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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어제의 나'에서 '내일의 나'로 변화시키는 힘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마음에 상처"를 입었지만, 오늘 아침 사진을 보며, 생각의 크기를 키우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 다 보며, 나는 질문하고 답하여 보았다. '나는 누구인가?' 질문은 해답을 요구한다. 그러나 위대한 질문은 해답을 당장 요구하지 않는다. 위대한 질문을 지니고 다니면서 그 해답을 찾는 일이, 어쩌면 우리가 사는 삶일 수 있다. 따라서 질문(質問)은 삶의 질을 고양시키기 위한 관문(關問)이다. '질문'의 '질(質)'자가 '삶의 질'을 말할 때 그 한자이고, 문(問)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통과할 때 물어야 할 그 물음인가? 지난 글들은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된다.

오늘 입은 마음의 상처/황동규

사람 모여 사는 곳 큰 나무는
모두 상처가 있었다
흠 없는 혼이 어디 있으랴?
오늘 입은 마음의 상처
오후내 저녁내
몸 속에서 진 흘러나와
찐득찐득 그곳을 덮어도 덮어도
아직 채 감싸지 못하고 쑤시는구나
가만,
내 아들 나이 또래 후배 시인 랭보와 만나
잠시 말 나눠보자
흠 없는 혼이 어디 있으랴?

인간은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규격화된 질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외부의 질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이걸 한 마디로 '자문(自問)'이라 한다. 나는 왜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려 하는가? '자문'은 진실되다. 자문은 핵심을 묻는다. 제면이나 과시를 제거하고 자신에게 꼭 필요한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삶을 숙고(熟考)하는 사람만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다. "숙고하지 않는 삶은 살만 한 가치가 없다"고 말한 소크라테스의 말이 이해가 된다.

인간의 주관성이 개입할 수 없는 객관적인 진리 속에서 정답을 찾는 자연과학적 사유와는 달리, 인문학적 사유는 정답이 없는 주관성이 개입된다. 예컨대, 사형제 폐지에 대한 생각의 경우 정답이 없다. 다만 이에 대한 각자의 견해가 있고, 우리는 그 견해가 풍요로운지, 나름대로 정교한 논리와 증거를 가지고 있는지를 따진다. 왜냐하면 풍요로운 사유와 정교한 논거를 갖춘 내 생각을 가져야 내 삶을 주체적으로, 내 삶을 내가 주인공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내가 택한 방식은 글쓰기와 토론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안 되는 것은 일제 식민지 교육 문법을 아직도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린 학교에서 주입식 암기 교육을 받았고, 그 방식은 아직도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비뚤어지면, 창피한 줄도 모르고, 쉽게 말하고 행동한다. 모과나무처럼, 심사가 뒤틀렸으면, 이목을 끌지 않고 조용히 있었으면 한다. 아니면 지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다른 사람이 해 놓은 생각의 결과들을 수용하고, 해석하고 확대하면서 자기 삶을 꾸리는 사람은 지적으로 게으른 사람이다. 지적 '부지런함'이란 단독자로 자신의 개성을 유지하고 독립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따라 하기'의 '편안함'과 '안전함'에 빠지지 않고, 다가오는 불안과 고뇌를 감당하며 풀릴 길이 보이지 않는 문제를 붙들고 계속 파고 들어가 가능해지도록 '틈'을 벌리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대답에만 빠지지 말고, 질문하는 사람이 지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이다.

질문(質問)이란 한자는 내가 오늘이라는 숙명적인 과정의 문을 통과하기 위해 내가 반드시 지녀야 하는 가치이다. 그것이 '질(質)', 바탕이다. '질(質)'은 남들도 다 확인할 수 있는 '양(量)'이 아니다. '질'은 내가 스스로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 원칙이자 바탕이다. '질'은 보이지 않는 나만의 내공이다. 보통 사람들은 수량에 환호하지만 자신만의 전설을 찾아 나선 인간은 '질', 바탕을 다듬는데 하루를 사용한다. 한자로 '질(質)'이란 두 손에 도끼날과 같은 정교한 정과 망치를 들고 자신만의 패물을 만드는 일이다.

'어제의 나'에서 '내일의 나'로 변화시키는 힘은, 내가 오늘 아침에 결정한 결심과 그것을 이루려는 연습이다. 그 연습은 내 삶을 어떻게 끌고가야 할지 질문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민한다. 사회가 주는 명칭은 나의 군더더기이다. '강요된' 사회적 거리, 아니 물리적 거리두기가 수요일 21대 국회의원 선거를 거치면, 이번 부터 좀 풀릴 거다. 그래 오늘 아침 이런 생각들을 해 본다. 코로나 19 이후에는 시선을 외부에 두지 말고, 나의 내면을 찾는 시간을 많이 가질 생각이다. 나도 잘 알지 못하는 내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고 탐구하여 발견하는 시간을 좀 더 가질 생각이다. 평상시 그저 생각하던 습관을 바꿔, 두 번 생각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미래의 나의 모습에서 관조(觀照)하는 시간을 좀 더 가질 생각이다.

나 자신, 즉 내가 나의 행복과 불행을 초래하는 유일한 자이다. 행복과 불행은 외부에 의해 나에게 우연히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내 생각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행복과 불행은 내 행위가 가져다 주는 결과이다. 인간은 행위의 결과인 행복과 불행을 막을 수 없다, 행복과 불행을 야기하는 행위를 수정하기 위해서는 내 생각을 바로 잡아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행위를 결정하는 원인인 생각을 훈련시키는 노력이다. 생각을 훈련한다는 것은 본성을 개조하는 일이며, 개성을 주조하는 작업이다. 어제의 자신을 정복하고 초월하는 가운데, 힘이 생기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데서 환희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신의 생각으로 운명과 개성이 결정된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의 크기만큼, 위대해 지던지 시시해 지던지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생각하는 훈련을 통해 생각의 크기를 키워야 한다. 이기심, 욕심 그리고 열망으로 가득한 사람은, 높은 차원의 사고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질문과 해답을 찾지 못해 좌절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생각의 크기를 키우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 다 보아야 질문하고 답한다. 오늘부터 그런 질문하는 법을 생각해 본다. 한근태의 『고수의 질문법』 을 읽으며 질문하는 법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배우는 것이다. 이 책의 부제는 "최고들은 무엇을 묻는가?"이다. 월요일 오늘 아침의 질문은 총선에서 누구를 찍느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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