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7.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2021년 4월 4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채현국 어른께 예쁜 명자 꽃을 바친다.
지난 4월 2일 '시대의 어른' 효암 학원 이사장이신 채현국 어른(86세)께서 소천, 하늘 나라로 부르심을 받았다. 내 생각으로 그는 우리들을 무지와 욕망의 세계에서 끌어 올려준 인물이다. 난 3년 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그러나 2015년에 <쓴맛이 사는 맛>이란 책으로 알게 되었다. 왜 그가 시대의 어른인가?
한때 소득세 납부 실적 전국 2위에 오를 정도로 부자였지만, 1972년 10월 유신 이후 박정희 정권의 앞잡이가 될까 봐 사업을 접고 재산을 처분해 동업하던 친구, 광부들에게 나누어 주면서(퇴직금의 3배), 재산, 권력, 명예를 포기하고 자유롭게 사셨다. "나눠준 게 아니라, 돌려준 거"라 말했다. 게다가 의로운 사람들을 뒤에서 남몰래 도와주면서. 그의 주장은 "돈이 생기니까 자꾸 미쳐 가서, 살려고 도망친 거라"라 했다. 나중에 이런 말씀도 했다. "밥은 두 그릇 세 그릇 먹을수록 욕구가 줄어들지만, 돈은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어 지고 끝이 없어진다. 돈에 미친 거다." 이런 말씀도 했다. "돈 버는 게 어떻게 인생의 의미이고 목적이 되겠습니까? 돈이란 놈도 버는 맛을 느끼면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예외는 없다. 돈이나 권력은 마술 같아서, 아무리 작은 거라도 자기가 휘두르기 시작하면 썩는다."
돈. 명예,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자유롭게 살려면,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비워야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는 권력의 앞잡이와 돈 버는 맛에 중독되는 본인이 싫어 자유 인의 길을 선택했다 한다. "거지가 따로 있나. 없어서 구걸하면 거지인 거지. 돈이 많다고 거지가 아니 건 아닌 거지. 아무리 돈이 많아도 더 가지려 전전긍긍하면 그게 거지인 거지."
채현국 어른은 재야에 묻혀 고독한 방랑자로 살아가셨다. 그는 어린 사람들에게 꼰대들처럼 생각을 강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 흐르듯이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나의 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믿었다. 요즈음 열심히 침 튀겨가며 공허한 본인의 이념을 설파하려는 꼰대들의 모습과 비교되었다. 이런 말씀을 하셨다. "책에서는 힘이 안 나온다. 땀 흘리며 생각하는 사람이 옳은 사람이다." 나도, 그처럼, 여기 저기 하이에나처럼 남들에게 훈수를 두려고 찾아다니지 않을 생각이다. 그냥 재야에서 조용히 시시하게 자유롭게 살 생각이다. 그의 죽음 앞에서 다짐한다.
그가 남겼다는 몇 가지 어록은 죽을 때까지 되새겨야 한다. "성공의 반대는 실패가 아닌 포기입니다. 포기만 안 하면 모든 건 다 해결됩니다." "살면서 힘든 육체 노동을 3달 정도만이라도 꼭 해보는 것이 좋다. 이러한 경험을 한 번쯤 해보아야, 살면서 어지간한 일로는 귀찮고 힘들다는 생각을 안 할 거다." 나도 남의 육체적 수고가 아니라, 내 몸의 수고로 살려고 한다. 육체 노동을 아끼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래야 어지간한 고통은 고통으로도 느껴지지 않는 강한 멘탈이 생긴다. "기운 신 장사도 죽을 맛이란 걸 모르고, 기운 없는 사람들은 본인만 그런 줄 안다. 기운신도 죽을 맛인데 창피하기도 해서 강한 척한다는 걸 사람들은 잘 모른다." 사실, 살다 보면, 처음에 본 사람들은 전부 강해 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것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들의 '허세'는 마치 사막의 신기루 같다.
이 시대에 진정한 기운신이 되려면, 고통과 아픔이 필연적으로 따른다. 고통 없이 삶을 논하는 사람들은 김난도 부류이다. 즉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며 내공이 부족하다. 나는, 그처럼, "활빈당(활빈당-예전에 부자의 재물을 빼앗아 다가 가난한 사람을 도와 주기 위하여 결성된 도적의 무리) 주"로 "거리의 철학자"로 살고 싶다. 부조리한 세상에 저항하며 살고 싶다. 그러려면 돈, 권력, 도덕 다 버리고, 나를 소중히 여기며 네 길을 가련다. 그 분의 다음 말을 기억하며, 세상에 주눅 들지 말고, 자신을 행한 쉼 없는 행진을 하며,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오늘도, 우리의 주제와 어울리는 박노해 시인의 시를 공유한다. 채현국 어른의 소천 소식이 오늘 새벽 나를 멈추게 하였다.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박노해
20일간을 겨뤄 온 「투르 드 프랑스」 사이클 대회가
대장정의 막을 내렸습니다.
대회 5연패를 차지한 미국의 암스트롱(31)은
암 선고를 이겨낸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기에
팬들의 감동은 더했습니다.
그러나 타는 듯한 피레네 산맥을 넘고 있던 지난 20일,
온 세상을 주목케 한 순간이 벌어졌습니다.
1위로 달리던 암스트롱이 응원하는 아이의 가방을 피하려다
그만 넘어져 나뒹굴었습니다.
겨우 15초 차로 뒤쫓던 독일의 울리히 선수는
만년 2위의 한을 벗어 던질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멈췄습니다.
암스트롱이 다시 일어나 달리기 시작할 때까지
그는 묵연히 멈춰서 있었습니다.
숨가쁘던 피레네 산맥도
멈출 줄 모르고 질주하던 지구 위의 사람들도
울리히와 함께 숙연히 멈춰선 것만 같았습니다.
대나무는 마디의 멈춤이 있어 곧게 자라고
강물은 굽이 돌아 넉넉한 江心을 이루듯
삶은 아름다운 멈춤을 품고 있어 뿌리 깊어지는가 봅니다.
아,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느니
나의 뼈아픈 순간들아
질주하는 내 삶의 아름다운 멈춤이 되어
나를 다시
내 영혼의 길을 따라 걷게 하라.
채현국 어른의 말을 더 들어 본다. "우린 옳다, 그르다로 살고 있습니다. 이런 것도 주장이 아니고 증명입니다. 말만 주장같이 들리지 절대로 옳다, 그르다는 없습니다. 있다고 하면 우리 인류 전체의 합의가 된 기준일 뿐이지 실제로 옳다 그르다가 있는 게 아닙니다. 합의 이외에는 옳다, 그르다가 있는 게 아닙니다. 합의 이외는 옳다, 그르다는 절대 없으니 기죽지 말고 삽시다. 옳다, 그르다는 힘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저항하지 못하게 하려고 써먹는 제일의 무기입니다." 내 주변에도 돈과 권력으로 또는 자리로 모든 걸 지배하려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돈과 권력 그리고 자리만으로 결코 진심 어린 존경을 얻지 못한다.
그는 궁핍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궁핍과 결핍이란 건 생의 원동력이 된다. 그런 결핍을 느껴야 자기 비하가 끝난다. 자기 합리화 시켜 스스로 비하하게 만드는 세상의 이치라는 것에 용기 있기 자유로울 수 있으려면, 자기를 신뢰하여야 한다. " "자기를 믿으세요. 그 마음만 있으면 사람이 그리 잘못되지 않아요, 자기도 못 믿는데 무슨 일을 합니까? 내가 괜찮은 사람이다. 그렇게 믿으면 그럭저럭 다 해결됩니다. "쓴 맛이 사는 맛이다." 자기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삶 자체가 결정이고, 결정은 늘 모험입니다. 그 결정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어떻게 압니까? 살면서 사고는 얼마든지 납니다. 인생이 그런데 뭐가 두렵습니까?" "거미줄에 걸리는 인생, 절망하지 마라." 그저 내 할 일만 하리라. 늘 성찰 해야 한다. "지금 내가 무언 가에 길들은 결과라는 것을 잊지 말고, 이게 내가 길든 대로 가고 있는지, 내 길 대로 가고 잇는지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나이가 먹어가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지혜를 주는 그의 말과 행동들이 많다. "내가 경험하고 아는 것은 내 확신에서 그쳐 야지 내가 오래 살았다고, 많이 배웠다고 권위나 신념으로 강요하면 안돼요. 나이가 들수록 지식이 많을수록 오히려 어떻게 하면 권력 없이 타협을 이룰 수 있을지, 신념 없이 행동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중요하다. 모두가 다르고 끊임 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뭔 가가 진리라고 믿을 근거도 없어요. 다르지만 함께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이에요." "늙으면 지혜로워진다는 건 거짓말이다. 농경 시대의 꿈 같은 개소리이다." "아비들도 처음부터 썩지는 않았다."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 두어라. 지금 노력하지 않으면 너희들도 저 꼴이 된다"는 말로 세상에 그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세대 차이가 아니라, 사람의 차이이다." 다름을 인정하면 모든 것이 평화롭다. 사람은 모두 각자 다르기 때문이다. "늙으면 입을 닫고, 주머니를 열거나 주머니가 없으면 귀라도 열어라."
또 다른 삶의 통찰 하나. "유명해지는 순간에 사람은 거짓말을 하게 된다. 평범하고 시시한 삶만이 확실하게 행복한 삶이다. 자본주의 사회 경쟁에 속아 남을 딛고 올라서야 잘 사는 거 같지만, 시시하면 당하는 것 같지만, 시시한 사람만이 행복한 사람이다. 사람들에게 조언해준다는 것, 도움 되는 것 같아도 다 독이다. 과일 좀 커진다고 농약 뿌리는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꼴이다." 자신의 학원인 효암 학원 이사장으로 그는 "남 밟고 1등 하라는 학부모가 되지 말고, 부모가 되라"고 말하곤 했다 한다. "1등하려 하지 마라. 학교는 배우는 곳이지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채현국 어른은 몸은 낮게 가슴은 뜨겁게 사셨다고 사람들은 평한다. 그는 이런 말씀도 했다. "삶이란 끊임 없이 묻고 배우고 깨우치는 과정이다, 확실하게 아는 것도 고정관념이다. 세상에 정답이란 건 없다. 한 가지 문제에는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이다." 어린이 같이 거리 없이 맑은 분, 그는 자기 경험에 갇힌 꼰대가 돼 버린 세대를 비판하면서 자기 시대를 돌아 보고 버릴 줄 알았던 분이다. 나도 고정관념과 싸워야 한다고 다짐한다. "그냥 잘못된 것만 우리는 고정관념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천만입니다. 확실하게 아는 것 전부가 고정관념입니다."
이런 문장도 만날 수 있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내가 썩는다. 공부를 하면 썩어도 덜 썩는다. 상 받는 아이들은 상 받지 못하는 아이들 덕분에 상을 받은 것이다." 그는 우상과 허영을 넘어선 당당한 자유 인이었다. 돈과 권력과 명예보다도 책과 사람과 대자연을 더 좋아하셨다. 특히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지식인의 허위 의식에 단호했다. 배움과 성찰의 끈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치열하게 질문하고 뜨겁게 사유 하는 겸손한 자유 인이었다. 그는 늘 자발성을 강조하고 잔소리를 안 하셨다 한다. "공부든 무슨 일이든 스스로 해야 재미가 있다. 시켜서 하는 일은 재미가 없다"는 말만 하셨다 한다. 그에 의하면, "꼰대는 성장을 멈춘 사람이고, 어른은 성장을 계속하는 사람"이다.
사람은 살면서 중요한 것이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 그리고 약속이다. 그런 것을 실천한 채현국 어른은 선한 영향력을 온 몸으로 나누는 자리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돈과 명에,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직접 만들어온 그의 삶은 그 자체가 뜨거운 저항이자 날카로운 정의였다. "누에는 뱃속에 비단이 있어도 벌레에 지나지 않지만, 인간은 뱃속에 똥 말고 뭐가 있습니까? 진정한 존재의 삶은 무엇입니까? 진정으로 함께 살 줄 아는 것이 동학(동학)입니다."
너무 길어졌다. 그처럼, "조금만 덜 치사하고 덜 비겁하게 살자." 오늘은 2021년 부활절이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 즉 부활을 위해 예수는 죽은 거다. 그러니까 죽어야, 우리는 부활한다. 언젠가 채현국 어른은 한 인터뷰(경남도민일보)에서 좋아하는 이의 장례식장에 다녀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죽는 사람이 있어야 새로 태어난 사람도 있는 거요, 모든 생명이 다 그래요. 늙은 별이 폭발하여 새 별이 생기듯이 종말이 있어야 새로운 게 나오는 법이요."
즈와외즈 빠끄(Joyeuses Paques)! 프랑스어로 부활을 축하합니다!란 말이다. 오늘이 부활 주일이다.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는 '하느님을 찬양한다.'는 뜻이다. 나는 아침에 2CELLOS의 들었다. <베네딕투스>는 즈카르야의 노래 "Benedictus deus Israel(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에서 나왔다. 이건 루까 복음 1장 68절이다. '찬미'란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나 위대한 것 따위를 기리어 칭송함"인데, 여기서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기리는 노래'라고 보아야 한다. 길가의 은행나무를 보라. 하느님은 어느 가지 하나도 소홀히 다루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의 하느님에게 가는 길은 '예수가 하느님이다'라고 끊임없이 고백하고 갖가지 예식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 사람들과 뭇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 분 사랑이 우리에게 완성됩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요한 1서 12-16)
예수의 부활절은 각자 스스로 변화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터닝 포인트를 주는 날이다. 그래 부활은 희망이다. 우리도 과거의 잘못된 낡은 악습과 어두운 절망은 모두 무덤 속에 묻어두고 희망 가득한 새 삶으로 이 봄과 함께 부활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고, 우리가 부활의 의미로 사는 것이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비 (0) | 2021.04.05 |
---|---|
시빌레 이야기 (0) | 2021.04.04 |
봄비, 간이역에 서는 기차처럼 (0) | 2021.04.04 |
"죽음을 걱정하지 마라" (0) | 2021.04.04 |
1586.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토요일에 만나는 와인 이야기: 이탈리아 와인(2) (0) | 2021.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