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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다시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를 이어간다.

남성인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여성적인 측면을 알 수 있다면, 여성들은 자신의 남성적인 측면을 알 수 있다면, 우리 자신에 관한 한, 신들이 아는 수준, 혹은 신들이 말하는 수준 이상의 수준으로 알기까지 이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결혼을 통해서만 사람들은 그런 수준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결혼이라는 것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이성(異性)의 측면과의 만남이다.”(<신화의 힘>, p 368). 테이레시아스가 인간의 미래를 훤히 꿰뚫어볼 수 있는 것은 양성인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테이레시아스가 육안을 잃고 장님이 되는 대신 심안, 마음의 눈을 얻어 앞일을 헤아리게 된 사연의 또 다른 버전이 있다. 테이레시아스가 숲 속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아테나 여신의 알몸을 훔쳐보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신들의 세계를 기웃거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테이레시아스의 눈을 쓰다듬었는데, 그 때부터 테이레시아스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신은 장님이 된 테이레시아스가 측은했던지 다른 한 손으로 그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테이레시아스는 육신의 눈을 잃는 대신 마음의 눈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아테나 여신에게 드린 감사의 기도는 우리에게 살아가면서 감사해야 할 내용이 얼마나 많은가를 느끼게 한다. “영원한 파르테노스(성 처녀)시여. 한 손으로는 치 시되, 한 손으로는 거두시니 감사합니다. 겉 보는 것을 거두어가시고 속 헤아리는 권능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육신의 눈동자보다 더 큰, 그리고 더 깊은 눈동자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잃고도 얻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사물을 보려면, 눈이 필요하다. 하지만 눈은 물체의 상이 통과하는 렌즈일 뿐이고, 사실 물체를 보는 것은 마음이다. 마음이 딴 데 있으면 눈으로 대상을 보더라도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 배 위원은 사서삼경의 하나인 ‘대학’에 나오는 "심부재언 시이불견(心不在焉 視而不見)"이라는 구절을 소개했다. "마음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모를 것이다. 우리가 관심(關心)을 두지 않으면 사물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관심은 어떤 것에 마음을 두고 주의를 기울이는 준비 단계이다. 그런데 사물을 제대로 보려면, 거기서 한 발 나아가 ‘마음으로 보는’ 관심(觀心)의 단계에 들어서야 한다."(배연국)

배연국 위원의 글은 예를 많이 든다는 것이다. "부처가 팔을 들어 다섯 손가락을 구부리고는 제자 아난다에게 물었다. “무엇을 보고 있느냐?” “부처께서 팔을 들고 손가락을 구부려 주먹을 쥔 모습을 봅니다.” “무엇으로 보느냐?”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난다야, 눈은 다만 대상을 비출 뿐이고, 보는 것은 마음이니라.” 진짜 세상을 보려면 바깥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을 떠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것을 또 공유한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단지 껍데기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어떤 것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건 오직 마음으로 볼 때이다." 물론 마음으로 보되 중한 것은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 이다. 긍정의 마음이냐? 아니면 부정의 마음이냐? 사랑하는 마음이냐? 미워하는 마음이냐? 감사하는 마음이냐? 원망하는 마음이냐?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갈고 닦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으로 보아도 껍데기만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