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데 평생을 바치신 마더 테레사 수녀님이 수녀회에서 일할 사람을 뽑는 기준은 하나였다.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나요"였다.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로 답답하게 집에만 있지만, 잘 먹고, 잘 자고, 가족들과 잘 웃고 있다면, 괜찮은 거다. 거리의 봄꽃들은 코로나 19를 무서워 하지 않고 자기 할 일을 척척 한다. 떠날 때 떠나고, 등장할 때 시간 맞추어 제 때 등장한다. 꽃들은 저 마나 피어나고 지는 모습이 다르다. 우리 인간들도 저마다 살다 가는 길이 제 각 각인 것처럼. 동백은 한 송이 개별 자로서 피었다가, 주접스런 꼴 보이지 많고 절정의 순간에 뚝 떨어지며 진다. 매화꽃, 벚꽃, 복사꽃, 배꽃은 풍장을 한다. 꽃잎 한 개 한 개가 바람에 흩날리다 땅에 떨어져 죽는다. 오늘 아침 사진 처럼.
오늘 아침도 에피쿠로스 이야기를 통해 코로나 19의 극복 방법을 찾아본다. 인문운동가의 입장에서 말이다. 어제 아침에 말했던 것처럼, 인간에게는 세 가지 욕망이 존재한다. (1) 자연스럽 필요한 욕망: 인간의 생존을 보장하는 기본적인 욕망으로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 (2) 자연스럽지만 불필요한 욕망: 식탐이나 성적 욕망과 같은 감정들. 이런 감정들은 소유하면 할수록 더욱더 갈망하게 만들기 때문에 수련을 통해 제어해야 한다. (3) 자연스럽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은 욕망: 명예와 권력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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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말했던 거처럼, 생존에 필요하고 자연스러운 먹고, 마시고, 자는 것은 쉽다. 반면 명예와 권력을 얻기는 쉽지 않다. 선한 것은 단순하고 검소한 음식과 거주지이다. 이런 것들은 부와 권력과는 상관없이 조금만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선한 것은 얻기 쉬운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가 자연스럽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는 욕망을 지나치게 추구하다가,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 코로나 19 이후의 삶에서는 욕망을 절제하여야 한다.
욕망이란 말을 한문으로 써보면 이렇다. 欲望. 이 말은 '한 모금이면 자신의 목을 축일 수 있는 충분한 양의 물인데, 계곡(溪谷)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물을 마시겠다고 크게 입을 벌리는(하픔 欠)는 마음'이다. 우리는 그런 순간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쾌락주의자'라 부른다. 그러나 쾌락주의 창시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는 오히려 '쾌락주의자'라기 보다는 '금욕주의'에 가깝다. 위에서 본 것처럼, 그는 '욕망'이란 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했던 의사였다. 그는 말하였다. "불행은 두려움이나 허영 그리고 절제가 없는 욕망으로부터 나온다. 만일 사람들이 이 감정들을 제어할 수 있다면,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자가 될 뿐만 아니라 세상을 관조하는 행복한 삶을 즐길 수 있다."
'선한 것은 얻기 쉬운 것이다'라는 말은 생존에 필요한 검소한 삶을 의미하며 평온을 유지하기 위한 관조하는 삶을 뜻한다. 관조하는 하는 삶을 강조했던 그리스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는 우주와 인간의 삶을 두 개로 구분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아름다움과 추함은 서로 섞일 수 없는 독립적이며 개별적인 개체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이런 구분은 생각에서만 존재하는 허상이라고 믿었다. 인간의 삶을 조절하는 중요한 가치와 해악의 구분은 모호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과 악의 경계는 희미해서, 그것은 구분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만일 A라는 사람이 악인이라면, 그는 악의 화신이 아니라, 그 사람에서 악이 차지하는 비율이 선이 차지하는 비율보다 높은 것이다. 단지 51% 대 49%일 수도 있다. 또는 B라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라면, 그는 자신으로부터 나쁜 요소들을 제거하길 힘쓰고, 선을 지향하는 과정 중에 있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두개의 대립되는 가치의 정도와 경중을 깊이 관찰하고 측정하는 과정을 '쎄오리아(theoria)'라고 했다. 이를 우리 말로 하면 '관조(觀照)'이다. 이것은 사물을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어제의 관습대로 보지 않고, 그 대상 자체로 보려는 시도를 말한다. 이 그리스어는 영어의 '씨오리(thory)'가 된다. 한국 말로는 '이론(理論)'이라 한다. 그러니까 이론은 '한참보기'란 인내를 통해, 그 대상 그 자체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섬광을 포착하는 행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을 항상 제 3자가 되어 관찰하는 행위를 최고의 삶으로 여겼다.
이러한 관조를 통해,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 삶의 최선인 '아레테'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아레테라는 말은 자연의 운행원칙으로 항상 그렇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자신의 자리를 정확하게 찾아 조용히 정진하는 자연스런 습관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아레테(덕)'를 부족과 과잉의 중간 지점, 즉 '중용'이라고 말한다. 그는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원칙들을 모두 중용을 통해 설명했다. 예를 들면, 용기(勇氣)란 무모(無謀)와 비겁(卑怯)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 중간지점을 '아름다움'이란 개념으로 설명한다.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는 대칭(對稱), 비율(比率) 그리고 조화(造化)이다. 아름다움은 인간의 가장 소중한 감정인 사랑을 자아내며, 인간 문명의 기초인 건축, 교육, 정치 등을 통해 장려되고 재생산된다.
인류의 비극은 가만히 있지 못할 때 생겨난다. 그런 마음을 제어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명상이나 묵상을 통해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인간의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욕망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훈련이다. 이게 어제 아침에 말한, 자연스럽고 필요한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생존에 필요하고 자연스러운 먹고, 마시고, 자는 것은 쉽다. 반면 명예와 권력을 얻기는 쉽지 않다. 선한 것은 단순하고 검소한 음식과 거주지이다. 이런 것들은 부와 권력과는 상관없이 조금만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더 좋은 음식과 거주지를 원한다면 탐욕이 작동한다. 탐욕은 필요 없는 욕망과 걱정을 야기하며 불행을 초래한다.
풍장(風葬) 1/황동규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거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튀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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