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몇 일동안 내 화두는 세속주의이다. 영어로는 secularism이라 한다. 세속주의자들은 여러 가지가 뒤섞인 정체성에 익숙하다. 이들이 생활방식에서 중시하는 것은 진실과 연민, 평등, 자유, 용기, 책임의 가치이다. 이런 가치에 대해 말은 많이 들어 보았지만 우리는 잘 설명하지 못한다. 그만큼 잘 모른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은 그 두 번째 연민(compassion)의 가치에 대해 생각을 공유한다. 연민의 사전적 정의는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김"이다. 쉽게 말하면, 다른 사람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마태복음 25장 40절을 보자. “내가 너에게 말하겠다. 너희들이 내 형제와 자매들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 연민이라는 단어의 compassion은 com+passion이다. 여기서 com은 '함께'라는 접두어이고, passion은 '정열'이라는 뜻이지만, 대문자로 Passion하면 '예수의 수난'을 말한다. 연민(compassion)은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와 같은 말이다. 오늘도 지난 3월 25일부터 시작된 기독교의 사순절 시기이다.
다른 생명을 돌보지 않는, 특히 나보다 더 힘든 그리고 약한 사람을 돌보지 않는 세상은 봄이 와도 춥고 쓸쓸하다. 내가 좋아하는 우리 동네 권선필 교수의 페북에서 만난 문장이다. "세상과 이웃을 돌봐야 할 이들은 온통 다른 그 누구만 떠올린다. 그가 돌봐야 한다고. 조금 더 지적인 사람은 제도와 구조를 가지고 복잡하게 설명한다. 이웃과 생명에 대한 책임에 대하여. 선이 비워진 자리엔 악이 그득하고, 그 악은 제가 막인 줄 모른 채 삼킬 자를 찾기에 바쁘다. 서로를 돌보지 안는 세상은 그렇게 더욱 춥고 쓸쓸해 진다."
나는 어떠한 가? 나는 적어도 '삼킬 자'를 찾진 않는다. 주변의 모든 이들이 다 사랑스럽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공간과 시간에서만 신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주변의 ‘낯선 자'를 무시하거나 적대시하고 ‘지극히 작은 자’를 피한다. 낯선 자중 ‘지극히 작은 자’는 나의 손길이 필요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며 생명들이다. 이들은 내 안에 존재하는 '자비’를 일깨우기 위해, 스스로 고통을 짊어진 생명들이다. 내가 그들의 고통(passion)에 공감하여 내 안에 숨겨진 자비(compassion)를 일깨우면, 그 ‘지극히 보 잘 것 없는 대상’이 예수가 된다. 그리스도교가 지난 2000년동안 생존한 이유는 이 단순하지만 감동적이며 강력한 명제 때문이다. 배철현 선생이 늘 이렇게 말한다.
다시 유발 하라리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그에 의하면, 세속주의 도덕률은 이런저런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깊이 헤아리는 '연민'에서 나온다. 예컨대, 살인은 외부로부터 온 금지된 행동이 아니라, 지각 있는 존재에게 막대한 고통을 끼치기 때문에 금지한다. 세속주의자들은 딜레마에 직면하면, "신이 뭐라고 명령하는가"라 묻는 대신, 관련된 당사자들의 느낌을 신중히 저울질하고 폭넓게 관찰하고 가능성을 검토해서 피해를 최소화할 타협책을 찾는다. 예컨대, 동성애자 문제를 바라보는 세속주의자들의 의견은 이렇다. 건강한 관계에는 감정적인 차원과 지적인 차원뿐 아니라 영적인 깊이까지 필요하다. 세 가지가 균형을 이루는 관계가 필요하다. 두 남녀의 결혼에 그런 깊이가 없으면 불만스럽고 외로울 뿐만 아니라, 정신도 더 성장하지 못한다. 두 부부사이에서도 서로 정신적으로 성장시키지 못하면, 불만스러울 수 있다. 어쨌든, 유발 하라리에 의하면, 인류가 직면한 커다란 질문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고통에서 벗어나느냐'이다. 고통이 유일한 실체이며 우리는 그것을 최대한 피하거나 줄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모두의 고통을.
현대 경쟁 사회에서 우리의 모든 활동을 지배하고 있는 삶의 작동 기제가 '더 높이, 더 빨리, 더 멀리'이다. 올림픽에서 외치는 것처럼. 사람들은 더 높은 자리를 찾거나, 더 높은 성공의 열차에 타려고 발버둥친다. 과학 기술도 기하급수적인 속도 빨라지고 있다. 기업들은 더 먼 데까지 새 물건을 갖고 달려가기 위해 경쟁한다. 이런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 세속주의적 인문정신이다. 그것은 올림픽 정신과 그 반대에 있다. "더 낮게, 더 느리게, 더 가까이' 세상과 사람들에게 다가 가려는 노력이다. 그러니까 세속주의적 인문정신은 소외된 자리를 향하는 연민의 마음으로 낮은 곳을 바라보는 일이고, 느긋하게 자신을 관조하고 성찰하는 일이고, 세계와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관계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친화력이다. 이런 정신이 사회에 바탕으로 깔려 있어야 선진 사회가 된다. 그러니까 선진사회는 선진문화가 뒷받침되어야 하고, 선진문화는 세속주의적 연민이 담긴 인문정신이 밑에 배어 있어야 한다. 산업화나 민주화는 선진사회를 위한 전제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오늘 공유하는 시는 말놀이 같지만, 시에 깔려 있는 연민의 눈이 돋보인다. 연민은 가시가 없고 넘치지 않으며 언제나 둥그스름하다. 늘그막에 늘 ‘그럼그럼’ 고개를 끄덕이고 ‘그렁’한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늙음/최영철
늘 그럼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
늘 그럼그럼 어깨를 토닥여주는 것
늘 그렁 눈에 밟히는 것
늘 그렁 눈가에 맺힌 이슬 같은 것
늘 그걸 넘지 않으려 조심하는 것
늘 그걸 넘지 않아도 마음이 흡족한 것
늘 거기 지워진 금을 다시 그려 넣는 것
늘 거기 가버린 것들 손꼽아 기다리는 것
늘 그만큼 가득한 것
늘 그만큼 궁금하여 멀리 내다보는 것
늘 그럼그럼
늘 그렁그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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