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2월 11일)

지난 설 명절 이후로 노자의 <<도덕경>>에 빠져 있다. 특히 "도"의 세계에서 유영(遊泳)하고 있다. 알듯, 모를듯하다. 노자의 말처럼, 도의 세계는 현묘(玄妙)하다. 그래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말은 "도법자연(道法自然)"이다.
<<도덕경>> 25편에 나오는 말이다.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에서 나왔다. 이를 도식화 하면, "인-지-천-도-자연"이다. 여기서 우리는 흔히 법(法)을 '본받다'로 해석한다. 그래 "인간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로 해석한다. 노자는, 공자처럼, 어떤 정해진 법칙들, 즉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과 같은 가치를 유형의 가치로 결정하고, 그것을 수용하지 않는다. 무위(無爲)를 덕으로 여기는 노자가 생각하는 '법'의 의미는 다르다고 본다.
법(法) 자를 파지하면, 물(水)이 자연스런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면서, 만물을 이롭게 한다. 물은, 상선약수(上善若水, 지극히 착한 것은 물과 같다)라는 말처럼,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자신을 드러내지도 타인과 다투지도 않는다. 또한 물은 겸허(謙虛)가 몸에 배어 있어 언제나 낮은 곳으로 스스로 저절로 아무 소리도내지 않고 흘러 들어간다. 그러니까 법은 물과 같은 몸가짐이며 활동이다.
그런 측면에서 위의 문장을 다시 번역하면, "인간은 발을 땅에 디디고 살면서, 다른 인간들과 잘 어울려 살 뿐만 아니라. 지구의 동거존재인 다른 동물들과 식물들과 잘 어울려 산다. 땅에 있는 동물과 식물들은, 하늘이 가져오는 물, 공기, 햇빛을 흠뻑 받으면서, 주어진 짧은 수명을 살면서, 하늘에 한 점 부끄런 없이 산다. 저 하늘에 있는 해, 달 그리고 모든 행성들은 지난 수 억년 동안 그랬듯이, 앞으로도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하염없이 갈 것이다. 그 길을 이탈하면 우주가 혼돈에 빠지기 때문이다. 우주가 운영하는 법칙인 도는 자연스럽다. 물과 같이 고요하게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저 낮은 곳으로 조용하게 흘러간다."
인간은 땅을 따라야 한다. 땅이 없다면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지법천(地法天)이다. 땅은 하늘을 따라야 한다. 땅에 하늘이 없으면 못산다. 그 다음은 천법도(天法道)이다. 하늘은 도를 따라야 한다. 다시 말해, 우주의 질서를 따라야 한다. 마지막으로 도법자연(道法自然)이다. 도는 자연을 따라야 한다. 그러니까 스스로를 따르는 것이 도이다. 사회 속에서 이렇게 살기 쉽지 않지만, 나 스스로의 생각과 원칙을 따라 사는 사람은 진정 자유로운 사람일 것이다. 여기서 자연은 우리가 보통 말하는 자연 현상이라 기보다는 억지로 지어낸 행위가 아닌, "있는 그대로, 저절로 그러한 것", 즉 무위성(無爲性)을 자연이라 한 것이다. 자연은 늘 균형을 찾는다.
요즈음 자연, 즉 도(道)가 보여주는 균형을 잃었다. 할 일은 많은데, 잘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없다. 우선 코로나-19로 일상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은 온통 3월 9일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 쏠려 있다. 빨리 지나갔으면 한다. 그리고 그 시점을 계기로 우리 사회가 새롭게 변했으면 한다. 특히 언론의 지평이 바뀌어 우리들의 시야를 혼탁하게 하지 않았으면 한다. "도'의 세계를 잘 회복했으면 한다. 돈이면 다 된다는 이 시대의 흐름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이번 북경 동계 올림픽에서 클로이 김이라는 한국계 미국 선수에 관심이 갔다. 지난 평창 올림픽에 이어 스노보드 여자 하프파이프에서 2연패를 했다고 한다. 그녀는 “쓰레기통에 버린 평창 금메달, 다시 꺼냈다.” 4년 전 내 <인문 일기>에 그녀가 평창에서 했던 말을 적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아빠는 항상 말씀하셨어요. 만약에 처음 무엇을 배워서 처음 시도하자마자 잘할 수 있다면 모두가 프로가 되고 모두가 성공할 것이라고요. 노력을 해야하죠. 하지만 동시에 즐길 줄도 알아야 하죠. 그둘 사이에 균형을 찾는 게 중요해요. 그래야 성공할 수 있는 거죠." 이번 대회에서는, 평창 올림픽 이후 겪었던 정신적 어려움을 숨기지 않았던 클로이 김은 “어린 아이들이 내 이야기를 듣고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 안 좋은 날이 좀 있더라도 괜찮다는 것, 결국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런 즐거운 소식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남은 '속상함'은 어떤 한 대선 후보 때문이다. 왜 그럴까? 그의 오만함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한마디로 ‘권력 중독’ 때문같다. 실제로 여러 학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람이 높은 지위에 오르면 테스토스테론의 분비가 왕성해지면서 비도덕적인 행동을 해도 사회적으로 문제가 없으리라 착각하고, 자신이 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이유로 비도덕적인 행동을 합리화한다는 것이다. 고 정채봉 선생님의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에 나오는 이야기를 옮긴다. 세탁소에 갓 들어온 새 옷걸이에게 헌 옷걸이가 한마디 했다. “너는 옷걸이라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지 말 길 바란다.” "왜 옷걸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시는 지요?” “잠깐 씩 입혀지는 옷이 자기 신분인 양 교만해지는 옷걸이들을 그동안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분의 시를 공유한다.
"안회야, 너 참 대단하구나! 한 바구니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로 끼니를 때우고, 누추한 거리에서 구차하게 지내는 것을 딴 사람 같으면 우울해하고 아주 힘들어 할 터인데, 너는 그렇게 살면서도 자신의 즐거워하는 바를 달리하지 않으니 정말 대단하구나!" <<논어>>의 "옹야" 편에 나오는 공자가 보는 제자 안회의 모습이다. 최근에 겪는 불안을 도의 세계에 맡기고, "안빈낙도(安貧樂道)"하고 싶어 오늘 아침 공유한다.
글이 길어진다. 여기서 멈춘다.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만남/정채봉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이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 오니까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이다
피어 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가장 비천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이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다 닳았을 때는 던져 버리니까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이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 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 주니까
"안빈낙도"는 산 속으로 들어가서, 비록 가난하더라도 걱정 하나 없이 맘 편히 지내는 일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생각한다. 여기서 더 중요한 말이 '낙도(樂道)'라고 본다. '안빈(安貧)'에만 초점을 맞추어 가볍게 사용하면, 삶 속에서 안빈낙도의 정신을 생산하지 못한다. 나는 안회의 모습에서 "낙도"를 읽었다. 가난함을 즐기는 태도보다, 가난함 속에서도 마음이 변하여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거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신념이 흔들리지 않고, 그 가난함 속에서 가질 수 있는 즐거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모습을 엿보았다. 이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외부적인 것에 탓을 하거나 원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중심을 굳건하게 잡은 후 외부에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삶의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안회가 "즐거워하던 바를 달리하지 않았다"는 것은 '도'의 높이에서 실현되는 삶을 추구하는 태도를 잃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것을 짧게 말해, '안빈낙도'로 요약할 수 있는 것이다. 안빈낙도는 가난해서 할 수 없이 걱정하지 않고 편안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 가난으로 다른 이를 위해 절약하고 덜 먹고, 덜 소비하며 풍류(風流)를 즐기는 일이다. 여기서 '풍류'는 즐거워 하며, 감각적 쾌락을 절제하여 도의 수준, 고양되고 절제된 즐거움에 이르러 그 '도'를 즐기는 것이다.
우리는 이 표현을 자신의 직접적인 삶 속에서 생산하지 못하고, 그냥 말로만 들여와서 쓰는 사람들은 생산될 때의 두터운 의미를 놓친 채 흔히 얇고 가볍게 사용한다. '안빈'에만 무게를 두고, '낙도'는 가볍게 여긴다. 그냥 세상사의 무게를 내던져버리고, 가난하더라도 아무 걱정 없이 맘만 편하면 '안빈낙도'라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 가난을 편하게 대하는 것 정도에서 그칠 말이 아니다. 가난하더라도 그 가난 때문에 자신의 수준을 낮추지 않고, 당당함을 잃지 않는 것이 '안빈'이다.
이 때 가난은 자신의 무능이나 게으름 때문에 야기된 것이 아니라, 부를 일구는 일보다는 원래 가졌던 더 높은 지향을 지키고 실현하느라 부를 일굴 겨를이 없어 맞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적극적으로 '자초한' 가난이다. 여기서 '자초(自招)'란 말이 흥미롭다. 난 '자초한 고독'이란 말도 좋아한다. 스스로, 즉 다른 외부적 요인에 의하지 않은 자기가 만들어 낸 고독을 말하는 것이다. 왜 자초했느냐 하면, 그 높은 지향이 바로 도(道)로 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안빈낙도'에서 방점은 '안빈'에 있지 않고, '낙도'에 있다.' 삶 속에서 '도'를 실천하려는 의지를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는 정도의 높이를 가지고 있는 가난한 사람이 비로소 '안빈낙도'할 수 있다. 가난 속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고, '도'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발휘하는 것이 '안빈낙도'이다.
《논어(論語)》中 옹야편(雍也篇)에 나오는 말이다. "知之者는 不如好之者요, 好之者는 不如樂之者니라(지지자는 불여호지자요, 호지자는 불여락지자니라)." 이 말에 답을 찾아 본다. "알기만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보다 못하다." 그러니까 "지지자‹호지자‹락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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