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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길은 광야의 것이다/백무산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모든 틈은 깨진 상처인 동시에 빛이 스며드는 통로인 것처럼, 머뭇거림은 우유부단함처럼 보이지만 나와 타자가 함께 숨 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머뭇거림이 사람을 자기 초월의 방향으로 인도한다. 세상의 어떤 이론도 지혜도 인간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이해에 가까워질 수는 있겠지만 근사치일 뿐이다. ‘알 수 없음’이야말로 생명의 실상이다. 여기서 경외가 시작된다. 알 수 없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이다. 알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지만 결국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허세 부리려는 욕구에서 해방된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할 때 평화가 시작된다.

그런 머뭇거림 속에는 경쟁이 없다. 누구나 자신의 분야에서 탁월을 발휘하여 승리자가 된다. 그 속에는 '자기확신'과 '자기존경'이 있고, 그것들이 자신을 타인과 구별시켜 주는 아우라가 된다. 배철현 선생은 이 아우라의 특징들을 이렇게 열거한다.
• 이 아우라는 사회가 그에게 부여하고 싶은 부, 권력 그리고 명성을 초월한다.
• 이 아우라는 숫자로 사람을 구별하고 차별하는 후진사회에서, 그를 독보적인 존재로 승화시킨다.
• 이 아우라에서 나는 자기확신과 자기존경, 그리고 탁월(자유 자재함)은 수년 혹은 수십 년 동안 묵묵히 시행착오를 거친 수련과 연습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 이 아우라를 가진 탁월한 자는 명성을 얻기도 하고 약간의 부를 축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탁월한 사람들 대부분은 알려지지 않고 조용히 인생을 유유자적하며 산다. 고독이 그들을 탁월하게 만드는 기반이자 무기이기 때문이다.
• 이 아우라를 가진 탁월한 자유인들은 남들이 보기에는 가난한 삶을 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인정이나 부의 축적은, 스스로에게 가지는 자기 신뢰와 자기존경에 비하면 사소한 것들이다. 자기 신뢰와 자기존경은 어떤 권력이나 부도, 혹은 바람과 같은 명성도 함부로 도달할 수 없는 성배다.
• 이 아우라를 지닌 탁월의 보상은 명성이 아니라 자기존경이다. 자신을 존경하는 이유는 타인의 박수나 환호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자신만의 천부적인 소질을 발견했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순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 아우라를 지닌 탁월한 인간에게 타인이 부여하는 인정이나 입증이 필요 없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시를 한 편 공유하고, 계속 이어간다. 좀 길지만 백무산 시인의 <길은 광야의 것이다>를 택했다. 자기확신을 위해서이다.

길은 광야의 것이다/백무산

얼마를 헤쳐왔나 지나온
길들은 멀고 아득하다
그러나 저 아스라한 모든 길들은 무심하고
나는 한 자리에서 움직였던 것 같지가 않다

가야 할 길은 얼마나 새로우며
남은 길은 또 얼마나 설레게 할건가
하지만 길은 기쁨과 희망을 안겨주었고
동시에 나락으로 내몰았다
나에게 확신을 주었고 또 혼란의 늪으로 내던졌다

길을 안다고 나는 감히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되돌아 서서
길의 끝이 아니라 시작된 곳을 찾았을 때
길이 아니라 길을 내려 길을 보았을 때
길은 저 거친 대지의 것이었다
나는 대지에서 달아나지 않았으므로
모든 것은 희생되었다 그러자,
한순간에 펼쳐진 바다와 같은 아, 하늘에 맞닿아
일렁이는 끝없는 광야의 그늘을 나는 보았다

우리들 삶은 그곳에서 더이상 측량되지 않는다
우리들 꿈은 더이상 산술이 아니다
길은 어디에나 있고 또 없다

길은 대지 위에 있으나
길은 자주 대지를 단순화한다
때로는 대지에서 자란 우리를
대지에서 추방하기도 한다
우리가 헤쳐온 길이 우릴 버리기도 한다
길은 자주 대지의 평등을
욕망의 평등으로 변질시키고
대지의 선한 의지를
권력의 사욕으로 타락시킨다

삶이란 오고 가는 것일까
인생이란 흐르는 길 위의 흔적일까
저기 출렁이는 물결을 보아라
허공에 맞닿아 끝없이 일렁이는 물결을 보아라

길이란 길은 광야 위에 있다
길 위에 머물지도 말고 길 밖에 서지도 말라
길이란 길은 광야의 것이다
삶이란 흐르는 길 위의 흔적이 아니다
일렁이어라 허공 가운데
끝없이 일렁이어라 다시 저 광야의
끝자락에서 푸른 파도처럼 일어서는
길을 보리라

배철현 선생은 그런 사람의 예를 들어 준다.
(1) 소크라테스이다. 그는 아테네 법정의 인정을 위해 법정 연설하지 않았다. 그에게 불리하고 엉뚱한 판결에 순응한 이유는, 사회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법의 가치를 신봉했기 때문이다.
(2) 예수이다. 그는 당시 유대인들의 최고 판결기관인 산헤드린의 공식적인 인정이 필요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바칠 만한 가치인 '사랑'을 자신의 삶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에 기꺼이 올라간 것이다.

잘 생각할 것은 위에서 말한 탁월은, 한 마디로, 인정을 받기 힘들다. 인정을 받기 위해 초조하게 기다리거나 그 대상에 아부한다면, 그는 이미 자발적인 노예다. 배철현 선생의 멋진 설명을 직접 들어 본다. "천재는 타인들이 보기에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에 집착하는 인내다. 성인은 그것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이런 탁월과 자기존경이 자유롭고 창의적인 인간의 표식이라면, 사회나 전통이 정해놓은 규범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는 소극은 '자발적인 노예'의 계급장이다. 그 계급장을 따기 위해, 청소년 시절에 건강을 해치고 막대한 돈을 들여가며 과외를 하고, 돈을 잘 번다는 직업을 가지기 위해 인생의 황금기를 철장과 같은 고시원에서 취준생으로 산다. 그런 자들에게 정신질환은 덤이다. 자유로운 자는 자신의 유일무이한 삶을 창조하지만, 자발적인 노예들은 관습, 평판, 의견에 감금되어 사회가 그에게 어울리는 삶을 정하도록 허용한다."

철학자 리차드 테일러는 그런 현대인들을 '자발적인 노예'라고 불렀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노예인 줄 모르고 지낸다. 개인의 자유와 탁월을 보장하는 길은 좁다. 이 길은 처음에는 좁아, 나의 최선 이상을 요구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넓어진다. 밤에 집으로 돌아와 거울을 보며 자신에게 박수를 보낸다. 어떤 이는 양봉으로, 어떤 이는 춤으로, 어떤 이는 글로, 어떤 이는 요리로, 어떤 이는 바둑으로, 어떤 이는 사업으로 자신의 탁월을 자유롭게 수련한다. 자신이 정복하고 싶은 각자의 에베레스트산에 조금씩 올라가기 때문에, 매일 매일이 산 정상이다. 오늘도 그 정상을 위해 걸을 뿐이다. 힘이 난다.

우리는 흔히 남의 글을 잘 읽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하는 것은 훈련이 필요하다. 사유의 시선을 탁월하게 올려야 글이 잘 익힌다. 이어지는 글은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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