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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죽음을 걱정하지 마라"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어제 우리는 에피쿠로스가 말한 불행의 원인, 일상의 쾌락이 아닌 불쾌함의 원인인 두려움과 허영 그리고 무절제한 욕망이란 병을 고치기 위한 네가지 치료법을 이렇게 말하였다.
▪ 신을 두려워 하지 마라
▪ 죽음을 걱정하지 마라
▪ 선한 것은 얻기 쉬운 것이다.
▪ 최악의 상황은 견딜 만하다.

오늘은 두 번째, "죽음을 걱정하지 마라" 이야기를 하려 한다. 배철현 교수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사실 살아 있지 않은 상태인 죽음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만일 우리가 죽는다면, 죽음을 생각할 필요가 더 이상 없어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죽음을 생각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을 1인칭 죽음, 2인칭 죽음 그리고 3인칭 죽음으로 나누어 볼 때, 1인칭 죽음은 죽은 후에는 자신의 죽음을 알지 못한다. 자신이 죽었기 때문이다., 죽음을 아파하는 것은 2인칭 죽음이다. 사랑하는 2인친의 죽음으로, 그의 부재(不在)가 주는 슬픔 때문이다. 3인칭 죽은 그(그녀의) 죽음으로 나, 1인칭에게 직접적인 슬픔을 안겨주지 않는다. 다만 죽을 걱정하게 한다.

요즈음 거리를 나가면, 예전에 보지 못했던 진풍경(珍風景)이다. 모두가 마스크를 쓴다. 대동단결(大同團結)의 모습이다. 2002년 월드컵의 붉은 악마 이후로 전 국민을 하나로 단결시킨 코드는 아이러니하게도 마스크이다. 왜 마스크를 할까? 이 현상의 이면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존재한다. "모든 종교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죽음의 극복’이며, 이는 다른 말로 하면 불사(不死) 즉 영생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천국이 영생이며, 불교에도 관점은 다르지만 영생에 대한 인식이 있다. 이는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직후의 첫 일성이 '불사의 문은 열렸으니, 귀 있는 자는 들어라'는 것임을 통해서 분명해진다. 유교는 후손을 통한 영생인 제사 주의를 주장했고, 도교의 신선은 말 그대로 장생불사의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종교의 본질에는 방식과 관점은 다르지만 ‘불사에 대한 추구’가 내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중앙승가대, 지현스님) 스님은 그 이유, 즉 영생에 집착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유기체에 내포된 소멸의 불안과 공포, 즉 죽음 때문이다. 과학이 발달하지 못했을 때, 죽음은 계산되지 않는 두려움으로 항상 우리 주변에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치료제가 없고 정보가 부족한 코로나19의 높은 감염률이 우리들에게 일순간 죽음에 대한 공포를 환기시킨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마스크만이 착용 가능한 유일한 방어 수단이라는 인식이 일파만파되며, 전 국민의 마스크 착용이 이루어진다. 때문에 감염자가 전혀 없는 지역에서도 모두가 마스크를 착용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기에 이른다. 물론 내가 다른 이에게 혹시 모를 감염으로 인한 피해를 주기 싫음 마음에서 마스크를 착용하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가 순간, 우리들의 이성을 마비시킨 것이다. 원래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 인간은 모든 꾸밈을 벗고 본능으로 되돌아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본능을 딛고 다시금 이성으로 일어서야만 한다. 우선 개인적인 위생관리를 통해 각자 스스로 면역력을 키우는 것이다.

그래 에피쿠로스가 말한 "죽음을 두려워 하지 마라"는 그의 "사치료법" 중 두 번째 이야기를 오늘 아침 하려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사후 세계를 믿지 않았다. 그에 의하면, 죽음이 인간에게 가장 악한 두려움이라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고민과 집착이 인간 삶의 질과 행복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은 죽은 후에 다른 형태로 변화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을 인용한다. "인간의 모든 형태가 파괴되면, 영혼은 흩어지고 이전에 소유했던 능력을 상실한다." 당시 대부분의 아테네인들은 영혼불멸설을 믿었다.

그는 사후에 영혼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죽음을 걱정하지 않았다.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의 이런 이야기를 자신의 <묵상>에서 주장하던 배철현 교수는 비트겐슈타인의 비문을 소개하였다. "나는 원래 없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 있습니다. 나는 죽은 후에 더 이상 없습니다. 나는 죽음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나도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다. 다만, 내 육체는 사라지고, 우리를 지배하는 하면 3차원의 세계 너머에 내 영혼은 흩어져 남는다고 본다. 21세기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생각도 에피쿠로스의 생각과 같다. 비트겐슈타인도 우리의 죽음은 인간 경험이 제거된 상태로 의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책, 『논리철학 논고』에서 "죽음은 인생의 사건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우리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특징은 '자기보존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생물은 "시간이라는 우주의 최후 심판자"(배철현) 앞에서 '있음(有)'에서 '없음(無)'의 상태로 변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 우리는 그 '없음'을 의식하며 '지금-여기의 있음'을 만끽한다. 죽음이 없다면, 살아있음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내가 '지금-여기'에 살아 있음을 인식하게 하는 필요조건이다. 만약 우리가 영원히 안 죽고 산다면, 지금-여기에 살아있음이 중요하겠는가?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제3막 1장에서 햄릿이 하는 독백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게 더 고귀한가." 이 독백은 삶과 죽음 가운데서 갈팡질팡했던 게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인간 답게 살 수 있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죽어야 할 운명인 인간이라면, 우리에게 붙잡아야 할 지푸라기는 '지금 살아 있는' 이 시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물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삶을 살아낼 방식을 구하기 위해, 잘 살아야 하는 근거를 얻기 위해서이다.

이 문제는 미국 예일대학에서 17년간 연속 최고의 명강의로 꼽히는 셸리 케이건의 『Death』이 잘 말해준다. 이 책은 『죽음이란 무엇인가』 로 한글 번역되어 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죽는다. 이 사실이 우리 삶을 어떻게 흔드는지 질문하면서, 이 책은 노화를 몸으로 자각하고 시간의 흐름을 서서히 인지하면서 짓눌리게 되는 죽음에 대한 걱정으로 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준다. 죽음의 상태를 규정하는 자세가 살아 있는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을 물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삶을 살아낼 방식을 구하기 위해, 잘 살아야 하는 근거를 얻기 위해서이다. 그래 오늘 아침,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주음을 걱정하지 마라"는 이야기를 토헤 우리의 죽음을 소환한 것이다. 셸리 케이건 교수의 <죽음수업>을 통해, 지난 해에 가졌던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참구하는 시간'을 보시려면,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오시면 된다. 죽으면 끝이다. 그러니 살아 있는 이 시간을 잘 누리면 된다. 마음껏 사는 거다. 한 번 사는 인생이니 여러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난 다른 이가 더 행복해지는 일에 도움을 주는 삶을 살고 싶다. 잘 모르는 사후의 세계보단 내가 알 수 있는 오늘의 삶을 살고 싶다. 오늘 아침 사진은 후리지아 꽃이다. 질 때 지더라도, 봄의 싱그러움을 지금-여기서 준다.

죽음에 대한 한 연구 / 박찬일

죽은 지 1년이 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은 지 2년이 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은 지 3년이 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은 지 4년이 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은 지 5년이 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은 지 6년이 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은 지 7년이 되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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