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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여행은 늘 신비롭다.

1596.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2021년 4월 13일)

 

어제는 산책 길에서 유튜브를 통해 최진석 교수가 개그맨 고명환과 <걸리버 여행기> 읽고 나누는 토크 쇼를 다시 들었다. 최교수는 조너선 스위프트의 상상력에 대해 감탄하면서,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작품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가지가 좋은 고전을 만든 같다고 했다.

(1) 여행을 통해 새로운 곳으로 건너 가려는 끈질긴 욕구와 기질

(2) 축적된 엄청나고 다양한 지식의 두께

(3)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사랑과 사랑하는 마음에서 발견된 문제 의식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고 싶은 사명감.

 

자신도 지난 겨울에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이 <걸리버 여행기>이다. 나는 최교수가 주관하는 " 읽고 건너가기" 따라가며 벌써 10 번째 류성룡의 <징비록> 읽고 있다. 생각하지 않는 삶에서 생각하는 삶으로, 대답하는 일에서 질문하는 일로, 전술적 사유에서 전략적 사유로 건너 가자는 것이다.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나는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속의 걸리버와 디지털 노마드즘을 통한 ‘신 귀족(노블레스 노마드)으로 건너가기>라는 인문 강의를 준비하고 있다.

 

그래 어제는 예전에 읽은 소설가 김영하의 산문 <여행의 이유> 다시 읽었다. 오늘 아침은 내용을 공유한다. 김영하에 의하면, 여행기란 본질적으로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해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여행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 형식이다. 주인공은 어딘가 곳으로 떠난다. 이런 이야기를 문학에서는 '추구의 플롯'이라 한다. 알다시피, <갈가메시 서사시>에서 주인공 길가메시는 죽지 않는 비결을 찾아 떠난다.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에서 주인공은 트로이전쟁을 끝내고 아내와 자식이 있는 고향으로 향한다. 주인공들은 험난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결말에 이르러 주인공은 원래 찾으려던 것과 전혀 다른 것을 얻는다. 대체로 그것은 깨달음이다.

 

많은 문학 작품과 영화 들에서 '추구의 플롯'으로 구축된 이야기 들에는 대부분 가지 층위의 목표가 있다. 주인공이 드러내 놓고 추구하는 외면적 목표와 주인공 자신도 모르는 추구하는 내면적 목표로 나뉜다. 이런 측면서 여행이란 여행을 통해 '뜻밖의 사실' 알게 되고, 자신의 세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마법적 순간' 경험하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 능력보다 높이 희망하며, 희망했던 것보다 못한 성취에도 어느 정도는 만족하며, 어떤 결과에서도 결국 뭔가를 배우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위에서 말했던 길가메시는 '불사의 비법' 대신 '죽음 피할 없다' 통찰을 얻었고, 오디세우스는 아무리 영웅이라 하더라도 한낱 인간에 불과하며, 인간의 삶은 매우 연약한 기반 위에 위태롭게 존재한다는 , 환각과 미망으로 얻은 쾌락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는 등을 깨닫는다.

 

여행은 신비롭다. 우리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실패와 시련, 좌절을 겪는다 해도, 우리가 안에서 얼마든지 기쁨을 찾아내고 행복을 누리며 깊은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다. 인생도 여행과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여행은 언제나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고역이다. 실제로 여행이라는 단어 'travel' 고대 프랑스어인 'travail'에서 파생한 것으로 추정한다. 프랑스어로 'travail' ', 작업, 노동'이라는 뜻이다. 영어에서도 아직 문어체로 '고생, 고역'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자기가 태어난 곳에 머물지 못하고 타향을 헤매는 것을 동서양을 막론하고 불행한 운명으로 여겼.

 

그러나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편안한 믿음 속에서 안온하게 살아갈 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난 이상, 여행자는 눈앞에 나타나는 현실에 맞춰 믿음을 바꿔가게 된다. 하지만 만약 우리의 정신이 현실을 부정하고 과거의 믿음에 집착한다면 여행은 재난으로 끝나게 것이다. '파리 증후군'(오타 히로아키)이라는 말이 있다. 오랫동안 품어왔던 멋진 화상과 그와 일치하지 않는 현실 사이에서 멀미하듯 혼란을 겪는다는 말이다. 반면 여행의 경험이 풍부한 여행자들은 눈앞의 현실에 맞춰 즉각적으로 자신의 고정관념을 수정한다. 멀미란 눈으로 보는 것과 몸이 느끼는 것이 다를 오늘 불일치 때문에 발생한다. 다르게 말하면 뇌의 예측과 눈앞의 현실이 다를 일어난다. 육체적 멀미도 있지만 정신적 멀미도 있다.

 

최근에 다시 발견한 산책로에서 찍은 오늘 아침 사진 처럼, 만발했던 벚나무 꽃이 풍장으로 쓰러졌다. 꽃들이 피고 지는 모습이 제 각각이다. 그런 모습 속에서 우리는 우리들의 삶과 죽음을 있다. 꽃은 피었으면 진다. 순리이다. 낙화가 없으면 녹음도 없고, 녹음이 없으면 열매도, 씨도, 그리하여 이듬해의 꽃도 없다. 그러니 우리도. 너무 현재를 붙잡으려 하며 추해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도 때가 되면 결별하고 여행할 알아야 한다.

 

 

여행은 때로/김재진

 

때로 여행은 그럴 때 있어라

낯선 이들 속에 앉아 맛없는 음식을 먹거나

보내기 싫은 사람을 보내야 할 때 있어라

지구의 반대편을 걸어와 함께 시간을 나누던

친구와 작별하듯 여행은 때로

기약 없는 이별일 때 있어라

 

닫혀진 문 밖으로 음악이 흐르고

때로는 마음이 저절로 움직여

 

모르는 여인을 안고 싶을 때 있어라

한때는 내 눈이 진실이라 믿었던 것

초처럼 녹아내려 지워질 때 있듯이

여행은 때로 행복한 도망일 때 있어라

 

음음음. 소리 내어 포도주를 음미하듯

눈감고 바라보는 향기일 때 있어라

숨죽인 채 들어보는 침묵일 때 있어라.

 

 

꽃들은 저 마나 피어나고 지는 모습이 다르다. 우리 인간들도 저마다 살다가는 길이 각각인 것처럼. 동백은 송이 개별 자로서 피었다가, 주접스런 보이지 많고 절정의 순간에 떨어지며 진다. 매화꽃, 벚꽃, 복사꽃, 배꽃은 풍장을 한다. 꽃잎 개가 바람에 흩날리다 땅에 떨어져 죽는다. 산수유는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 피었다가 노을이 스러지듯 살짝 종적을 감춘다. 나무가 숨기고 있던 지우개로 자신을 지우는 같다고 김훈은 묘사한 적이 있다. 나도 삶을 지우개로 지우고 싶은 부분이 있다. 산수유처럼. 그리고 길게 이야기 하고 싶은 꽃이 목련이다. 목련은 도도하게 피었다가 때는 지저분하다. 목이 부러질 듯이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치켜 올리며 뽐내다가 때는 남루하다.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한꺼번에 떨어지지 않고 조각들로 느리게 사라진다. 온갖 추한 모습을 보이며. “아무래도 그렇게는 돌아서지 못하겠다”(복효근) 것인가?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꽃과 만나고 이별하면서, 행복한 봄의 한철이 지나간다.

 

소설가 김영하는 번째로 여행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기대와는 다름 현실에 직면하고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은 어떤 것을 알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알게 되는 것이다. 최진석 교수는 < 읽고 건너가기> 토크쇼에서 " 자기를 만나게 해주는 중에 대표적인 것이 읽기, 쓰기, 운동 그리고 여행"이라 했다. 동의한다. 그리고 그는 또한 "여행과 독서는 똑같이 나를 생경한 다른 환경으로 몰아넣고서 흔들리게 다음, 결국 나를 만나게 한다" 말했다. 살면서, 중요한 것이 나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만난 자가 '자유로운 ' 한다. 여행지에서는 누구나 자유롭다.

 

<여행의 이유> 읽다가, 데이비드 실즈가 <문학은 어떻게 삶을 구했는가>에서 했다는 말이 눈에 잡혔다.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 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이다." 풀리지 않는 삶의 난제들과 맞서기도 해야겠지만, 가끔은 달아나는 것도 필요하다.

 

중국의 고대 병법서 <삼십육계> 마지막 부분은 "패전계" 적의 힘이 강하고 나의 힘은 약할 때의 방책이 담겨져 있다. 서른여섯 계책 중에 서른여섯 번째, 마지막 계책은 '주위상(走僞上)'으로, 불리할 때는 달아나 후일을 도모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삼십육계 줄행랑'이라고 하는 말이 여기서 것이라 한다.

 

리베카 솔닛의 흥미로운 이야기도 알게 되었다. 그는 걷기와 방랑벽에 대한 에세이에서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생각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방랑하지 않을 없다고 적고 있다 한다. 철학자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들, 이를테면 사상은 옥수수 같은 곡물과 달리 안정적인 수확을 기대하기도 어렵고 모두가 좋아하는 것도 아니어서 한곳에 머물기 어렵다는 , 인맥이나 터전에 얽매인 직업, 대표적으로 정치인이나 농민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소설가 김영하는 말한다. "발상은 무게가 없다. 지혜도 그렇다. 기술도 마찬가지. 그래서 이런 무형의 자산을 가진 사람은 어딘 가에 붙들려 있을 필요가 없다.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먹고 살기에 유리했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식인은 '노마드(유목민)'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노마드는 초원에서 이동하며 사는 유목민을 뜻한다. 들뢰즈가 썼던 용어이다. 노마드의 생활 철학을 '노마디즘'이라 한다. 노마디즘은 기존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불모지를 옮겨 다니며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일체의 방식을 의미하며, 철학적 개념 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의 문화 심리 현상을 설명하는 말로 쓰인다.

 

이 노마드라는 말에 4차 산업혁명의 기속화로 디지털 문화가 발전하면서 이제는 '디지털 노마드'라는 말도 나왔다. 자크 아탈리는 자신의 책 『호모 노마드-유목하는 인간』을 통해 "21세기는 디지털 장비로 무장하고 지구를 떠도는 디지털 노마드 시대"라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