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0.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2021년 4월 7일)
오늘은 서울과 부산에서 시장 보궐선거가 있는 날이다. 선거 결과가 어떻든 간에, 최근의 상황을 보면 좀 실망스럽다. "열심히 달려왔는데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한 것 같은 무력감과 좌절감이 미세 먼지처럼 자욱하게 우리 마음에 내려앉아"(이진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 보면, 그렇지는 않다. 조금씩 진보하고 있다. 지난 월요일 <인문 일기> 에 이어지는 글이다. 지난 글의 댓글에 "보통 사람으로서 대안이 먼지 궁금하네요"가 있었다. 나도 잘 모르지만, 그냥 도산의 다음 말로 답을 찾고 싶다.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도산의 말을, 혁명을 하려면 나부터 혁파를 하여야 하는 것처럼, 세상을 구하기 전에 나를 우선 구하는 일이 앞서야 한다는 말로 이해 한다.
지난 글에서 말했던 세 문장 (1) "역경을 이기긴 쉬워도 풍요를 이기긴 어렵다." (2) “자기가 가진 것을 사랑하면 행복하고 못 가진 것을 사랑하면 불행하다.” (3) "사람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 중에서, 오늘 아침은 (3)을 이야기 하려 한다.
내가 좋아하는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은 이런 예를 들면서 위의 말을 했다. "25년 전쯤 라디오에서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으로 문장을 만들어보라는 진행자의 주문에 한 청취자가 “일본은 독도가 그려진 지도는 가질 수 있으나 독도는 가질 수 없다"고 재치 있게 답해 우승을 차지했다. 그 구별을 잘해 야 행복하다. 그런데 사람들이 상징 자본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해주는 ‘아비투스’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직업적 정체성이 강한 사람은 직업 윤리도 엄격하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던 민주화 엘리트들의 약속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지탱하는 정신적 권위의 몰락과 민주주의 시스템의 붕괴로 돌아왔다.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해야 할 지식인, 언론, 시민운동가, 학자들은 침묵을 넘어 부끄러움도 없이 어용과 사쿠라를 자처한다. 그 결과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말한 강한 국가·강한 사회는 붕괴되고 있으며 공동체는 해체되고 있다. 극단적 진영 정치는 한국 사회의 민 낯을 드러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정치 질서의 기원>에서 씨족 국가가 부족 국가로 발전하고, 부족 국가가 도시 국가로 발전한 것은 동서양이 같은데 “중국은 기원전에 통일을 이루었는데 왜 서양은 19세기까지 분열되었을까"라는 도발적 질문을 던졌다. 그는 국가 건설의 경로를 가른 중요한 이유로 종교를 들었다. 서양에서는 제사장이 왕권을 제약했다. 오래도록 황제의 권력도 교황에 의해 견제됐다. 반면 중국의 ‘천자'는 황제와 교황의 권력을 모두 갖고 있었다. 훗날 서양에서는 법이 종교의 자리를 대신하면서 근대 정치제도의 3요소인 국가, 법치주의, 책임정부를 통해 ‘강한 국가'를 구축했다. 그러나 중국이나 조선은 가부장제가 만든 가산제 때문에 ‘강한 사회를 구축하지 못해 ‘강한 국가'로 나아가지 못했다. 박성민으로부터 좋은 것을 배웠다.
가산제에서는 군주가 국가를 마치 자신에게 세습되는 자산과 같이 여기고 통치 한다. 이러한 체제에서 군주는 모든 국사를 자신의 개인적인 업무로 생각한다. 관료들은 지배자의 가신이며 그의 독단적인 권력에 복종한다. 또한 지배자는 군사력도 마음대로 좌우한다. 가산세에서는 군주가 개인적 인정에 치우쳐 가지 가족과 친지에게 특혜를 주려는 성향이 강하다. 이러한 성향은 워낙 내재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이를 제어하는 강력한 유인이 없는 한 계속 확산된다. 가산제에서 특권을 가진 그룹은 군주 뿐만 아니라 소수의 귀족, 관료 엘리트 등까지 확대될 수 있다. 이 그룹이 지속적으로 그 특권을 누린다면, 이들을 가산제 엘리트라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정병석의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에서 얻어온 생각이다.
고대 이스라엘은 ‘기름 부음을 받은’ 왕, 제사장, 선지자의 권위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었다. 물질적 권위와 정신적 권위가 분산되었다. 오늘날 왕은 세속적 권위, 즉 기업인, 정치인, 군인, 관료 같은 사람이다. 제사장은 종교인, 법조인이다. 선지자는 언론인, 학자, 작가, 시민운동가 등 지식인이다. 강한 국가를 지탱하는 강한 사회는 돈, 권력, 도덕(지식)의 권위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오늘은 세상을 더 넓고 보는 이론들이 4 가지나 나온다. 복잡하다. 그러니 지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은 잘 구분하는 사람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득 이론,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정치 이론, 한국 철학의 공부한 오구라 기조의가 말하는 리(리) 그리고 짐 콜린스의 통찰을 나누어 이해해야 한다. 오늘 아침 시는 반칠환 시인의 것을 택했다. 요즈음 너무 좋은 봄날들이라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이 많다. 오늘 아침 사진도 어제 종합 건강 검진을 마치고 나와 도시를 어슬렁거리며, 산보 하다가 만난 꽃이다. 너무 맑다. 고운 햇빛이 뒷배경이다.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반칠환
보도블록 틈에 핀 씀바귀 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오구라 기조는 위의 책에서 이런 이야기도 했다. “한국은 도덕 지향성 국가다. (…) 그렇다고 해서 한국인이 언제나 도덕적으로 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도덕 지향성'과 ‘도덕성'은 다른 것이다." ‘도덕 지향성'은 사람들의 모든 언동을 도덕적으로 환원하여 평가한다. 유교에서는 도덕과 권력과 부는 이상적으로는 삼위일체여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절망적일 정도로 불가능에 가깝다. 왜냐하면 도덕은 권력과 부와 결합되는 순간 쉽게 부도덕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도덕 쟁탈전이 전개된다. 이것은 도덕을 내세워 권력을 잡은 세력이 얼마나 도덕적이지 않은가를 폭로하는 싸움이다. 오구라 기조의 주장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 이유가 "정신적 권위와 물질적 권위를 모두 가지려고 하는 것은 조선(한국)이 ‘하나의’ 이(理)를 장악한 세력이 도덕, 권력, 돈을 모두 차지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쟁투에서 이기면 모든 것을 얻고, 지면 모든 것을 잃는다." 박상민도 한국의 '586 민주화 엘리트들'이 ‘적폐 청산’ 같은 도덕적 슬로건에 사활을 거는 이유도 여기 있다고 본다.
에토스가 무너지면 로고스, 파토스도 힘을 잃는다. 메신저가 신뢰를 잃으면 메시지는 들리지 않는다. 앨버트 허시먼은 에서 기업이나 조직, 국가가 퇴보할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를 연구했다. 조직이 싫으면 남아서 항의하거나, 떠나거나, 아니면 충성하거나 셋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정당도 마찬가지다. 선거는 항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대안을 찾아 이탈하고, 대안이 없더라도 기권함으로써 투표로부터 이탈할 수 있다. 2017년에는 중도보수가 보수 정당으로부터 이탈했는데 지금은 중도진보가 민주당을 떠나고 있다. 민주당의 에토스가 무너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박성민의 주장이다.
에토스(ethos), 로고스(logos), 그리고 파토스(pathos). 이 세 가지 수사학적 용어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에토스는 말하는 사람이 일상의 습관에서 나오는 언행이며, 로고스는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이성적인 판단과 대화다. 파토스는 그 사람에 대한 평판에서 나오는 아우라다. 파토스는 흔히 '감동'이라고 번역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 가지 중 '에토스'를 가장 중요한 수사 능력일 뿐만 아니라, 온전한 인간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다. 에토스는 로고스와 파토스를 구현하기 위한 기반이다. 에토스는 마치 어머니의 자궁과 같아서 로고스와 파토스가 자라나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성장하도록 돕는다. 우리는 흔히 '에토스'를 인격(人格)이나 품격(品格)으로 번역한다. 에토스는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만일 누가 인격이 훌륭하다고 말할 때, 그 인격은 무형이다. 만일 누가 품격을 지녔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의 품격을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좀 쉽게 말하면, 설득은 에토스가 파토스나 로고스보다 더 중요하다. 이런 말이다. 사람들은 화자를 신뢰해야만 설득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런 식이다. 내가 그를 좋아하고 신뢰한다면, 1) 말하는 그 사람이 비록 설득력이 떨어지고(로고스의 부족), 2) 말하는 그 사람이 예민하게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도(파토스의 부족) 그 사람에게 설득될 수 있다.
박성민 칼럼을 그대로 공유한다. "민주당 박용진 의원은 우석훈 교수, 김세연 전 의원과의 대담 집 <리셋 대한민국>에서 “근대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중요한 작동원리가 삼권분립인데 그중 사법부는 과거에 벌어진 사건들을 심판하고, 행정부는 현재의 일을 처리하고 오직 입법부, 즉 정치만이 내일을 준비하면서 미래에 대한 제도를 마련하는 일을 한다”고 했는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세계가 우주 이주를 말하는데 우리는 100년 전 토착 왜구와 빨갱이 타령이다. 미래에 대한 통찰도 없고,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없으니 과거를 놓고 싸운다. ‘조국 사태'로 도덕적 상징 자본을 잃었고, ‘LH 사태'로 적폐 청산의 유통기한도 끝났다. 역사학자 E H 카는 “필연은 우연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고 했는데 LH 사태는 이미 널리 퍼진 유증기에 불을 붙였을 뿐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3년 동안은 야당이 정권을 비판하면 “다 맞는 말인데 당신들이 할 말은 아니지"라는 반응을 보였던 사람들이 지금은 국민의 힘 오세훈·박형준을 비판하는 민주당에 그 말을 그대로 돌려준다. 에토스가 무너지면 로고스, 파토스도 힘을 잃는다. 메신저가 신뢰를 잃으면 메시지는 들리지 않는다."
박성민 칼럼니스트의 결론은 이 거다. "지난 총선 압승으로 ‘주류 교체 전쟁'에서 결정적 승기를 잡은 듯 보였던 민주당이 불과 1년 만에 상징 자본을 다 잠식당하고 다시 광야로 내몰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조국 사태'로 도덕적 상징 자본을 잃었고, ‘LH 사태’가 터지면서 적폐 청산의 유통기한도 끝났다."
경영전략가 짐 콜린스는 『위대한 기업은 다 어디로 갔을 까』라는 책에서 강하고 능력 있는 기업의 몰락을 다음과 같이 5단계로 설명했다. 이는 기업 뿐만 아니라, 조직이든 개인이든 모두에게 적용되는 설명이다.
1단계: 성공으로부터 자만심이 생겨나는 단계
2단계: 원칙 없이 더 많은 욕심을 내는 단계
3단계: 위험과 위기 가능성을 부정하는 단계
4단계: 공포와 절망 속에서 구원을 찾아 헤매는 단계
5단계: 유명무실 해지거나 생명이 끝나는 단계
이런 5단계에 이르지 않으려면 필요한 것이, 시대의 흐름을 읽는 '통찰'과 자신을 향한 '성찰'이다. 3단계에서 위기를 극복하려면, 위기에 동의해야 한다. 그래야 원인도 찾고 해결책도 찾을 수 있다. 위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물론 그 이전에 자만하지 말고, 더 욕심을 내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오만은 다른 사람과 상호 관계를 형성하지 않고, 정서적 유대감도 없이 자신의 세계에 갇혀 지내게 하기 때문이다. 오만은 일종의 자폐증을 만들어 준다. 성공에 너무 취하지 말아야 한다.
박성민의 지적에 의하면, "민주당은 3단계를 넘어 4단계로 진입 중이다. 국민의 힘도 여전히 4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다. 다시 주류 권력을 향한 새로운 도덕적 쟁투가 시작되려고 한다." 우리 개인의 삶에도 적용되는 이야기라 다시 공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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