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2월 10일)

나는 코로나-19로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기회에 나를 수련하는 시간을 보낸다. 지난 달에 <<장자>> 읽기를 끝내고, 이번 달부터 노자의 <<도덕경>>을 꼼꼼하게 도반들과 함께 읽고 있다. 오늘은 벌써 제4장을 읽을 차례이다. 원문으로 읽고, 각자 떠오르는 생각들을 두서 없이 말한다. 많은 통찰들이 튀어나온다. 즐거운 사유의 시간이고, 마음 바꾸는 회심의 시간이 된다. 언젠가 <<도덕경>>을 잘 모르고, 카톡으로 보내온 다음 글을 적어 둔 적이 있다. 오늘 아침 공유한다.
제목은 "노자의 <<도덕경>>에서 배우는 인생 9계명"이었다. 화장실에 붙어 있는 그렇고 그런 문구 같지만, 하나 하나 깊이 생각하게 하는 것들이다.
1. 우울한 사람은 과거에 살고, 불안한 사람은 미래에 살고, 평안(平安)한 사람은 현재에 산다.
2. 불신(不信)하는 사람은 불신을 당한다.
3. 가지 않으면 이르지 못하고, 하지 않으면 이루지 못한다. 아무리 가깝게 있어도 내가 팔을 뻗지 않으면 결코 원하는 것을 잡을 수 없다.
4. 누군가 너에게 해악을 끼치거든 앙갚음하려 들지 말고, 강가에 고요히 앉아 강물을 바라보아라. 그럼 머지않아 그의 시체가 떠내려 올 것이다.
5. 진실된 말은 꾸밈이 없고, 꾸밈이 있는 말엔 진실이 없다.
6. 그릇은 비어 있어야만 무엇을 담을 수가 있다.
7. 행복을 탐욕스럽게 쫓지 말며, 두려워하지 마라.
8. 적게 가지는 것이 진짜 소유이다. 많이 가지는 것은 혼란이다.
9. 과도한 욕망보다 큰 참사는 없다. 불만족보다 큰 죄는 없다. 그리고 탐욕보다 큰 재앙은 없다.
이런 이야기들을 원문을 인용하며, 계속 <인문 일기>에서 정리해 볼 생각이다. 우리는 지금 <<도덕경>> 제2장을 이야기하면서, 노자가 보는 세상의 모습을 살펴보고 있다.
③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고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교,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이어지는 문장이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며, 긺과 짧음은 서로 겨루며,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음과 소리는 서로 어울리며,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도올 김용옥)고 했다. 오강남은 이렇게 번역했다. "그러므로 가지고 못 가짐은 서로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 어려움과 쉬움도 서로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 길고 짧음도 서로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 높고 낮음도 서로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 악기 소리와 목소리도 서로의 관계에서 어울리는 것, 앞과 뒤도 서로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제는 첫 단어 "유무상생" 이야기를 했다. "유무상생"은 노자가 말하는 세상의 원리이다. 없음과 있음은 대립의 개념이 아니고, 없음이 있기에, 있음이 존재한다는 거다. 두 줄로 꼬인 새끼줄을 이 세계, 아니 우주의 원리라는 거다.
그 다음 문장에서 "장단상교(長短相較)"는 "길고 짧음도 서로의 비교에서 나오는 것"라는 말인데, 다음과 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길다고 하는 것은 짧은 것이 있을 때만 가능하고, 반대로 짧다고 하는 것도 긴 것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길다', '짧다' 하는 것은 독립적인 단독 개념이 아니라, 서로 불가분으로 의존하는 상대 개념이다. 아니면, 길다고 하는 것도 그보다 더 긴 것에 비하면 짧은 것이다. 짧다고 하는 것도 그보다 더 짧은 것에 비하면 긴 것이 된다. 한 가지 사물이 서로의 비교의 관계에서 길기도 하고, 동시에 짧기도 하다는 뜻이다.
오강남은 이런 예를 들어 설명한다. 내 손의 손가락이 '길다'고 할 때 그 길다고 하는 것이 내 손가락 자체에 본질적으로 들어 있는 성질로 보는 것이 보통의 상식적인 관찰인데, 이런 식으로 사물을 보는 것을 '본질론적 사고'로, '본질주의적 세계관'이리고도 할 수 있다. 그 세계관에서 모든 것은 각자의 고유한 본질을 가지고 그 본질 때문에 그것이 된다는 거다. 노자는 이런 세계관과 다른 방향에 서 있다. 내 손가락이 길다고 하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서로의 비교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길고 짧음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는 것 등을 보라는 것이 노자의 주장이다. 이런 식으로 사물을 보는 것을 비본질적 사고"로, '비본질적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분별의 세계, 일상적 상식의 세계를 초탈하라는 것이다. 노자는 어느 것이나 그 반대편 것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그것이 된다고 보는 거다.
얼마 남지 않는 대통령 선거로 양 진영이 크게 대립한다. 오늘 아침 나의 <인문 일기>를 보고, 공존(共存)하고 상생(相生)하는 길을 좀 찾았으면 한다. 노자에 따르면, 이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은 그 반대편 것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그것이 된다. 모든 것은 그 반대편을 향해 항상 열려 있다는 것을 알라고 한다. 나부터 금을 긋지 말고, 다 받아들이자고 다짐한다. 우리 시대는 끊임없는 금 긋기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것을 금 밖으로 쫓아낸다. 우리는 금을 긋고, 무지로 서로 배척한다. 그 금 긋기와 몰아내기가 배제의 논리이다. 문제는 몸 안의 병을 수술 가위로 절제하듯이 우리 안의 불순한 것들을 잘라내는 배제는 정의, 도덕, 정통이란 미명 아래 자행되었다. 나는 다름이 틀림과 다르다는 순수한 생각으로 살아 있는 타자들을 하나로 묶어 포용의 논리로 싸 안고 싶다. 금을 새로 긋고 싶다. 다 포용하는 쪽으로. 그런 의미에서 오늘 아침 시는 <특수 상대성 이론>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주영헌
저 나무,
죽었는지 알았더니 새순이 돋고 잎사귀가 핀다.
반은 죽었지만, 반은 살았다.
삶과 죽음의 그늘이 함께 자란다.
노인,
낡은 보행기를 끌고 간다.
육십갑자 하고도 한참을 더 감아야 되돌아갈 수 있는 어린 날
보행의 초심을 기억하려는 듯
조심조심 발을 떼고 있다.
굳어 버린 왼쪽 발은
함께 보행하던 오른발의 진심을 되짚으며
뒤처지지 않으려 애를 쓴다.
공존(共存)이란
삶과 죽음이 서로의 등이 되어주는 일
생이 또 다른 생의 배후로
後생의 무게를 고스란히 지지해 주는 일
잘려나간 밑동에서 새 줄기 돋아난다.
노인이 아이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걷는다.
생(生)의
특수 상대성 이론.
글이 길어진다. 여기서 멈춘다.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쉽고 어려움도 똑같다. 쉬움은 어려움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쉬운 것이 되고, 어려움도 쉬운 것과의 비교, 즉 관계 속에서 비로소 어려운 것이 된다. 길고 짧은 것, 높고 낮은 것도 이런 식으로 이해애야 한다. 앞과 뒤도 그렇다. 어떤 위치가 본질적으로 앞이거나 본질적으로 변함없는 뒤이겠는가? 두 위치의 비교 속에서 어떤 위치가 앞이 되기도 하고, 또 뒤가 되기도 한다. 물론 소리도 없이 성(聲)이 있을 수 없고, 높낮이가 없는 그냥 소리(音)는 있을 수 없다. 원문을 보면, 유(有, 있음)와 무(無, 없음), 난(難, 어려움)과 이(易, 쉬움), 장(長, 긺)과 단(短, 짧음), 고(高, 높음)와 하(下, 낮음), 음(音, 일정한 음정을 가지는 노트)과 성(聲, 음정이 무시되는 노이즈), 전(前, 앞)과 후(後, 뒤), 이러한 모든 상대적 가치가 상생(相生), 상성(相成)하게 되는 것이다. 도올의 설명이다. 이러한 상생과 상성은 오직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써 고착 시키지 않는 가치의 개방성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이미 그것은 상도(常道)가 아니라고 말한 첫 구절에서 이미 가치의 고정성은 무너졌던 것이다. 신념, 신앙, 이 따위 말들이 절대주의적 질곡에 빠지면 무서운 인간세의 재앙이 된다는 거다.
'상도'의 입장에서 보면, 반대나 모순처럼 보이는 개념들이 서로 다를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빙긍빙글 돌아 고정된 성질로 파악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원론적 세계관을 벗고 양쪽을 동시에 생각하는 변증법적 사고 방식, 양쪽으로 대립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모순이 아니라 하나라고 보는 '양극의 조화', '반대의 일치'를 터득하라는 것이다. 노자는 이 세계를 반대되는 것들이 꼬여서 이루어지는 것을 본다. 즉 이 세계는 위에서 말한 대립쌍들이 서로 꼬여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이 우주의 존재 원칙이고 형식이라는 거다.
이 세계가 반대되는 범주들의 꼬임으로 이루어졌다면 그런 꼬임을 이루는 힘, 즉 운동력은 무엇인가? 노자는 <<도덕경>> 제40장에서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이라 답한다. 즉 "반대편으로 나아가려는 경향이 도의 운동력"이라는 말이다. 반대편으로 나아가려는 경향을 운동력으로 해서 반대되는 것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다는 거다. 이 운동력은 바로 자연이 본래적으로 갖추고 있다고 노자는 보는 거다.
이 자연의 형식에 따라, 나는 오늘 아침도 '되돌아감'을 되새긴다. 달도 차면 기울고,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이 된다. 아주 추운 겨울이 되면 다시 더운 여름으로 이동하고, 심지어 온 우주도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 이 모든 것은 어느 한 쪽으로 가다가 극에 도달하면 다른 쪽으로 가는 '도'의 원리에 따르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너무 그리워하지 말자. 때는 기다리면 온다. 이 변화의 우주 원리를 잘 보면, 우리는 잘 나간다고 좋아할 것 없다. 곧 내려가야 할테니. 일이 잘 안된다고 걱정할 일 없다. 떨어지면 반드시 올라가는 것이 우주의 진리이니까. 문제는 이 진리, 즉 반대의 힘으로 끌려간다는, 어려운 말로 "반자도지동"은 심란하거가 정신없이 바쁘게 살면 그걸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기다리면 봄도 오고, 코로나도 물러갈 것이라 믿는다. 사계절의 순환을 따르며 일상의 시간을 지혜롭게 살면 된다. 어떻게? 고미숙의 학습공동체 <감이당>의 네 개 모토처럼 살 생각이다. 게으름이 일어날 때 그 4개의 모토를 기억하며 마음을 챙길 생각이다. 도심에서 유목하기/세속에서 출가하기/일상에서 혁명하기/글쓰기로 수련하기.
(1) 도심에서 유목하기: 자본의 한 가운데서 자본에 포기되지 않는 길을 열어 가겠다는 것이다. 유랑은 이제 멈추고 진정한 유목을 할 생각이다. 나는 디지털 유목인(노마드)를 지난 해 많이 고민했다. 지난해 2019년 6월 22일과 6월 23일자에 이에 대한 글쓰기를 한 적이 있다. 유목은 유랑과는 다르다. 유랑이 그저 여기에서 저기로 흘러가는 거라면, 그래서 공간은 끊임없이 변이하지만 존재성은 달라지지 않는 거라면, 유목은 길 위에서 타자를 만나 스스로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2) 세속에서 출가하기: 난 프랑스에서 유학하며 배운 것이 세속주의(Laïcisme, secularism, 정교 분리)이다. 2019년 4월 6일부터 10일까지 글을 보시면 된다. 출가의 핵심이 노동, 화폐, 가족이라는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세속적 삶 속에서도 욕망의 변환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3) 일상에서 혁명하기: 지금까지 혁명은 늘 거대담론의 전망 속에서 시도되었고, 제도와 시스템의 혁신으로 귀결되었다. 그 결과 물질적 영역은 비약적으로 진화했지만, 사람들의 일상은 낡은 습속으로 반복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상과 습속의 뿌리는 욕망이다. 그것은 제도의 시스템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혁명의 시작은 일상이다.
(1), (2) 그리고 (3), 즉 유목, 출가, 혁명은 존재의 변환을 요구한다. 존재의 욕망의 재배치를 위해 존재의 '건너 가기'를 요구하는 키워드들이다. 이건 지금까지 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기, 다른 존재가 되기이다.
(4) 글쓰기로 수련하기이다. 글쓰기란 유목, 출가, 혁명을 위한 최고의 실천적 전략이다. 작년부터 이어지는 코로나-19의 팬데믹으로 사람들은 부와 성공, 성장과 개발을 향해 달려갔지만 그것이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바이러스의 전염으로 사람들이 만나기를 꺼려하고, 정부도 생활 속 거리 두기를 강조하며 만나는 일을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고독한 생활 속에서 삶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할 여유가 생겼다. 사람들은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단지 지식 자체가 아니라, 지식과 삶이 연결되는 지점을 알고 싶어 했다. 지식의 배치가 달라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시대 교육이 읽기와 쓰기의 동시성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쓰기를 배제한 채 읽기만 한다. 글쓰기가 배움의 핵심이자 정점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글쓰기를 한다면, 겨우 사람들은 일기, 수필, 독후감 정도이다. 글쓰기를 고작 감상적 토로나 자기 위안 정도로 여기는 것이다. 글쓰기는 삶의 지도에 관한 모든 것이 다 해당한다.
읽으면 써야 한다. 마치 들으면 말하고 전하는 것처럼. 인문학은 삶의 지도를 그리는 행위이다. 적당히, 대중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생에 대한 탐구를 대충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죽는다. 죽음에 대해 탐구 없이 이 생사의 바다를 건너갈 길은 없다. 죽음을 탐구하면서 사람이 달라져야 한다. 따라서 인문학은 대충대충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글쓰기는 모든 사람들이 수행해야 할 근원적 실천이 되는 것이다. 고미숙은 "인식을 바꾸고 사유를 전환하는 활동을 매일, 매순간 수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써야 한다"고 말한다. 쓰기를 향해 방향을 돌리면 그때 비로소 구경꾼이 아닌 생산자가 된다. 들으면 전하고, 말하면 듣고, 읽으면 써야 하는 것이다. 어느 하나에만 머무르면 기혈이 막혀 버린다. 막히면 아프다. 몸도 마음도 통즉불통(通即不通, 통하면 아프지 않다)이란 말이 있다. 그래 글쓰기는 양생술이 되는 것이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산다는 것/진상록 (0) | 2022.02.12 |
|---|---|
|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오규원 (0) | 2022.02.12 |
| 신년 기원/이성부 (0) | 2022.02.11 |
| 별 볼일 있는 별 볼 일/오은 (0) | 2022.02.11 |
| 착한 것을 착한 것으로 알아보는 자체가 착하지 않음이 있다 (0) | 2022.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