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2월 9일)

노자가 보는 세상의 모습을 <<도덕경>> 제2장 앞 부분에서 엿볼 수 있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천하개지미지위미, 사오이 ;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세상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아보는 것 자체가 추함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착한 것을 착한 것으로 알아보는 자체가 착하지 않음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어제 못한 이야기 우선 좀 이어간다. 노자는 처음에 심미적 가치를 거론하며, '미(美, 아름다움)'와 '오(惡, 추함)'를 대비시키고, 다음으로 윤리적 가치를 거론하면서, '선(善, 착함)'과 '불선(不善, 차하지 않음)'을 대비시켰다. 어제 우리는 '惡'를 '악'이라 읽지 않고 '오'라 읽고, 그것을 '악'이라는 실체를 지칭하는 의미가 아니라, 미움이 증오나 기피를 나타내는 마음의 상태라고 말했다. 도올은 우리가 맹자의 성선(性善), 순자의 성악(性惡)을 마음 놓고 대비시키는 오류를 우리가 범하고 있다고 했다. 순자는 '성악'을 말한 것이 아니라, '성오'를 말했을 뿐이라는 거다. 인간의 본성을 존재론적으로 악하다고 규정한 적이 없기 때문으로 본다. 인간이 왜 그렇게 혐오스러운, 미운 행동을 하는가에 대한 분석일 뿐이며, 그는 예의(禮義)에 의하여 그러한 혐오스러운 행동을 선한 본성으로 다시 되돌리려는 작위적 과정을 교육의 본질로 평가했 뿐이라는 거다. 도올의 주장이다.
우리가 사람을 평가할 때 "좋은 놈이다"라고 하든가 "저 놈은 좋지 못해"라고는 해도, "저 놈은 악한 놈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들의 의식구조 속에도 "선"의 반대는 "악"이 아니라, "불선"이다. "악(惡)"자는 "악이 아니라, '추할 오'이며, 그것은 '미'의 상대개념이다. 성경에서도 악을 실제적으로 의미하는 '죄', 그러니까 '죄악'에 해당하는 단어가 "하마르티아"인데, 이것은 궁술에서 쓰이는 단어로서 '과녁에서 빗나갔다"라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적인 주인공의 천성을 ‘하마르티아’라고 규정했다. 자신이 어제까지 가던 길을 옳다고 당연히 추정하고 그 길을 가는 행위다. 그런 마음이 ‘오만’傲慢이다. 오만은 자신에게 다가온 새로운 하루를 어제의 습관대로, 어제의 문법으로 이해하려는 억지다. 그리스도교의 기획자인 바울도 이 단어를 이용하여 ‘죄’를 설명하였다. ‘죄’는 '신이 정한 인간을 위한 최선의 길로부터 이탈하는 행위'이다. 그러니까 ‘죄’란 규율이나 교리를 어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한 목표의 존재에 대한 무시이고, 설령 안다 할지라도 매일 매일 실천하지 않는 게으름이며, 그 길로부터 이탈하는 행위다. 이 ‘죄’를 고대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hamartia)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죄는 나의 행위가 도덕적 선의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거다.
그러니까 노자의 생각은 아름다움에 대하여 추함을 말하는 것과 같은 태도로 우리가 선에 대하여 불선을 말해야 한다는 거다. 추함은 악한 것이 아니다. 추함은 그 자체로 적극적인 심미적 가치이다. 추함이 없으면 아름다움은 성립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요소들 간의 조화의 문제인데, 조화는 어떠한 경우에도 개념적인 고정성을 가질 수 없다. 조화는 역동적 관계이며, 역동적 관계는 반드시 '새로움'의 요소를 창출해야 한다. 이 새로움의 요소는 항상 추함의 계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도올의 명쾌한 설명이다.
마찬가지로 선에 대하여 불선을 말하는 것은 선 그 자체가 실체화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불선의 계기로 인하여 선함은 새로운 선함을 더해간다. 모든 인위적 가치는 역동적 상(常, 늘)의 세계 속에서 끊임 없이 새로운 조화를 창출해야 한다. 고정된 완벽한 조화보다는 새로움을 지향하는 불완전한 조화가 거 고등한 것이다. 선에 대하여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나 선의 고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올의 설명을 직접 들어 본다. "미가 곧 오요, 선이 곧 불선이다. 이렇게 철저히 가치를 개방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모든 상대적 가치의 대적적 관계를 상생적 관계로서 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시를 한 편 읽은 후 계속한다. 오늘 우리가 말하고 있는 도의 세계를 잘 보여주는 곳이 현관(玄關)이다. 현관은 출입구와 실내 사이에 있는 묘한 공간이다. 건물 내부지만 온전히 안이라 하기엔 조금 애매하다. 현관은 건물의 규모에 따라 크거나 좁고, 화려하거나 수수하다. 아예 없기도 한데, 이때 둘 데가 마땅찮 은 것이 신발이다. 현관의 주인은 신발이다. 신발은 사람과 땅의 직접적인 대면을 막아준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옴으로써 더러운 것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지한다. 현관은 외부와 내부의 경계, 외출과 귀가의 반복적인 변화를 상징한다. 오늘의 화두에 어울리는 시를 찾아 기쁘다. 사진은 내가 자주 가는 산책 길이다.
현관/강기원
나는 밤의 현관에 서 있는 사람
현관에 고인 찬바람 속의 사람
한 발은 안에
한 발은 밖에
가물가물 걸치고
가만히 서서 발에 물집이 잡히는 사람
고개 든 채 잠든 오령의 멧누에 꿈속처럼
무릎 없이 변모를 기다리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이 시를 소개한 김정수 시인의 덧붙임이다. "이 시에서 현관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고, “나는 밤의 현관에 서 있”다. 낮이 삶이라면, 밤은 죽음이다. 한 발을 밖에 걸친 나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다. 오령(五齡)은 누에가 네 번째 잠을 잔 뒤 고치를 짓도록 마련한 섶에 올릴 때까지의 사이를, 멧누에는 산누에를 말한다. 우화(羽化)할 때가 됐음에도 현실에 안주하는, 길들지 않는 야성이 내면에 존재함에도 ‘변모’만 기다리는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현관을 나서지 않으면서 자유인의 삶을 동경한다."
글이 길어진다. 여기서 멈춘다.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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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故有無上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고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교,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이어지는 문장이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며, 긺과 짧음은 서로 겨루며, 음과 소리는 서로 어울리며,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도올 김용옥)고 했다. 오강남은 이렇게 번역했다. "그러므로 가지고 못 가짐은 서로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 어렵과 쉬움도 서로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 길고 짧음도 서로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 높고 낮음도 서로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 악기 소리와 목소리도 서로의 관계에서 어울리는 것, 앞과 뒤도 서로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흥미로운 말이다. "유무상생(有無相成)"이란 말부터 보자. 모두 상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개념이라는 거다. "유무상생"은 노자가 말하는 세상의 원리이다. 없음과 있음은 대립의 개념이 아니고, 없음이 있기에, 있음이 존재한다는 거다. "유무상생"은 두 줄로 꼬인 새끼줄을 이 세계, 아니 우주의 원리라는 거다. 나는 타인, 환경 등 객체와 분리된 개념이 아닌, 함께 할 때, 그 존재가 무엇인지 이름을 가진 언어로 말할 수 있다. 상호 보완, 상생의 존재로 보아야 한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은 인간이 만들고, 이름을 붙여서 존재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문장은 내가 늘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는 문장이다. '모든 것은 우주 전체의 조화로운 음과 양의 원리와 상호 관계에 따라 순리대로 되어갈 뿐이다.' 그냥 한 문장이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세상을 이해하는 답이 그 속에 들어 있다. 우주에는 하나의 로고스(原理)가 있는데, 그게 조화롭다. 그런데 고지식하게 그 원리에 따라 우주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계가 있다. 관계론이 나온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관계적' 태도로 하루를 사는가에 따라 일이 순리(順理)대로 가느냐 아니면 그 반대가 된다. 자연은 양면성이 있다. 오르막 내리막 모두 같은 길이다. 자연은 대립면의 꼬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역』 에서 말하는 음과 양의 대립, 노자가 말하는 무와 유의 대립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노자는 이것을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고 한다. '무'와 '유'는 같은 '도'에서 나왔지만 이름이 다를 뿐이다. '무'와 '유'가 한 몸으로 이루어지는 과정, 찰나, 경계에 도가 존재한다.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가 밝을 ‘명(明)'자이다. ‘밝다'의 반대는 ‘어둡다'이다. 명자를 풀이하면, 달과 해가 공존하는 것이다. 해를 해로만 보거나, 달을 달로만 보는 것을 우리는 흔히 '안다'고 하며, 그 때 사용하는 한자어가 지(知)이다. 안다고 하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평생을 안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고 외치다 죽은 이유를 난 알겠다. '명'자는 그런 기준을 세우고, 구획되고 구분된 ‘앎(知지)’를 뛰어 넘어, 두 개의 대립면을 하나로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것은 명확하지 않은 경계에 서거나 머무는 일이다. 이런 경계에 있는 자는 고독하다. '유'와 '무'를, '해'와 '달'을, '양'과 '음'을 동시에 품은 자는 '인위적으로 구분된 절반의 세계'만을 가진 자들과 달리 '홀로' 고독하다. 양쪽을 품은 경계에 선 신비적 존재는 고독하다. 고독한 자는 개방적이고, '인위적 절반의 세계"에서 편안한 자는 폐쇄적이다.
언젠가 적어 두었던 자작시이다.
유무상생/박수소리
산다는 것은 '비틀기'이고, 삶은 '꼬임'이다.
삶의 모든 시도들은
지금보다 더 나아지려는 율동이다.
우리는 우주가 완벽한 원운동을 하는 것이 진실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케플러는 행성이 원운동을 하지 않고 타원운동을 한다고 말했다.
원은 기하학적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조작된 진실일 뿐이다.
진실은 원이 아니라, 타원이다.
원에는 에너지가 없지만, 타원에는 힘이 있다.
평면적이고, 정지된 지성에게 힘이 포착되기 어려운 것과 같다.
어떤 존재에나 힘이 작용하면 절대 균형이 깨지고 뒤틀림이 가미된다.
타원이 그렇다.
균형을 깨는 탄성*이 바로 힘이다.
동물들이 먹잇감이 발견되면, 즉시 몸을 비틀어 자신의 절대 균형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탄성을 준비한다.
여기서 힘이 나온다.
그 탄성이 적중(的中)이라는 최종적인 완성을 보장할 것이다.
적중은 몸을 비틀어 꼬임의 상태로 스스로를 몰고 가서 '동작'으로 생산되어야 만날 수 있는 최종 경지이다.
여기서 자신을 비틀어 꼬이게 하는 움직임은 불균형이고 동작이고 힘이다.
그래 시는 불균형이도 동작이고 힘이 된다.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이러한 움직임의 이유는 생존이다.
인간 활동 핵심 동인은 생존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생존 전략의 일환이다.
생존을 도모하는 최초의 활동을 우리는 분류로부터 시작한다.
효율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우리는 분류한다.
그리고 이렇게 이루어진 구분에 지속성을 부여하여 전승하기도 한다.
이 구분을 통해, 우리는 경험을 통제하는 능력을 축적한다. 이를 우리는 '지적활동'이라고 한다.
지적이라는 말은 경험을 통제하는 일관된 형식이다.
인간의 성숙도 지적인 능력의 개발과 연관된다.
지적인 사람이 더 잘 생존할 수 있다.
그런데, 지적인 사람들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더 강한 사람이 있다.
은유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시를 읽는 사람이다.
지적인 활동 자체를 확장하여 분류의 틈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훌쩍훌쩍 건너뛰는 것이다,
아무 관계도 없는 이질적인 것들을 서로 연결하여 소통시켜 버린다.
인간에게 의미의 확장은 통제 영역의 확장이다.
은유를 통해 세계를 넓혀나가는 이가 '위대한 개인'이다.
네루다는 이를 '메타포라고 말한다.
그 메타포, 은유는 '비틀기'라 말할 수 있다.
은유는 뒤틀린 틈새를 허용하고, 또 끼어들어 둘은 상대방을 의지하며 새로 태어난다.
둘이 꼬인 것이다. 우린 이렇게 꼬여가면서 영토를 확장해 나간다.
"이 세계는 힘이 작동하는 비틀기로 꼬여 있다"고 노자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겠다. 음과 양으로.
전혀 관계 없었던 무엇과 꼬이고 또 꼬이며 영토를 확장하고, 또 확장해 나갈 때,
우린 힘을 얻고, 힘찬 모습이 된다. 이를 노자는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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