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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시빌레 이야기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그리스 로마 신화의 무녀 시빌레 이야기를 좀 더 한다. 나는 산에 오르다가 구멍이 뚫린 나무를 만나면, 시빌레가 살고 있는지 들여다본다. 무녀의 이름이 우리의 욕과 같아 잘 잊혀지지 않는 이름이다. 무슨 연유로 나무에 이런 구멍이 생기고, 불로 그을렸는지 모르겠다. 우리 동네 현충원 둘레길에서 만났다.

신과 인간이 다른 차이는 '신은 죽지 않는다'이다. 그러나 인간은 죽는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 생로병사,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늙는다는 것은 신의 은총'이라는 독일 속담이 있다. 장 폴 사르트르도 단언했다. '나이 듦은 또 하나의 축복'이라고. 그러나 과연 늙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아무도 늙고 싶지 않아 한다. 늙고 싶지 않다는 것은 죽고 싶지 않다는 것과 통한다.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모두 살고 싶어 한다. 그것도 아주 오래오래. 그러나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그것은 축복일까, 형벌일까?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영원히 죽지 않는 여인이 시빌레이다. 그녀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무녀를 총칭하기도 하지만 원래는 아름다운 여인의 이름이었다. 시빌레가 젊고 아름다울 무렵, 아폴론은 그녀에게 구애하며 약속했다. "내 사랑을 받아준다면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소." 시빌레는 손에 한 움큼의 모래를 쥐고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 모래알의 수만큼 오래 살게 해주세요."

영원히 사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었지만 아폴론은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시빌레가 깜빡 잊고 놓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젊음이었다. 모래알의 수만큼 오래 살게 해 달라고는 했지만, 젊은 모습 그대로 살게 해달라는 말을 미처 하지 못한 것이다. 시빌레는 소원을 이루었다. 그러나 마음이 변하여 더 이상 아폴론을 사랑하지 않았다. 화가 난 아폴론은 그녀에게 약속한 대로 모래알만큼의 수명을 주었다. 그런데 늙도록 내버려 두었다. 시빌레는 결국 늙고 지친 몸으로 무수히 많은 세월을 살아야 했다. 700년도 넘게 살고 나니 시빌레의 소원은 오직 한 가지였다. "제발 나를 죽게 해주세요."

늙어서 몸이 점점 줄어든 시빌레는 나무 구멍 속에 넣어져 매달려 있었다. 오직 죽고 싶다는 소원 하나를 마음에 품고서. 시빌레는 영원히 살았으나 영원히 살았기 때문에 불행한 사람이었다. 제발 죽게 해달라는 소원 하나만 품고 살아야 했던 그녀가 우리에게 전해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축복처럼 받아들이라고. 죽음이 있기에 주어진 생이 소중한 것이라고.

우린 인생이 너무 짧다고 한탄한다. 그러나 짧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얼마나 많은가. 꽃이 아름다운 것은 그 꽃이 속절없이 지기 때문이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뜨겁던 그 사랑이 쓸쓸히 식어 가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 역시 언젠가는 죽기 때문에, 그래서 소중하고 그래서 아름답다. 거리의 목련들이 벌써 지저분하다. 너무 짧다.

'그랬다지요'/김용택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사는 게 이게 아닌데
이러는 동안
어느새 봄이 와서 꽃은 피어나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러는 동안 봄이 가며
꽃이 집니다
그러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그랬다지요

PS
시빌레하면, 우리는 '시빌레 서책'이라는 말도 기억난다. 시빌레는 늙은 몸을 이끌고, 왕에게 예언집을 팔았다. 시빌레는 아홉 권의 예언집을 가지고 왕을 찾아갔다. 그 예언집의 가격은 어마어마했다. 왕은 코웃음 치며 거절했다.

시빌레는 예언집 아홉 권 중에서 세 권을 태워버렸다. 얼마 후 남은 여섯 권을 가지고 왕을 찾아갔다. "여섯 권의 책을 사지 않겠소? 가격은 전에 부른 것과 똑같아요." 세 권이나 줄었는데 아홉 권의 가격에 여섯 권을 팔겠다니, 왕은 화를 내며 노파가 된 시빌레를 내쫓았다. 시빌레는 책 세 권을 다시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이제는 세 권 남은 책을 들고 왕을 찾아갔다. "세 권 남았는데 이 책을 사세요. 값은 처음에 불렀던 그대로예요."
왕은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사제들에게 의논했다. 사제들은 남은 세 권이라도 어서 사라고 했다. 왕은 세 권의 책을 샀다. 시빌레가 돌아간 후 책을 펼쳐본 왕은 깜짝 놀랐다. 거기에는 로마의 운명에 관한 예언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세 권 밖에 없었기 때문에 미래의 일부만을 알 수 있었다.

이 책들은 나중에 신전에 보관되어 특정한 관리에게만 열람이 허용되었다. 그리고 국가에 중대사가 생겼을 때 책에 적힌 신탁을 해석하여 국민들에게 전달하였다고 한다. 왕은 시빌레를 노파라고 업신여기며 그녀가 권한 책을 모두 사지 않았던 것을 몹시 후회했다. 아무리 탄식해도 소용없었다. 나머지 여섯 권의 예언서는 시빌레가 이미 불태워버렸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이야기에서 '시빌레의 서책'이라는 용어가 생겼다. 이 말은 아무리 좋은 기회가 와도 그것을 잡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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