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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삶의 이야기는 성공 이야기가 아니라 성장 이야기이다.

성장이란 지금보다 더 나아지는 것이다. 그 길은 우리의 의무나 책임을 넘어 존재의 한 형식이어야 한다. 그 길은 개인이나 사회가 모두 더 독립적이도 자유롭고 풍요로워지는 일이다. 문제는 그 길이 어렵고 힘들다는 점이다. 반대로 멈춰 서서 주저 앉는 길은 쉽다. 그냥 믿고 있었던 익숙한 것에 멈춰 서서 거기에 맞춰 반응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더 나아가는 길에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더 나아가려면 감각이 아닌 지적으로 '인식'하려고 시간을 들이는 수고를 하며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체념한다. 난 원래 그렇다고. 그러니 더 나아가고 싶지 않고, 그렇게 살다가 그냥 죽고 싶다고. 그래 우리 사회는 감각적 '의견'이 난무하고, 내 생각이 아니라 일부 언론이 생각하게 하는 것에 생각 당하는지 모르고 생각을 당하며 산다. 그러고 그 당한 생각을 카톡에 도배를 한다.

최진석 교수에 의하면, 감각적 의견이 난무하는 사회는 갈라지고 거칠게 흐르다가 가난해 진다. 반대로 지적 인식이 늘어나야, 그 사회는 화목하며 풍요로워진다. 지적 인식이 가능한 내면을 가지려면, 거기에 맞는 훈련을 해야 한다. 훈련이란 시간을 들이는 것이다. 아침에 공유하는 내 글조차 읽을 시간이 없고, 읽을 인내심이 없다면, 감각적 의견에서 생각을 당하며 살 수밖에 없다.

최진석 교수에 의하면, 지적 인식을 위해 지금까지 개발 된 것으로 독서가 최고라 한다. 책이나 좋은 글을 읽는 것이다. 최교수는 "지식과 내공을 동시에 잘 닦을 수 있는 것이 독서"라고 강조한다. 문제는 펼친 책을 끝까지 읽는 일이나 산 책을 정말로 읽는 일은 다 인내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시간을 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내용을 요약하거나 마음에 닿는 글을 적으면서 읽어야 한다. 그런 것을 최교수는 '인격적인 단련'이라 한다. 나는 그냥 '사는 훈련'이라 말하고 싶다. 그 훈련은 우선 시간을 들이고, 인내심을 가지고  지적인 수고를 하는 것이다.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나르( Pascal Quinard)는 독서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아직 경험하지 않고 이해되지 않은 어떤 곳으로 데려다 주는 마법을 부린다는 뜻에서, 독서를 "마법의 양탄자"에 비유했다고 최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소개했다.

최진석 교수에 의하면, 더 나아간다는, 즉 진화는 용기로 빚어진다고 했다. 프랑스어로 '봉 꾸라쥐(Bon courage)'의 말 그대로의 뜻은 "용기를 내!'이지만, '힘 내!"란 말이다. 용기는 힘을 내는 것이다. 충청도 말로는 '욕보는 일'이다. 그건 용기를 내어 시도하고 시간을 들이며 인내심으로 힘을 내는 일이다. 용기가 힘든 것은 두려움을 떨쳐내면서 편안함을 박차고 길을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변화하여, 들뢰즈의 표현에 따르면 탈주하여, 더 나아가 발전하고 성장하는 일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더 키우고 강화하는 일로도 가능하지만, 그보다 더 많게는 아직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옮겨 가면서 일어난다고 최진석 교수는 말한다.

직접 그의 말을 들어본다. "모든 진화는 경험과 이해를 벗어난 곳으로 탐험을 떠나는 용기이다. 경험과 이해를 벗어난 곳은 알 수 없어서 불안하고 무섭고 이상하다. 거기는 두려운 곳이다. 경험과 이해를 벗어난 곳으로 이동하자면 두려움을 뒤집어쓰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하여 모든 진화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기로만 일어난다."

더 나아지려면, 용기를 내야 한다. 갖고 있는 것을 자신의 정처(定處)로 정하고, 마치 선정(禪定)에 들 듯이 여기에 편안해 하고 여기에서 따뜻함을 느끼고 또 이것을 자신만의 진리의 텃밭으로 삼는 한 이것 다음이나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 닿기 힘들다고 최진석 교수는 말한다. 장자가 말하는 '정해진 마음(成心)'에 갇혀, 이것에 맞는지 여부에 따라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만 갖게 된다. 그러면 깊이 생각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어지고, 사유가 아니라 감각에 빠지게 된다. 사유에는 시간과 수고가 필요하다. 이런 사람들을 최교수는 게으른 자라고 말한다. 부지런한 자는 감각과 감정을 극복하는 지적인 태도로 사유할 줄 안다.

"시간을 들이고, 인내하며 지적인 사유를 하는 훈련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반대로 감각에 빠져 곰곰이 생각하는 능력이 길러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다음으로 건너가는 과감한 용기가 없다. 그리고 곰곰이 긴 글을 읽고 생각하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지식 생산자가 된다. 곰곰이 생각하는 능력 없이 즉각적으로 등장하는 감각만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지면 지식의 영역에서는 지식 수입자가 된다. 지식의 생산자가 되어야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높이 이를 수 있다. 반대로 지식을 수용하는 위치에 빠져 있으면 종속적일 수밖에 없다."(최진석)

좀 더 나아가는 삶을 살기를 포기하고 살면 함부로 사는 막무가내의 인생이 된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면 감각적이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가벼운 태도를 줄이고 곰곰이 생각하는 지적인 태도를 길러야 한다. 그래 글이 길어도 꼼꼼하게 읽고 나를 되돌아 보아야 한다. 그리고 모르는 내용은 묻거나 인터넷을 찾아가며 공부를 해야 한다. 이런 지적인 태도를 함양하지 않고는 어떤 종류의 진화(進化)에도 관여할 수 없다. "한 조각의 '인식'도 내놓지 못하면서 그저 별 의미도 없이 강하기만 한 '의견'을 내뱉는 허탈한 삶을 산다." 최진석 교수의 명 문장이다.

지적인 태도가 중요한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지식을 증가시키는 일과 용기를 발휘할 수 있는 내공(內攻)이라고 최진석 교수는 말한다. 내공은 인격의 문제이다. 지식과 내공이 동시에 잘 훈련되면 우리는 이 단계를 넘어서 저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렇게 성장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독서, 즉 읽어야 한다. 독서는 인격적인 훈련이다. 지적인 수고를 하는 일이다. 나는 언젠가 나의 수고로 내 일상이 진행되면서 훨씬 더 행복해졌다. 그동안 다른 이의 수고로 네 일상이 이루어져, '발가 벗은 힘'을 잃었었다. 최근에 나의 수고로 깎아 먹는 사과가 훨씬 더 맛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독서를 너무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읽은 것을 내 것으로 정리하지 않는다. 2015년 UN 조사 결과, 한국인의 독서량은 192개 국가 중 166위이고, 문체부가 시행한 2019년 국민독서 실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성인은 연간 독서량이 6,1권에 불과하다고 한다. 독서를 하지 않으니, 글이 조금 길면 읽으려는 시간을 내지 않아 지적인 훈련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 사회는 인식의 교환보다는 반성 되지 않는 의견들만 난무하고, 정치는 진영과 프레임 씌우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지식은 생산의 시도가 이뤄지지 않는 것 같다. 최진석 교수도 같은 의견이다.

끝으로 최교수의 제안을 직접 들어 본다. "한 달에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들끼리 도달할 수 있는 높이는 이미 정해져 있다. 그 높이를 넘어서려면 최소한 한 달에 한 권이라도 읽어야 한다. (…) 독서라는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다음 단계로 건너가자. 진화는 용기로 빚어지며, 용기는 지적 인내이다. 지적 인내는 독서로 제일 잘 길러진다. 책읽기가 보통 물건이 아님을 기억하자." 내 생각은 지적 인내를 위해 우선 천천히 좋은 글들을 읽는 시간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