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5월 24일)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최근 우리 나라가 돌아가는 것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의 민낯이 연이어 폭로되고 있기 때문이다.
- 낙마한 김인철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후보자는 본인이 한국 풀브라이트 동문회 회장일 때 딸이 2년간 1억원에 이르는 풀브라이트재단 장학금을 수령한 것을 비롯해 김 후보자 본인과 배우자, 두 자녀 모두 재단 장학금을 수령했다는 사실이 언론의 검증과정에서 드러났다.
-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 역시 두 자녀 모두 정 후보자가 재직 중이던 경북대 의대에 각각 지역 인재 특별전형과 편입으로 들어간 사실이 알려져 ‘아빠 찬스’ 의혹이 불거졌다.
- 그런 가하면 한덕수 국무총리는 고위 관직 사이사이에 두 차례나 김앤장 고문으로 고액 자문료를 받아 논란이 일었다.
- 한동훈 장관 딸에 대해서도 스펙 논란이 있었다.
진영을 막론하고 이른바 한국의 엘리트 집단이 비루하다. 꾀죄죄하고 초라할 때 우리는 '비루하다'고 한다. 다른 말로 '너절하고 더럽다'는 말이다. 오늘의 사태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특히 ‘포스트 조국 시대'에 엘리트, 더 구체적으론 지식인의 위상이 한없이 초라 해졌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보편적인 존경을 받는 엘리트/지식인/학자들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지난 정권에서도 내내 논란이 되었던 '내로남불'과 불공정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번 논란을 기해 진영을 막론하고 이른바 한국의 엘리트 집단이 일반 국민에게 ‘비루한’ 존재가 됐다는 거다.
차이점은 조국의 경우, ‘존경하는 엘리트'에 대한 환상이 깨지니 심리적 후유증으로 그를 둘러싼 논란의 후폭풍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보수 진영의 인물들은 원래 그러려니 하는 거다. 이게 무서운 거다. 왜냐하면 갓 출범한 윤석열 정부의 인사 잡음에서 나는 분노보다 냉소와 허탈이 앞서기 때문이다. 많은 대중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인문 운동가의 눈에는 분노보다 더 무서운 것이 냉소이다. 냉소는 쌀쌀한 태도로 비웃는 거다. 분노보다 더 무서운 것이 무관심이다. 그러면 부패는 더 더 부패한다. 전통적 의미의 보수라면 조국 전 장관의 추락에 고소해 하기 이전에 이런 냉소가 만연해진 분위기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시대의 풍경이 바뀌었다. 그리고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대중들에게 인문정신을 외치는 인문 운동가인 나 자신도 '노잼'의 엘리트일 뿐이 아닌가 반성한다. 대중들은 지적, 도덕적 권위 대신 예능만 기대한다. 그런 면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당선과 엘리트의 위상 추락은 상호 연동된 현상일 수 있다. 물론 각계각층의 전문성을 대표하는 엘리트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중 일부는 유튜브나 SNS에서 유명세를 얻기도 한다. 과거와 달라진 건 그들을 소비하는 대중이 더 이상 그들에게서 지적·도덕적 권위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적·도덕적 권위보다는 (거대 미디어 플랫폼의 성장 속에서) 예능적 요소가 주목을 끄는 시대가 됐다. 대상이 아무리 엘리트여도 재밌는 스토리텔링이나 예능적 요소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런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엘리트는 대중의 눈에 그저 비루한 노잼들이다. 그러다 보니 위선보다는 차라리 흥미로운 위악이 더 낫다는 여론이 다수를 점한 시대의 풍경이다. 이는 전적으로 인문정신의 부재 현상이다.
나는 여기서, (간발의 차이였지만) 국민들이 윤석열을 선택했다고 본다. 존경하지는 않더라도 친근감을 느끼는 사람이 의외로 많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 조국 사태나 유시민의 어용 지식인론 같은 비상식적인 일련의 사태들을 겪고 나니 대중은 더는 ‘존경받는 어른’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일지도 모른다. 대신 많은 이들은 (최소한) 자신의 분노와 억울함을 ‘들어줄 것 같은 사람’을 선택했다. 정책과 이념보다는 제스처와 태도가 대선 결과를 가른 것이다. 아마도 이런 점이 대중들이 '굥'을 택하지 않았을까? 풀리지 않았던 의문을 이걸로 풀어본다.
그 뿐만 아니라, 엘리트 정치인들의 부패와 위선에 식상한 점도 있다. 그리고 그 엘리트 정치인들의 정치적 언어에서 특히 그랬을 것 같다. 인문정신의 문제이다. 예능이 예술을 이기고 있는 거다. 예능 대신 예술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능은 당장의 시각적 즐거움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예술은 추상적이지만 한 차원 높은 수준에서 전율과 감동을 일으키는 일이다. 만화만, TV 드라마에만 관심을 두면, 예술을 알 수 없다. 셰익스피어를 읽어야 한다. 예능과 예술은 다르다. 예술의 핵심은 미학적 정서와 철학적 사유이다. 즉 정서적 미학과 철학적 가치라고 다르게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감동과 변화이다. 가짜와 진짜는 여기서 판가름 난다.
이어지는 사유는 블로그로 옮긴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는 경구로만 여겨질 때가 태반이다. 실제 삶에서는 문이 닫힐 때면 안타깝고 불안해 한다. 그러나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우리는 위로를 빨리 찾아야 한다. 어떻게? 다음과 같은 기억에서 위로를 소환하는 것이다.
(1) 시인의 노래처럼 절망 앞에서 정직할 때 희망의 문이 열렸던 기억.
(2) 현명한 이들의 충고.
(3) 시와 영화 같은 예술의 일깨움이 주는 위로. 특히 예술은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려고 하는 메타언어이기 때문이다.
위의 사례들은 뻔하다고 생각되더라도 잊곤 했던 위로를 나누는 힘이 된다. 함께 나누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 시인의 노래처럼 그 "끝이 참된 시작"이 될 것이다. "겨울이 깊으면 거기/새 봄이 걸어 나온다." 절망하지는 않는다. 오늘 아침 사진처럼, 빛과 그림자는 늘 함께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길이 끝나면/박노해
길이 끝나면 거기
새로운 길이 열린다.
한쪽 문이 닫히면 거기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겨울이 깊으면 거기
새 봄이 걸어 나온다
내가 무너지면 거기
더 큰 내가 일어선다.
최선의 끝이 참된 시작이다.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
예능도 중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예능에만 빠진다는 것이다. 예능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예술이다. 예술은 생각하며 즐겨야 즐거움이 온다. 그리고 깊은 생각을 하며 예능을 보면 재미가 없다. 예능을 즐기는 이유는 생각하는 수고를 하기 싫어서 이다. 생각하는 데는 힘이 들기 때문이다. 누군가 예능에만 빠진다면, 그는 분명히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생각하는 수고를 많이 하다 보면 쉬고 싶을 때가 있다. 예능은 그럴 때 즐겨도 충분하다. 큰 폭과 높은 높이가 없이 소확행에만 빠지면 사람이 작아져 버리듯이, 예술 없이 예능에만 빠져도 사람은 쉽게 작아진다.
인간의 몰입은 대단히 희소한 자원이다. 정치인들과 기업들은 끊임없이 우리의 주의를 분산시키려 한다.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주의 집중을 분산시킨다. 대가를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뉴스의 질이 낮다는 것을 그리고 가짜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른다. 또한 그 때 그 뉴스를 '공짜로' 무언가를 얻는 경우, 우리 자신은 상품이 된다. 그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비자가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되, 소비자의 주의를 악용하지 않는 고품질의 정보나 문화이다. 공짜라는 이유로 자신의 주의를 포기하는 대신 낮은 품질의 정보를 얻는 것은 정신나간 짓이다. 문화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그래 자꾸 우리는 예술보다 예능에 더 잘 빠져 든다.
나라 돌아가는 꼴이 왜 이 모양일까? 나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이 망쳐 놓았다고 본다. 박가분 작가의 글에서 읽은 것이다. 나도 전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에게 부채의식이 없다는 거다. "엘리트 대다수는 매우 좋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보편적 관점을 견지하려 노력하는 전통적 의미의 지식인이라 기보다는 ‘오타쿠’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곤 한다. 자신을 그 자리에 오게끔 해준 이 사회에 대한 ‘빚’을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사실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비판의 날을 세운 대상도 그러한 사회적 유대감을 상실한 엘리트의 정신적 퇴폐다. 대중도 이런 속내를 알기에 신뢰하기는 커녕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는다."(박가분) 나 자신도 솔직하게 그런 면이 많다.
"과거엔 대중과 엘리트의 문화적 유대관계의 단절이 이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다. 엘리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자신들이 출세하는 과정에서 지원해준 가족, 지역사회, 더 나아가 민중 전체에 대한 부채감을 의식했다. 좌파는 이를 제도적 재분배로 풀어나가고자 했고, 우파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구현을 강조하는 등 방식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사회계층이 굳어진 이후 그러한 상호 간의 유대감이나 부채의식 자체가 문화적으로 생경한 요소가 되어버렸다." 박가분 작가의 분석에 공감한다.
여기서 나타나는 중대한 역설을 우리는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엘리트와 대중의 유리는 불평등 심화의 결과이지만 정작 담론장에서는 이런 불평등이나 격차에 대한 진지한 담론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대신 그 자리에 다른 것들이 들어섰다. 자칭 좌파라는 자들은 PC(정치적 올바름)주의와 정체성 정치를 통해 대중을 가르치려 들고 이를 통해 스스로를 ‘구별 짓기’ 하려 했다. 반대로 우파라는 자들은 더욱 노골적인 능력주의적 사고로 빠져든 채 엘리트의 '지대(地代)추구행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로비 등의 비생산적인 활동에 경쟁적으로 자원을 소비하는 일체의 활동)와 지위 대물림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자정 노력 자체를 상실하고 있다. 저 둘은 달라 보이지만 실은 동전의 양면이다. 더 이상 ‘보통 사람’에게 공감할 수 없게 된 엘리트들의 비루한 민 낯이다." 그동안 나라가 돌아가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던 참에 좋은 글을 읽고 좀 이해가 되었다. 그러니 나 자신부터 반성하고, 인문 운동가의 역할을 더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을 하는 아침이다.
"『21세기 자본』으로 유명세를 떨친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오늘날 서구사회 정치를 ‘브라만 좌파’와 ‘상인 우파’가 주도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들 모두 대중의 이해를 전혀 대변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그 결과 트럼피즘이나 브렉시트가 나왔다. 어리석은 ‘트럼프 지지자’ 혹은 ‘브렉시트 찬성파’라며 손가락질하기는 쉽다. 그러나 이것은 서구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내 생각도 진짜 문제는 바로 그렇게 손가락질하는 우리 스스로에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방법은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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