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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자신의 생각이 밖으로 부터 온 '생각 당한 생각'인줄 잘 모르고 산다.

나는 하루에 한 번은, 그 날 하루 동안 언론에 올린 글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네이버의 <오피니언>이라는 곳을 방문한다. 어젠 평소에 내가 좋아하던 서울대 정치외교학과의 김영민 교수 칼럼을 만났다, 그가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이라는 연재를 새로 시작하는 첫 번째 칼럼이었다. 우리는 생각의 힘을 잃었다. 자신의 생각이 밖으로 부터 온 '생각 당헌 생각'인줄 잘 모르고 산다.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 본다.

"역병[코로나-19]을 예측하지 못했던 지식인들이 매스컴에 나와 역병 이후의 미래를 예측하기 시작한다. 마치 ‘노멀’이 존재했던 양 이제 ‘뉴노멀’을 말하기 시작한다. 정치인은 구원을 약속하고, 정치의 팬덤화는 가속화되고, 지난 100년 동안 지속된 한국 공론장의 굿판적 성격은 변함이 없다. 생각의 폐허를 가득 채운 구호와 비난과 불안과 억울함과 집단 흥분 속에서 종파 종교들은 번성한다. 탁지원 국제종교문제연구소장에 따르면, 한국에는 현재 자신을 하느님이라고 주장하는 종교 지도자만 20여 명, 재림예수를 자처하는 이도 50명이 넘는다. [이런] 예언가들이 횡행하는 이곳에서 제정신을 유지하려면, 선진국에 대한 환상에 쉽게 의탁하거나, 자신을 연민하는 정신적인 울보가 되거나, 달콤한 힐링을 섣불리 찾지 않는 것이 좋다. 솜사탕으로 이루어진 사회 안전망과 이젠 쓸모 없어진 흔적기관과도 같은 인권 의식을 가지고 선진국 행세를 하는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도덕적 담론을 넘어서는, 강철같은 생각이 필요하다. 잘 다져진 절망과 희망을 안고 강철로 이루어진 생각의 징검다리를 밟으며 죽을 때까지 의연하게 걸어가야 한다."

"강철 같은 생각"이 필요하다. 그래 나는, 인문운동가로서, 아침마다 피를 토하듯이 글을 쓴다. 나도, 그처럼, "생각의 공화국"이 필요한 때라 본다. 실로 생각은 침잠이 아니라 모험이며, 그것이야 말로 저열함에서 도약할 수 있는 인간의 특권이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타인의 수단으로 동원되기를 거부하고, 자극에 단순히 반응하는 일을 넘어 타성에 젖지 않은 채, 생각의 모험에 기꺼이 뛰어드는 사람들이 만드는 터전이 바로 생각의 공화국이다."

우리 주변에서 사람들은 '중년의 위기'라는 말을 한다. 중년의 위기가 '진짜' 찾아온 것이 아니라, 인생은 늘 위기였는데 그저 중년이 찾아왔을 뿐이라는 걸 중년이 되고서야 깨닫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자금 "허울 좋은" 선진국이 되고서야 깨닫고 있다. 사회는 아직도 많은 문제로 신음하고 있는데, 선진국이 갑자기 찾아왔을 뿐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절대빈곤에서 출발, 30여년 간의 피나는 노력을 통해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나라"가 되었을 뿐이다. 김교수의 말을 들어 본다.

"불과 100여년의 시간 동안에 왕조 국가에서 공화국으로 탈바꿈하고, 자신들이 무시해온 이웃 나라에 강점 당하는 식민지 체험을 겪고, 동족에게 죽창을 꽂는 상잔의 전쟁을 거쳐, 끼니를 걱정하는 빈국에서 국내총생산(GDP) 규모 세계 12위권의 부국으로 도약하는 파란만장한 현대사를 쓴 나라가, 자기 자신에 대한 애증으로 가득한 이 나라"이다. 우리나라는 "지옥 불에도 무너지지 않은 그을린 가옥이며, 한국인은 지옥 불을 견디고 기어이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김교수에 의하면,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 바이러스 방역에 성공하는 것은 놀랍지 않다고 했다. 이런 점에서 그렇다. 환상에 빠지지 말고, 이런 생각을 해야 한다. 무섭다. "한국이 방역에 상대적으로 성공한 것은 선진국이어서가 아니라 헬조선이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인적·물적 자원을 갈아 넣을 수 있는 곳. 원하면 통신사 기지국을 통해 시민의 동선을 샅샅이 복구할 수 있는 곳. 와불(臥佛)처럼 달관하는 대신, 보란 듯이 살아남고야 말겠다는 결기를 가지고 너나 할 것 없이 추노(推奴)꾼처럼 전력 질주하는 곳. 이곳에 안온한 선진국형 게으름과 권태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헬카페’에 독한 위스키와 커피가 넘치듯이, 헬조선에는 독한 역동성이 넘친다. 사람들은 여전히 밥을 사냥하듯이 먹고, 자신이 굴릴 돌을 앞장서 고르는 시시포스의 심정으로 직장을 고른다. 각자도생에 분투하는 동안 삶은 빨리 지나가고, 영혼은 간헐적으로나 존재한다. 역병에 이어 도래할 경제 위기에, 시시포스는 노역에서 해방, 아니 해고될 것이 두렵다. 비참하게 죽기 싫어하는 그 두려움을 연료 삼아 예언자들이 설치기 시작한다."

이 예언자들에게 속지 말아야 한다. 나는 값싼 위로를 하는 '힐링 인문학' 보다는 현실을 까발리는 '필링 인문학'에 무게를 두는 인동운동가이다. 싫어도 알아야 한다. 김 교수같은 멋진 표현을 할 수 없어 그의 말을 인용한다. "이 나라가 기어이 선진국이라고 자처하는 건, 잘생기지 않은 얼굴을 기념하기 위해 청동 흉상을 만드는 일 같은" 것일 수 있다. "기존의 선진국이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아니라고 판명되었기에 자신이 느닷없이 선진국이 되는 기분은" "살을 빼지 못했는데도 남들이 살이 찌는 바람에 다이어트의 달인이 되는 기분", "다른 사람이 모두 팬티를 내렸기에 자기만 갑자기 세계 최정상의 패션모델이 되는 기분"일 수 있다.

왜 이런 주장을 하는가? 김교수의 칼럼에서 읽었다. 이건 나나 김교수의 '의견'이 아니라, 이 나라의 '팩트(사실)'이다. "2016년 한국 정부는 제32차 유엔 인권이사회가 발의한 ‘성적지향 성별 정체성에 근거한 폭력과 차별로부터의 보호 결의안’에 찬성한 바 있다. 그러니 외교부 장관이 2020년에 해외 언론에 대고 “사회가 받아들일 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데 변화를 촉구하면 기존의 편견들을 오히려 악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 것은, 한국이 인권에 관한 한 결코 선진국이 아님을 세계만방에 선언한 것이다.

장관이 인권을 위한 사회적 변화에 유보적 태도를 보인 바로 그 5월 13일, 한국은 노동자의 권리와 노동 조건에 대해서도 유보적인 나라임이 다시 한번 판명되었다. 삼척의 시멘트 공장에서 근무하던 하청업체 60대 노동자가 컨베이어 벨트에 머리가 끼어 죽은 것이다. 이것은 새삼스러운 사고가 아니다. 3월12일에는 과로에 시달려 온 40대 계약직 배송 노동자 김모씨가 새벽 배송을 하던 중 숨졌고, 4월 29일에는 이천시 모가면의 건설 현장에서 물류창고 화재로 인해 노동자 38명이 죽는 참사가 일어났다. 5월 21일에는 조선소에서 하청 노동자가 용접작업을 하다가 질식해서 죽었고, 바로 그 다음 날에는 목제품 제조업체에서 일하던 20대 노동자가 고무 분쇄기에 빨려 들어가 목숨을 잃었다. 2018년 12월 11일 김용균 씨가 발전소 석탄 이송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즉사한 이래로 상황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물론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대한민국 헌법 제32조는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해마다 노동자 2400여명이 노동 현장에서 산업재해로 이처럼 죽어 나간다면, 이는 한국은 결코 선진국이 아니라고 고함치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 생각해 보자는 뜻에 길게 인용했다. 뿐만 아니라, <Coupang> 물류창고에서 번진 코로나-19 확진 자의 폭발도 같은 차원에서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눈감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며 생각의 공화국을 위해 인문 운동에 박차를 가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