌리는 욕망이다. 그것은 제도의 시스템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혁명의 시작은 일상이다.
(4) 글쓰기로 수련하기이다. 글쓰기란 유목, 출가, 혁명을 위한 최고의 실천적 전략이다.
고미숙은 최근에 <기생충과 가족, 핵가족 붕괴에 대한 유쾌한 묵시록>이란 책을 냈다. 그의 주장은 지금의 우리 사회 핵가족은 정서적 집착과 경제적 이익의 포로가 됐다면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환상을 깨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고미숙은 영화 <기생충>을 핵가족이라는 앵글로 보았다. 실제로 대저택에 살든 반지하에 살든 두 가족 다 엄마,와 아빠, 아들과 딸로 이뤄진 전형적인 근대 핵가족이었다. 이 가족들은 모두 완전히 봉쇄된 관계 안에서 외부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까 외부로부터 소외된 핵가족이었다. 가족들은 그 안에서 오로지 욕망을 발산하는 거 밖에 없었다. 가족 속에서 다른 종류의 교감이 불가능한 모습을 고미숙은 잘 보았다.
게다가 이런 핵가족 마저 코로나 시대와 함께 해체되고 있다. 이제까지 핵가족을 유지해 온 것은 다음과 같은 판타지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핵가족은 아파트, 거기에 엄마 아빠가 있고 애들이 있는데, 아버지는 사무직이어야 하고, 일일 노동자여서는 안 된다. 아이들은 공부를 잘해야 하고,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는 쳐줘야 한다. 그야말로 판타지이다. 지금 우리는 가족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아무도 모르는 무서운 세상에 살고 있다. 언제부터 인지 근친상간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나마 코로나 전에는 다들 바빠서 가족관계가 그런대로 유지가 됐다. 다들 바빠서 서로 만나기 어려우니까 그나마 시간을 내서라도 서로 마음을 주고 받았다. 그러나 코로나 때문에 다들 함께 지내지만 가족끼리 할 게 없다는 것을 이제 잘 알게 되었다.
고미숙에 의하면, 가족은 원래 대화가 필요 없는 관계라고 한다. 가족은 구성원들 각자가 자기 인생을 살도록 '서포트' 해주면 된다는 것이다. 원초적으로 그냥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묵묵히 그냥 자기 길을 가게 해주면 된다는 것이다. 행복한 가족 관계가 인생의 전부라고 설정해 놓은 건 자본의 프레임이다. 그래야 소유에 올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집, 아파트 하면서. 집이란 게 따뜻하고 기본 의식주 해결되는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사는 게 거의 똑같다고 본다. 나머지는 머리로 망상 하는 거다. 예를 들어, 내가 남보다 큰 집에 산다는 망상 말이다. 지금의 아파트는 마음의 거처가 아닌 욕망의 거처다. 이렇게 된 게 가족 관계, 핵가족이 토대였다. 그런데 지금은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핵가족조차 해체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젠 가족에 대한 판타지를 버려야 한다. 특히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려면, 가족에 대한 생각을 리셋(reset)해야 한다. 일도 너무 열심히 하면 안 된다. 지구가 남아 날 수가 없다. 코로나 시대에는 열심히 사는 게 반생태주의여야 한다. 밤에 불을 켜고 일하고 그러면 또 먹어야 하고, 쓰레기가 나온다. 그런 점에서 조금 게으르게 사는 게 지구를 살린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자식을 많이 낳았다. 보통 한 집에 대여섯명, 어머니 혼자 감당하기 어려워 큰애가 작은애를 업어 키웠다. 집안의 기둥인 장남은 예외였다. 장남이 잘돼야 집안이 일어선다며 조금은 특별 대우했다. 그래야 이다음에 따뜻한 제삿밥이라도 한 그릇 얻어먹는다고 생각했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큰아그는 자식들 많항께” 더 챙겨준다 했지만, 실은 장남이기 때문이었다. 동생들도 이를 모르지 않지만, 조용히 넘어갔다.
다음 시에서 처럼, 어머니는 손이 크다. 명절에 본가를 찾은 자식들에게 바리바리 싸준다. “여덟 개로 나누”었는데도 여섯째의 손에 “서너 개의 봉다리”가 들려 있다. 이럴 땐 왠지 봉지보다 봉다리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내가 아는 분 이름이 '봉지'이다. 자식을 그만 낳고 가지를 매듭짓는다는 의미에서 이름을 봉지라 했다 한다. 우리는 그를 충청도 사투리로 '봉다리'라 놀리곤 했다. 봉다리마다 어머니의 정성이 듬뿍 담겨 있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태운 차가 사라지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든다. 조용하다가, 왁자지껄하다가 적막해진 집에서 어머니 혼자 눈물을 훔친다. 그림이 그려진다. 오늘 아침 시를 소개한 김정수 시인의 덧붙임이다. 아침 사진은 빛에 따라 같은 사물들도 다르게 찍은 것을 실험해 보았다. 그러니 내가 보고 있는 사물들도 다 내 카메라에 잡히는 것일 뿐이다. 가급적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싶다.
어머니의 봉다리/이대흠
명절 때면 어머니는 팔남매 자식들
봉다리 봉다리 챙겨주기 바쁘다
큰아그는 자식들 많항께
쌀도 두 차뎅이는 가져가그라
제찬 남은 것도 떡 쪼가리도
여덟 개로 나누어
왁자한 명절 끝에 내 집에 오는 날엔
여섯째인 내게도 서너 개의 봉다리가 주어진다
본가에 갈 때마다 달라붙는 봉다리 때문에
나는 빈 봉지 모아 어머니께 드리지만
어머니의 손을 거친 봉다리들은
어김없이 배가 불러 돌아온다
몇달에 한 번쯤 뵈는 어머니의 얼굴
날이 다르게 검버섯이 늘어난다
어머니의 늘어가는 검버섯
자식들에게 퍼주던 것들
봉다리 봉다리 들어낸 자죽이다
*자죽: 자국의 강원도 사투리
다시 우리 시대의 가족 이야기로 돌아 온다. 핵가족은 소유와 자본을 집중하게 하는 데 효과가 있었다. 전부 다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고 뼈 빠지게 일했다. 문제는 이제 어느 정도 벌었는데 아직도 부족하다고 얘기한다. 이제 벌만큼 벌었으니 남을 위해 쓰겠다고 생각하는 중산층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겐 그런 생각과 윤리가 부족하다. 특히 지금 일부 상류층은 돈이 남아돌아가는 데도 오로지 소비와 욕망에만 사로잡혀 있다.
고미숙은 가족 대신 공부 공동체를 택했다. 그녀에 의하면, "둘이 사는 힘으로 100명 하고도 살 수 있다. 사람이 함께 모이면 상호적 순환과 상생도 있고, 상극도 있어서 빈곤감 같은 게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인간에 대한 환상이나 기대 같은 것을 갖지 않는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저 사람은 어떤 존재일 것이라고 하는 전제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 식으로 애착을 갖지 않으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흥미롭다. 우리들의 아픔은 흔히 애착, 아니 집착에서 나온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가족은 애착을 끊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감정 조절을 후련한 적이 없는 데도, 가족 안에서는 감정만 주고 받기 때문이다. 그래 집에서 더 감정만 증폭되고 오염이 된다. 예전의 대가족 시대에는 제사 의식들이나 가족 윤리가 있었다. 핵가족은 '사랑한다'는 거로 다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니까 젊은 세대들은 엄청난 케어를 받고 애착의 대상이 됐는데 인간이나 생명으로서 자존감을 하나도 못 느낀다.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교감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고미숙의 진단이다. 그녀의 말을 그대로 공유한다.
"가족 안에서 맨날 감정을 배설하는 것만 배우는데 어떻게 밖에 나가 낯선 존재를 사랑하겠나. 사랑에도 윤리가 없으니 성이 범죄가 되는 시대가 된 거다. 그냥 자기가 받은 대로 한다고 생각한다. 올인 해서 하루 종일 나(I)만 생각하는 것, 이것은 비극이다. 소심해서 밖에서는 말도 못 하는 애들이 집에 와서 부모한테 행패를 부린다." 정확한 지적이라고 나도 생각한다.
그런데도 핵가족이 어떻게 유지가 되느냐? 고미숙의 주장은 바로 고작 아파트 하나 뿐인 재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족이 해체되는 순간 그걸 분해해야 하니까 말이다. 그러다 보니 너나 없이 친구가 없다. 그러니 바깥에 나갈 엄두를 내지 않는다. 그렇다고 가족끼리 많은 시간을 보내면 외롭지 않아야 하는데 외롭다고 한다. 왜 그럴까? 가족 내 두 세명하고 교감을 아무리 해보아도 외로움이 해결되지 않는다. 특히 중년 남자들이 내면적으로 더 외롭게 산다. 그러다 보니, 경마장 아니면 주식 투자, 아니면 PC 방을 찾는다. 왜냐하면 의식이 낡았기 때문이다. 뭔가를 전투적으로 해야만 잘 산다고 생각하고, 싸워서 이겨야만 의미가 있다고 본다. 게다가 감정 훈련이 안 되어, 거의 부하 직원을 감정 쓰레기 통으로 생각하고 산다는 것이다. 고미숙의 주장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답은 공부를 해야 한다. 고부하면 자기 노년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면 누구나 증여가 된다는 것이다.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누렸구나. 그래서 이제 언제든 나누어 주어야 겠구나"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혈연을 넘어선 새로운 관계, 인생을 함께 갈 수 있고 일상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제 학벌 시대는 끝났고 대학에서 배우는 공부가 세상을 이끌어 갈 수 없다고 본다. 대중이 지성을 연마해서 이끌어가야 한다. 지성이 부족하니 모두들 감각적 사유를 하며 쏠리고 몰려 다닌다. 고독한 시간을 갖고 지적 시선을 높여야 한다. 어떤 게 잘 사는 건지 성찰하고 더 잘 살기 위한 욕망을 가지는 것이다. 소비를 위해 사는 게 인간 답게 사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철학'이 정립되어야 한다. 고미숙의 주장은 "집에서 길로, 소유에서 자유로 가자는 거다. 소유가 목적이 아니라 소유할 수도 있고 집에 머물 수도 있고 돈을 많이 벌 수도 있다. 그 모든 건 다 나의 존재론적 자유의 확장이다. 태어남 자체가 예속인데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고미숙은 인터뷰의 끝에서, 세상이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다 무너지는데, 왜 자꾸 우리는 집으로 가족 속으로 들어가냐 묻는다. 길로 나서라고 한다. 사람들과 교감을 하라고 한다. 그녀의 말을 직접 들어 본다.
"지금 사람들 인생이 헛헛하다. 교감할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건 연애나 가족으로 해결이 안 된다. 가족은 의무 관계이고 연애는 쾌락이지 절대 내 근원적 문제를 해소해 주지 않는다. 각자 철학자가 돼야 한다. 다들 자기 인생의 철학을 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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