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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고 원하는 것은 다르다.

오늘 아침은 지난 5월 14일자 아침 글쓰기에 이어 '최고들은 무엇을 묻는가'란 부제를 달고있는 한근태의 『고수의 질문법』 이야기를 이어가 본다. 나는 내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가? 우리가 이런 질문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뜻이다. 진정으로 원하는 게 있으면 질문이 생긴다. 나는 여기서 원하는 것을 사회적으로 원하는 'want'가 아니라,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원하는 'like'로 한정한다. 그러나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질문을 할 수 있으면 답을 얻을 수 있고, 답을 얻을 수 있으면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질문이 중요한 이유이다.

그러려면, 좋아하고 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고 원하는 것은 다르다. 싫어하는 것으로는 변화할 수 없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변화는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으로부터 온다. 이젠 싫어하는 것을 먼저 말하지 말고,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먼저 생각하고 질문할 생각이다.  

만물이 변하는 데, 만일 자기가 스스로를 변화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방치하거나, 내가 아닌 타인을 변화시키려 한다면, 불행이 발생한다. 우리는 그런 방치를 '부패(腐敗)'라고 부른다. 부패는 '썩어서 패한 자'이다. 같이 썩는 것인데 발효(醱酵)는 다르다. 부패와 발효는 똑같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어떤 미생물이 작용하는가에 따라 해로운 변화와 이로운 변화로 나뉘듯이, 어떤 문장이나 단어 또는 생각은 무의식 속에서 정신을 부패 시키고, 어떤 단어와 문장 그리고 생각은 기도처럼 마음의 이랑에 떨어져 희망과 의지를 발효시킨다. 이게 '만트라'이다.

만일 내가 오늘이라는 시간을 내 삶의 최선으로 만들기 위해, 스스로를 다듬지 않는다면, 나는 인생의 패배자가 된다. 나를 부패로부터 건져낼 유일한 사람은 나 자신이다. 혹 자신이 스스로 변화를 연마하지 않거나, 대신 주변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 부산을 떤다면, 그 사람은 멍청한 바보이다. 아니면 우매(愚昧)한 사람이다.

인간은 자발적인 수고가 없다면,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변화에서 자발성이 중요하다.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변화를 당한다. 계란 후라이가 아닌 생명으로 살려면,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오면 생명(병아리)으로 부활하지만 남이 깰 때까지 기다리면 계란 후라이 밖에 안 된다.  우린 우리의 관습의 틀을 벗고,  고정 관념을 깨뜨려, 매일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아니면 코치를 두어야 한다. 그건 의도적인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발적이며 의도된 연습만이 변화로 이어지는 지름길이다. 자발성이 부족하다면 코치의 말을 참고하여, 자신을 변화시키는 힘든 연습을 해야 한다. 그 코치는 긴 글을 읽고 생각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독서의 중요성이 이 거다. 그리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코치나 독서의 충고는 단지 스쳐가는 바람 소리가 될 뿐이다.

그리고 내가 변하지 않으면서, 타인을 변화시키려고 시도한다면, 그것은 폭력이다. 나는 타인의 변화를 유도할 수은 있다. 그런 유도가 성공하려면 먼저 나 스스로가 변해야 한다. 나의 변화를 보고, 상대방이 말만이 아닌, 그 기운(氣運)으로, 서서히 변화할 것이다. 자기 변화는 주변 변화의 시작이자 끝이다.

변화(變化)라는 한자어를 풀어보면, '엉켜 있는 실타래를 나의 생각, 말 그리고 행위로 하나씩 푸는 행위'이다. 중요한 것은 거듭 말하지만, 변화는 누구에게 요구하는 폭력이 아니라, 자신에게 부탁하는 정중한 초대이며, 그 변화가 이루어지게 하기 위한 의도된 섬세한 연습이다.

'늙음'이란 영어 단어 'aging'의 본래 의미는 '생동하다'. '영원하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오늘도 그냥 부패하는 하루가 아니라, '생동하는' 하루가 되어야 잘 늙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