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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우주 안에 존재하는 만물의 문법은 변화(變化)이다.

197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4월 30일)

속절없이 "잔인한" 4월이 다 갔다. 오늘이 4월 30일, 4월의 마지막 날이다. 영국 시인 엘리엇은 자신의 시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썼다. 이렇게 시작한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 “

왜 "잔인한"가? 4월이 잔인한 것은 마치 겨울잠을 자듯 자기 존재를 자각하지 않으려는 인간들을 뒤흔들어 깨우는 봄 때문이라는 것이다. 엘리엇은 봄비가 잠든 식물 뿌리를 뒤흔드는 4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며, 망각의 눈(雪)으로 덮인 겨울이 차라리 따뜻하다고 했다. 얼어붙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에게 약동과 변화를 일깨우는 봄의 정신이 숭고하면서도 잔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자연이 매일매일 자신을 변신시키지만, 인간은 주저하고 안주하고 편함에 취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낙엽들을 헤치고 삐쳐 나오는 풀잎들은 현재에 안주하는 법이 없다. 항상 자신이 변화해야 할 모습으로 변한다. 만일 내일도 이런 모습을 간직한다면, 그 풀잎들은 죽은 것이다. 자신이 되어야만 하고 될 수 있는 모습으로 매 순간 변한다. 이런 식으로 우주 안에 있는 만물은 그 개체만의 고유한 성격이 있어, 인간을 제외한 동물과 식물은, 그 고유한 특징을 시간과 계절의 흐름에 맞추어 조화롭게 변신한다. 그 속도에 아연실색(啞然失色)할 정도이다.

고대 그리스 인들은 모든 인간이 세상에 다른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그 신분은 공동체인 도시에서 자기 나름의 고유임무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각자 그 고유 임무에 따라 각자 도달해야 할 이상적인 상태를 그리스어로 '아레테'라 한다. 우리는 흔히 이걸 덕(德)으로 번역하지만, 이해가 쉽지 않은 단어이다. 아레테는 그리스 어에서 '선, 탁월함, 남성 다움, 힘, 용기, 성격, 명성, 영광, 위엄'이란 의미 뿐만 아니라, '기적, 경의, 경배의 대상'이란 의미도 있다. 이 다양한 의미를 지닌 단어들의 공통점은 '고유(固有)'이다. 우리 모두는 고유(固有)하기 때에, 우리 각자가 이 세상에서 하는 일 중 하찮은 것은 하나도 없다. 어떠한 일을 하든, 진심으로 헌신하고 노력한다면, 그 일은 세상에서 가장 고유하고 귀중한, 즉 고귀(高貴)한 일이 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우주 안에 존재하는 만물의 문법은 변화(變化)이다. 눈 깜박할 사이의 나도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현재의 나에 만족하고 탐닉하고 안주하는 사람은 시시하다. 미래에 자신이 건축해야 할 자신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되는 사람을 만나면 신나고 즐겁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자신을 위해 변화무쌍하게 변화 중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의 엉뚱함, 신남, 거침 없음에 매료된다. 변화하는 인간은, 지금까지의 자신을 살해하고 앞으로 될 자신을 시도하고 연습하는 사람이다. 인류의 현인들은 이 과정을 해탈, 각성, 회개, 희생, 오상아(吾喪我, 내가 나를 장례시킨다), 그로시스 등 각 문화 전통에서 개념들을 만들어 냈다. 현재의 내 모습에 대해 불만을 깨닫고 그 모습을 과감하게 버리는 행위가 희생이다.

4월을 이젠 버리고, 변화의 5월을 맞이한다. 이것 저것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은 데, 이젠 선택과 집중을 할 때이다. 바꾸고 변화를 하여야 할 때이다. 이 변화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주역>>떠오른다. <<주역>>의 핵심은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易, 窮則變, 變則通, 通則久, 역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이다. "역(易)"은 흐름 바꾼다는 거다. 여기서 '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즉 양적 변화와 양적 축적이 극에 달한 상태를 말한다. 그런 상태에서는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거다. 그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거다. 이게 통(通)인 거고 닫히는 것이 아니라 열리는 상황이다. 그러니까 '개신(開新)'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久, 영원)'라 할 수 있는 거다.

고 신영복 교수는 <<주역>> 사상을 한마디로 하면, "변화"라 했다. 변화를 읽음으로써 고난을 피하려는 '피고취락(避苦取樂, )의 현실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변화를 사전에 읽어 냄으로써 대응할 수 있고, 또한 변화 그 자체를 조직함으로써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는 거다. 우리의 삶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조직한 관계망이다. 선택된 여러 부분이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것이 자신의 일상이다. 그러니 우리는 성찰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갖고 관계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서 성찰은 자기 중심이 아니다. 시각을 외부에 두고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다. 자기가 어떤 관계 속에 있는 가를 깨닫는 거다.

이러한 관계에 필요한 것이 <<주역>>은 절제와 겸손이라 말한다. 여기서 절제와 겸손은 자기가 구성하고 조직한 관계망의 상대성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로마법이 로마 이외에는 통하지 않는 것을 잊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겸손은 자기를 낮추고 뒤에 세우며, 자기의 존재를 상대 화하여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 배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절제는 자기를 작게 가지는 것이다. 주장을 자제하고 욕망을 자제하고, 매사에 지나치지 않도록 하는 거다. 그러면 부딪칠 일이 없다.

그런 터닝 포인트를 잡으라고, 4월이 가고, 5월이 오는 거다. 그런 마음챙김을 위해, 주말 농장에 가다, 지인의 전화를 받고, 어제는 오전부터, 골프 채를 선물한 동네 지인과 함께, 동네 5일 장에 나가 막걸리를 마셨더니, 머리가 아프다. 그러나 꽃잎이 지는 4월 붙잡지 않고, 연 초록 속 깊어 가는 푸른 5월을 맞이하기로 다짐하는 아침이다. "4월이 그렇게 떠나고 나면/눈부신 오월이 아카시아 향기로/다가"온다. 꽃잎이 다 진다 해도 연초록 속 깊어 가는 푸른 사랑, 다시 5월이 온다.


4월이 떠나고 나면/목필균

꽃들아, 4월의 아름다운 꽃들아.
지거라, 한 잎 남김없이 다 지거라
가슴에 만발했던 시름들
너와 함께 다 떠나버리게

지다 보면
다시 피어날 날이 가까이 오고
피다 보면 질 날이 더 가까워지는 것
새순 돋아 무성해질 푸르름
네가 간다 한들 설음 뿐이겠느냐

4월이 그렇게 떠나고 나면
눈부신 오월이 아카시아 향기로
다가오고

바람에 스러진 네 모습
이른 아침, 맑은 이슬로 피어날 것을


<<주역>>을 잘 모르지만, <<주역>> 독법에서 가장 먼저 설명해야 하는 것이 '위(位)'라 한다. 즉 '자리'이다. <<주역>>은 효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경우를 ‘득위(得位)’라 하고 잘못된 자리에 가 있는 경우를 ‘실위(失位)’라고 한다. '득위'는 아름답지만 '실위'는 위태롭다. <<주역>>의 핵심은 관계론이다. '길흉화복'의 근원은 잘못된 자리에서 비롯된다고 봤다. 내가 있는 '자리', 즉 '난 누구, 여긴 어디'를 묵상하며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어떤 '직위(職位)'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우주 속에서 나의 위치까지 확장되는 용어이다. 한문으로 하면 '위(位)'이다.

<<주역>>에 따르면, 제자리를 찾는 것을 '득위', 그렇지 못한 것을 '실위'라 했다. 득위는 만사형통이지만, 실위는 만사 불행의 근원이다. 잘못된 자리는 본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불행하게 한다. 고 신영복 교수는 자신의 책, <<담론>>에서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하게 된다. 제 한 몸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트리고 일을 그르친다”고 하시면서, 우리들에게 자기 자신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 ‘70%의 자리’를 권한다. 이게 '득위'의 비결이라 한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 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 주장을 '그릇 론'이라 한다. “30 정도의 여유, 30 정도의 여백이 창조의 공간이 된다.” 반대로 70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 받는 자리에 가면 어떻게 될까? “그 경우 부족한 30을 함량 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거나 권위로 채우거나 거짓으로 채울 수밖에 없다.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 난다.” 또한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자리와 관련해 특히 주의해야 하는 것은 권력의 자리에 앉아서 그 자리의 권능을 자기 개인의 능력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집터보다 집이 크면 그 터의 기(氣)가 건물에 눌린다. 집과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집이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집에 눌린다. 그 사람의 됨됨이보다 조금 작은 듯한 집이 좋다. 동아시아 철학의 관계론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자기의 능력을 키우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먼저 자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걸 강조한다. 개인의 능력은 개인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인이 발 딛고 있는 위치(난 누구, 여긴 어디)와 관계 속에 생성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역>>에 따르면, '중(中)'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제일 위에 있거나 제일 앞에 있는 것을 선호하는 경쟁 사회의 원리와는 다르다. 위의 ㅊRaus에서 중간(중)은 무난한 자리이기도 하고, 앞과 뒤에 많은 사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간은 그물코처럼 앞뒤로 많은 관계를 맺고 있는 자리라는 거다. 그만큼 영향을 많이 받고, 영향을 많이 미치게 되는 자리이다. 실질적으로 선두가 전체 국면을 주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선두는 겨우 자기 한 몸 간수에 여력이 있을 수 없는 고단한 처지이다. 그와 반대로 맨 꼴찌는 마음 편한 자리이기는 하지만, 그곳은 무엇을 도모하거나 실천하기에는 너무나 후미진 공간이다. 더불어 관계 맺기가 어려운 위치이다.

<<주역>>에서 그 다음 중요한 개념이 '응(應)'이다. '위'의 개념이 개별 단위의 관계로 게인적인 관점이라면, '응'은 개체와 개체가 이루어 내는 관계 론으로 사회적 관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위치(위)를 잃었더라도 '응'을 이루고 있다면 허물이 없다는 거다. 예컨대, 집이 좋은 것보다 이웃이 좋은 것이 훨씬 더 큰 복이라는 거다. 산다는 것은 곧 사람을 만나는 일고 보면, '응'의 문제는 중요한 거다. 직장도 직장 동료들이 좋은 곳이 좋은 직장이다. 우리의 삶을 저변에서 지탱하는 인간 관계와 신뢰가 바로 '응'의 내용이다. 오늘은 여기서 멈춘다. <<주역>>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 <<주역>>을 제대로 공부할 생각이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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