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8.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2021년 4월 5일)
서울과 부산의 시장 보궐 선거로 우리 사회의 민 낯이 더 드러났다. 이 시대 정신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당황해 하던 차에 <경향신문>의 박상민 정치 칼럼니스트의 글을 보고 큰 통찰을 얻었다. 거기서 만난 다음의 세 문장은 나 자신의 삶의 지표로도 손색없다고 생각해 오늘 아침 공유한다.
(1) "역경을 이기긴 쉬워도 풍요를 이기긴 어렵다."
(2) “자기가 가진 것을 사랑하면 행복하고 못 가진 것을 사랑하면 불행하다.”
(3) "사람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
"역경을 이기긴 쉬워도 풍요를 이기긴 어렵다" 란 문장부터 곱씹어 본다. 사실 역경을 극복할 수 있으나, 풍요 앞에서 우리는 쉽게 썩는다.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는 한국의 586 민주화 엘리트들의 몰락을 이렇게 풀었다. 좋은 통찰이다. 우리들 개인의 삶에도 적용된다고 본다. 2019년 9월 그가 썼다는 칼럼을 다시 읽어 보면, 최근의 시대 상황은 이미 작년부터 조짐이 있었던 것이다. "[지난]조국 사태는 강남 좌파와 586 엘리트가 오랫동안 감춰온 위선과 욕망의 민 낯을 드러냈다. (…) 통찰은 부족하고, 성찰도 없으니 ‘현찰’만 쫓는 게 586 엘리트가 세상을 사는 방식이다.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한다. 강남 좌파든, 강남 우파든 이념이 아니라 대한민국 0.1%의 엘리트가 사는 방식이 문제의 핵심이다. 노무현 대통령 때까지만 해도 ‘깨끗하지만 무능한 진보’와 ‘유능하지만 부패한 보수’의 프레임이 작동했지만 지금은 둘 다 무능하고 둘 다 부패했다. 대한민국의 비극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문제는 서울 강남이다. 강남은 모두가 갖고 싶고, 닮고 싶은 세련된 매력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학벌, 부, 권력을 모두 가진 사람이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고 사회적 이슈에 대해 진보적 목소리를 내는 순간, 사람들은 그들을 ‘강남 좌파’라고 불렀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이 시대 최고의 상징 자본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개혁이나 정의 같은 명분으로 포장되어 있어도, 속으로는 전략 자산을 총동원한 ‘586 엘리트’의 기득권 전쟁이었다. 그래서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2011년에 <강남 좌파>라는 책에서 강남 좌파 논쟁의 본질은 ‘이념’이 아니라 ‘엘리트’ 논쟁이라고 날카롭게 통찰했었다. 프랑스의 마크롱 정부도 비슷한 상황이다. 이젠 엘리트와 반엘리트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승자 독식 사회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하는 엘리트들이 시대의 반동 세력이 되었다.
이젠 두 번째 문장, “자기가 가진 것을 사랑하면 행복하고 못 가진 것을 사랑하면 불행하다”를 사유해 본다. 박성민의 탁월한 통찰이다. 보수나 진보를 떠나 엘리트들의 불행은 ‘못 가진 걸 사랑한’ 욕망 때문이다. 아!. 커다란 삶의 지혜이다. 욕망의 문제이다. 특히 못 가진 것을 사랑하는 욕망은 탐욕으로 넘어간다.
예로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경우를 든다. 그는 피에르 부르디외가 <구별 짓기>에서 말한 ‘아비투스(habitus, 인간 행위를 상징하는 무의식적 성향, 다시 말하면,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행위)’를 위해 돈, 권력, 도덕 순으로 ‘상징 자본’을 얻으려 했다. 그는 물질적 권위에 만족하지 않았다. 도덕적 권위도 갖고 싶었기 때문에 불행을 겪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 우리 시대의 모습을 또 다른 예로 든다. "오늘날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부를 축적한 젊은 기술자들이 사상가연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돈이 많고 기술을 이해한다고 지혜가 더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를 진리로 받아들인다. 실리콘 밸리의 인물들이 회자되는 것이 그 예이다. 더 나아가, 다니엘 부어스틴이 <이미지와 환상>에서 통찰한 대로 “옛날에는 위대하면 유명해졌지만 지금은 유명 하면 위대해 진다”고 믿는 시대다."
박성민의 지적은 통쾌하다. 문제는 바로 그거였다. ‘586 민주화 엘리트’들은 이명박과는 반대로 도덕, 권력, 돈의 순으로 상징 자본을 쟁취했다. 그들 역시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갖지 못한 것에 집착했다. 이미 권력, 정의, 명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돈마저 갖고 싶었다. 양귀자의 소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2년)의 제목처럼, 그들은 금지된 것을 소망했다. 그들이 금단의 과실을 따 먹는 순간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지지자들은 부패의 상대적 크기로 옹호하는 모양이지만, 그들은 도덕을 상징 자본으로 정치를 했기 때문에 그건 일종의 사기죄가 된다.
이쯤에서, 오늘 시를 공유한 다음, 이야기를 더 이어간다. 오늘도 박노해 시인의 짧은 시 하나를 공유한다. 사진은 아침 산책에서 얻은 것이다.
지나침/박노해
열심이 지나치면 욕심
성공이 지나치면 부실
열정이 지나치면 소진
확신이 지나치면 독선
책임이 지나치면 군림
앞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586 민주화 엘리트들은 무능·위선·부패의 상징이 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재야의 선비’도 아니고, ‘개혁적 사대부’도 아니다. 그저 돈과 자리만 탐하는 ‘타락한 양반’일 뿐이다. 이 주장을 이해하려면, 한국 철학을 연구한 일본의 오구라 기조는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을 알아야 한다. 그는 이 책에서 조선시대 지식인의 이미지 유형(선비, 사대부, 양반)으로 오늘날 한국 정치의 부도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1) ‘선비’는 권력과 부를 가까이하는 것을 거부하고 오로지 학문의 세계에 침잠하여 이상(도덕)을 추구하는 자다. 퇴계 이황이 대표적 인물이다.
(2) ‘사대부’는 관료이자 지식인이다. 권력을 지향하지만 부와는 선을 긋는다. ‘사림’이나 ‘신진사류’ 등이 주자학을 받아들이면서 수구세력과 전면전을 벌였는데 이들이 전형적인 사대부의 이미지다. 율곡 이이가 대표적 인물이다.
(3) ‘양반’은 도덕과 권력에 부까지 거머쥔다. 기득권의 상징으로 오늘날 대부분 정치인의 원형이다.
박성민은 오구라 기조의 주장에 따라 다음 같이 말한다. 586 민주화 엘리트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286’때는 재야의 선비였고, ‘386’ ‘486’ 때는 개혁적 사대부였으나 ‘586’ 때는 타락한 양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정치는 비즈니스가 됐다. 제사장과 선지자의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들도 모두가 돈과 권력을 찾아 부나방처럼 날아든다. 모두가 ‘업’에는 관심 없고, 오직 ‘직’에만 눈독을 들인다. 정체성이 약하니 윤리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다. 이미 오래전에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했는데도 아직도 개혁의 주체인 양 행세한다.
세 번째 문장 이야기는 내일 아침으로 옮긴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0) | 2021.04.06 |
---|---|
냉이의 뿌리는 하얗다 (0) | 2021.04.06 |
"하느님의 큐시트에는 반드시 반전 포인트가 있다." (0) | 2021.04.05 |
세속주의 (0) | 2021.04.05 |
봄비 (0) | 2021.0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