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전 오늘 아침 공유했던 글입니다.
4월의 영화 <나는 부정한다>: "진실은 저절로 밝혀지지 않는다.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다."
원제목은 denial(부정)이다. 거짓이 승리하는 것을, 진실이 침묵하는 것을 <나는 부정한다.>
<나는 부정한다>는 말은 중의적이다. 하나는 영화의 내용 그대로 아우슈비츠에 대한 부정이고, 또 하나는 진실 왜곡에 맞서기 위해 길고 긴 법정 공방에서 흥분을 배척하는 부정이다.
"네 양심을 다른 삶에게 맡긴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네요." 진실을 향한 싸움은 때론 전략적이어야 한다.
홀로코스트(쇼아, 유대인대학살)를 부정하는 역사학자와 이를 규탄하는 역사학자 사이의 대결을 극화한 것이다.
법은 자신의 말을 진실인 것으로 증명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문제는 거짓은 자신을 변명할 필요가 없고, 진실이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 영국 법원의 사건이었다. 흔히는 거짓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재판인데...
로마법이 이렇단다. "할 말이 있으면 뒤에서 은밀하게 비방하지 말고 재판소에 나와서 하라."는 원칙이다.
이 영화에서는 진실을 입막음할 뿐만 아니라, 진실과 역사와 정의를 법정에 세우는 모순을 보여준다. 그러나 2013년 에 법이 바뀌었다. 이제는 명예훼손적 발언이 공공의 이익이 되면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어빙은 파산하고, 오스트리아에서 체포되어 3년 형을 선고받기도 한다. 오스트리아는 홀로코스트 부정을 범죄로 처벌한다.
영화를 보면서 생각한 것은 진실 부정을 밝히는 데 자료와 감성 또는 열정만으로 접근하는 것이 한계가 되고, 오히려 패배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거짓을 누르기 위해서는 감정적으로 대처할 것이 아니라 차분하게 논리적으로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역사적 진실 파악의 어려움을 말하는 한편 법정의 언어와 논리, 프레임 속에서 역사가 설 장소가 어디에 있는지도 끈질기게 묻고 있다. 세 번째는 홀로코스트 자체를 촛점에 두지 않은 것은 비슷한 역사를 가진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의 과제를 말하려던 것 같다. 아직도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은 세월호 사건 재판이 자꾸 머리에 떠올랐다.
이 영화는 거짓 선동에 대처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선동가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니 적당히 타협하라고 만류한다. 그러나 주인공은 끝까지 법정에서 싸워 이긴다. 역사의 진보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진실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수고스러운 대가가 따른다. 그 수고스러움이 필요한 것은 거짓 선동은 알아서 사라지기도 하지만, 어떤 거짓은 끈질기게 진실을 괴롭힌다. 믿고 싶지 앟은 불편한 진실일수록 사람들은 일를 회피하려고 한다. 이런 심리를 따, SNS를 통해 거짓 뉴스가 판을 친다. 속상할 때가 많다. 그 거짓의 선동에 속아가는 주변 사람들을 볼 때마다. 참 진실은 발이 느리고, 거짓은 사람의 마음을 쉽게 흔든다.
진실을 위해 우리는 때론 거미줄처럼 기다려야 한다.
거미줄/정호승
산 입에 거미줄을 쳐도
거미줄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거미줄에 걸린 아침 이슬이
햇살에 맑게 빛날 때다
송이송이 소나기가 매달려 있을 때다
산 입에 거미줄을 쳐도
거미줄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진실은 알지만 기다리고 있을 때다
진실에도 기다림이 필요하다고
진실은 기다림을 필요로 한다고
조용히 조용히 말하고 있을 때다
어빙이 홀로코스트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간단하다. 남아 있는 증거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는 증거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겠다면서 사람들을 현혹한다. 당시 나치는 가스실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눈으로는 알 수 없고, 나치가 전쟁이 끝날 때 이곳을 다이나마이트로 폭파시켜 현재는 건물의 잔해만 남아 있다. 어빙은 원래 노동범 수용소로 만들어진 아우슈비츠가 가스실로 쓰이기에 용도가 맞지 않고, 가스실로 쓰였더라도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시체들에 기생한 이를 멸균하는 곳이었다고 주장한다. 생존자의 눈물겨운 증언에 대해 어빙은 그들이 돈을 벌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하며 모욕하기까지 한다.
어빙같은 인물은 어디에도 있다. 일본군 위안부를 부정하거나 광주 민주화 운동을 부정하거나, 박근혜가 공권력으로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다고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역사 왜곡까지 포용하는 것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아니다. 문제는 어빙 같은 사람은 팩트가 중요하지 않다. 종교적 신념과 같다. 문제는 믿음에 맹목적인 사람들은 결코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신도처럼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살 뿐이다.
"두꺼운 분량의 법정 판결문이 향후 어빙의 주장이 무분별하게 퍼지는 것을 막아주는 거대한 방어막이 될 것이다."라는 대사를 마지막에 우리는 듣는다. 진실은 부정할 수 없는 논리로 거짓 선동을 막아내면서 역사라는 대지 위에 뿌리를 내린다. 지난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이 오버랩되었다.
문제는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은 공짜로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팀웍으로 이루어질 때 더 값지다.
이 영화는 <보디가드>로 유명한 73세 영국 감독 믹 잭슨의 2016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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