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인문정신을 갖는다는 것, 인문적으로 산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완성된 이론을 내면화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기가 처한 상황, 그곳에서 자기 눈으로 발견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덤비는 인문적 활동으로 일상을 채우는 것을 말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대답하는 삶에서 질문하는 삶으로 건너가는 일이다. 이론을 숙지하는 삶에서 문제에 빠져드는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뇌(특히 좌뇌)는 항상 재잘거린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뭔가를 떠들어 댄다. 그러면서 생각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래 우리는 이 산만함에 맞서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것이 수렴과 집중이다. 요즈음 자신의 힘을 절제하지 못해, 원심력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잔뜩 먹기만 하고, 발산하지 못해서 그렇다. "그런 사람은 중독을 유발하여 결국 자신을 파멸시키는 쾌락, 자극, 새로운 것을 항상 하이에나처럼 찾아다닌다. 쉽게 웃음과 울음을 자아내는 촌극을 감동이라 평가하고, 세네카의 구심력 찬양 문구인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건배사로 착각하고 니체의 고통을 삶의 일부로 수용하라는 혜안인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노래방 춤쯤으로 여긴다. 원심력에 경도되어 있는 사람은 힘이 없고 불안하고 산만하다." 배철현의 <매일묵상>에서 읽은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몇 일전부터 나도 산만하다.
반면, 원심력을 구심력으로 제어하기 위해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힘이 있다. 그런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원심력의 과시를 희생하여야 한다. 나는, 이 구심력과 원심력의 조화를 위해, 아침 마다 <인문 일기>를 쓴다. 자꾸 밖으로만 출렁이는 생각과 본능에 영향을 받는 사람은 무기력하지만, 그것들을 제어하고 조절하여, 그 힘을 비축하는 사람은 강력하고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그 원심력을 제어하고 조절하는 힘은 인문정신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산만한 날에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소환한다. 지난 해, 최진석 교수의 제안으로 다시 <노인과 바다>를 읽었다. 그리고 그의 <대담>과 독후감을 읽고, 내 생각을 정리해서 공유했던 적이 있다. 헤밍웨이는 어부 노인 산티아고를 "그에 관한 모든 것은 눈을 제외하곤 전부 노후했는데 두 눈은 바다 색깔을 띠고 기운찼으며 패배를 모르는 듯했다"고 묘사했다. 이런 눈 빛을 가지고 당당하게 존재하는 자들에게는 향기가 난다. 그리고 그 향기에 취해 궁극의 신뢰를 보여주는 사람이 출현한다. 최교수는 공자가 말한 "덕불고 필유린"을 말했다. 자신으로 당당하게 존재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웃이 있다. "자신이 자신으로 되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동조자가 있다"는 말이다.
노인 산티아고에게 동조자는 소설 속에서 마놀린이라는 소년이다. 소설 속에서 노인은 소년에게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 그렇지 않니?"말을 한다. 최교수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인간은 무게 중심이 낮게 장착되어 흔들림이 없"고 "아마도 '지금 여기'를 버리고 먼 곳의 결말에만 희망을 걸지는 않을 것이다. '나'를 소홀히 하면서까지 '우리'에 집중하지 않을 것이다. 공을 잘 치려면, 공이 맞는 '여기'의 순간에 집중해야지 공이 도달할 먼 '저기'를 먼저 보려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소설 <노인과 바다>에 이런 문장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매일 매일은 새로운 날이지. 운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만, 우선은 지금 하려는 일에 집중하겠어. 그러면 운이 찾아 왔을 때 준비가 되어 있을 테니" 매일 매일이 똑같은 일상을 사는 우리들에게 큰 힘이 되는 말이다. "우선은 지금 하려는 일에 집중하겠어." 그게 일상을 지배하는 일이다. '운'은 자신이 자신으로 되어 있는 사람, '운(運)'의 세계에서 '명(命)'의 세계로 건너 온 사람에게만 찾아 오는 선물이다. 그래 현재를 '선물(present)이라는 말과 같이 쓴다. 그러니까 오늘은 자신의 소임, 즉 명을 아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최 교수는 노인 산티아고와 소년 마놀린 사이의 신뢰, 아니 '믿음'에 주목을 했다. 다른 이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면 불행하다. 그리고 자기 삶을 살며, 자기 자신을 믿어야 행복하다. 그렇지 못하면, 불행하다. 믿음, 신뢰는, 최교수의 말처럼, "문명을 유지하는 가장 큰 힘이다." 85일 만에 청새치를 잡은 산티아고의 행운도 바로 이 신뢰애서 비롯되었다. 85일째 되는 날 아침, 바다로 나가기 전에 노인은 "오늘은 자신 있다"고 중얼거리며 또 배를 탄다. 나이 들어도 삶이 팍팍하고 이룬 것 하나 없다는 허탈감에 시달릴 때면, 나는, 산티아고 노인처럼, "내일은 없다. 오늘이 좋습니다"(나의 멘트라)를 외칠 것이다. 그러면서 오늘 다시 힘 낼 것이다. "삶은 투쟁이다. 겉모양만 다듬는 투쟁으로는 진짜처럼 살다 가기 어렵다. 겉모양이 아무리 깨져도 심장 가까이서 심장 안을 기웃거리는 그 무엇"(최진석)을 찾아서, 나는 <노인과 바다>를 새로운 감각으로 다시 또 읽었던 것이다.
어제는 <뱅샾>을 찾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밖은 비가 어설프게 내렸다. 뭐 그런 날도 있는 것이다. 세상이 매일 날씨가 좋으면, 사막이 된다. 프랑스 정신은 영화에서 해피 엔딩을 추구하지 않는다. 삶은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 거다. 그리고 인생의 끝은 헐리우드 영화처럼 항상 좋게 끝나지 않는다. 그게 삶이라고 본다. 셀라비. C'est la vie. 신은 한 쪽 문이 닫히면, 다른 한 쪽 문을 열어 둔다. 그런 시를 한 편 공유한다. 아침 사진은 작년에는 해거리를 했던 우리 동네 앵두나무이다. 올해는 어김 없이 빨간 앵두가 다닥다닥 열렸다. 자기를 지키고 기다리면 된다.
쓸쓸하고 더딘 저녁/황동규
이제 컴퓨터 쓰레기통 비우듯
추억 통 비울 때가 되었지만,
추억 어느 길목에 서고
나보다 더 아끼는 사람 만나면 퍼뜩 정신 들곤 하던
슈베르트나 고흐
그들의 젊은 이마를
죽음의 탈 쓴 사자使者가 와서 어루만질 때
(저 빠개진 입 가득 붉은 웃음)
그들은 왜 비명을 지르지 않았을까?
밀밭이 타오르고
밀밭 한가운데로 달려오는 마차가 타오르고
사람들의 성대聲帶가 타오를 때
그들은 왜 몸을 헤픈 웃음에 허술히 내주거나
몸을 피스톨 과녁으로 썼을까?
'왜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재빨리
빠져나가고 싶어했는가?
시장 인심이 사납던가,
악보나 캔버스가 너무 비좁던가?
아니면 쓸쓸하고 더딘
지척 빗소리가 먼 땅 끝 비처럼 들리는 저녁이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던가?'
이어지는 글은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으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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