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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불언지교(不言之敎): 말로 하지 않는 가르침

1893.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2월 4일)

 

입춘, 봄이다. 동지(冬至)가 지나면 노루 꼬리만큼 씩 하루 해는 길어지고 추위의 절정인 대한(大寒)을 지나면 응달 진 골목에 드는 햇살에서도 온기가 살아날 것이다. 겨울은 아직 자리를 내줄 생각이 없는지 한기를 뿜어내고 있지만, 봄은 물러설 것 같지 않은 겨울을 헤치고 따스한 빛으로 찾아올 것이. 사람들은 입춘에 날씨를 보며 그해 농사가 풍년일지 아닐지 점쳐보았고,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이라고 써 붙이며 한 해 동안 무탈하기를 기원한다.  나는 대단한 것을 원지 않는다. 그냥 자연의 변화, 즉 순리(順理)대로 돌아가는 것이 세상임을 알고 있기에, 나는  혹여 넘어진다면 다시 일어설 힘을 남겨 달라고 빌고 싶다. 

어제 <인문 일기>에서 노자가 꿈꾸는 성인, 내 방식대로 하면 진정한 자유인은 다음 여섯 가지를 실천한다.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일이라 본다.
① 무위지사(無爲之事)하고
② 불언지교(不言之敎)하고
③ 만물작언이불사(萬物作焉而不辭)하고
④ 생이불유(生而不有)하고
⑤ 위이불시(爲而不恃)하고
⑥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하고, 부유불거(夫唯弗居)하면, 시이불거(是以弗居)하다.

이를 한국어 말하면, 성인, 즉 자유인은 "① 무위로써 일을 처리하고, ② 말로 하지 않는 가르침을 수행한다. ③ 모든 일이 생겨나도 참견하지 아니하고, ④ 낳으면서 소유하지 않는다. ⑤ 할 것 다 되게 하면서도 거기에 기대려 하지 않고,  ⑥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을 주장하지 않는다. 공을 주장하지 않기에 이룬 일이 허사로 돌아가지 않는다."

우선 "무위지사"란 말은 '함이 없는 함'으로 풀어 볼 수 있다. 그래도 '무위'라는 말이 쉽게 와 닿지 않는다. 그런데 도올의 설명이 좋다. "'무위'는 '위(爲, 함)이 부정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명의 최대 특징은 살아있다는 것이고, 살아있음은 그 자체로서 위(爲)가 되는 것이다. 즉 무엇인가 행동해야 하는 거다. 따라서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위(爲), 즉 '함(doing)'의 존재이다. 그러니까 '무위'라는 것은 '함이 없음'이 아니라. '무(無)적인 함'을 하는 것이다. 생명을 거스르는 '함'이 아닌, 우주 생명과 합치되는 창조적인 '함'이며,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함)에 어긋나는 망위(妄爲)가 없는 '함'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노자는 우리들에게 "무위지사(함이 없는 함)" 속에서 살라고 권유하는 거다. 무위에 대비되는 유의, 즉 무엇인가 자꾸 억지로 하려 하지 말고, 내버려두면 저절로 풀려나간다는 거다.

그리고 성인, 즉 자유인은 "말이 없음의 가르침(불언지교)"을 행한다고 했다. 훌륭한 가르침은 '불언(不言)'의 가르침이어야 한다. "교육이란 다양한 각도에서 여러 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자신에게만 있는 고유한 힘을 발견하고 그것을 키우며 살게 해주는 것이라고 본다. 여기서 위대하고 창의적인 모든 결과가 출현한다고 믿는다. 밖에 있는 별을 찾아 밤잠을 자지 않고 노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바로 별이라는 것을 알게 해줘야 한다. 자신이 바로 별이라는 것 혹은 자기에게만 있는 자기만의 고유한 별을 찾게 해주는 것이다." 언젠가 최진석 교수의 글에서 읽은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불언지교'이다.

'불언지교'란 말로 알 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 느끼고 직접 자기만의 별을 찾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름 불러 주기를 통해, 고유한 자신의 이름 앞에서 이 세계에서 유일한 존재로 등장하는 경험하게 하는 거다. 그러면 피교육자는 자기가 자기로 존재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고 본다. 말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말로 가르치려 한다.
- 너 자신이 별이다.
-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다.
- 이 세계에서는 바로 네 자신이 주인이다.
- 일반명사로 살지 말고 고유명사로 살아야 한다.
- 너에게만 있는 궁금증과 호기심을 발휘해야 창의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 대답보다는 질문을 잘해야 한다.
- 독립적인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런 말 대신,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 나는 내가 우리 속에서 용해되지 않고, 고유한 나로 존재하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거다. 그리고 어떤 행위를 지적하여 교정하도록 말하기 보다는 상대가 스스로 교정하도록, 팩트만 이야기 한다. 행위를 교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의 지시보다는 사실만을 말 해 주고, 스스로 교정하는 기회를 갖게 해주는 일이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행위 속에서 주인 자리를 자기가 차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일이다. 이게 노자가 말하는 "성인聖人은 '불언지교不言之敎'를 행한다"는 말이 아닐까?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성인은 자연의 운행과 존재 형식을 모델로 삼는 가장 높은 수준의 인격자로 진정한 자유인이다. 그리고 "불언지교"는 노자의 핵심사상인 '무위無爲'적 행위 가운데 한 유형이기도 하다. 무위(無爲)라는 말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상대가 과중하게 느낄 정도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나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노자는 "무위지사"의한 짝으로 "불언지교"를 제시한다. 여기서 무위와 불언은 상통하는 것이다. 제1장에서 이미 노자는 "도가도비상도"를 말함으로써 인간의 언어나 개념에 대한 불신을 토로했다. 이성이나 논리의 허구성도 경계했다. 따라서 그러한 상도(常道)에 대한 진실을 확신하는 자는 인생살이에서도 '언(言)'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가르침도 "언(言)'을 통하지 않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이다. 논리로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 하지 않고, 말 없는 솔수수범으로 가르치는 거다.

언(言)은 개념적으로 규정하거나 정의를 내리는 방식의 언어활동을 의미한다. 종합하면 '불언의 가르침'이란 침묵의 가르침이 아니라, 개념적으로 규정하거나 내용을 정해 주는 가르침을 행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불언지교"가 행해지는 맥락 속에서는 행위자나 피교육자가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 등장한다. 책임성을 가진 독립적 주체로 등장한다. 그래야, 우리는 별을 찾아 평생을 헤매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바로 별이라는 것을 아는 힘을 가질 수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다른 이의 이름을 불러주고, 사실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이런 일의 밑바탕에는 '사랑의 힘'과 믿음, 즉 신뢰가 필요하다. 이 사랑과 신뢰의 힘이 "불언지교"를 행하게 한다. '사랑의 불언지교는 교육의 공이 피교육자에게 돌아가게 할 수 있을 때 완성된다. 교육의 공을 차지한 사람이라야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생명력을 발휘하여 비로소 이 세계에 우뚝 서는 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성인은 "무엇을 해도 반드시 자기 뜻대로 하려 하지 않기"를 행하는 자이다. 그는 특정한 이념이나 가치관으로 강하게 무장하여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반드시 실행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주도권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있을 때라야 그려질 수 있는 풍경이다. 이건 신뢰(信賴)의 문제이다. 영화나 모든 예술이 다 그렇다. 예술가가 예술 향유자의 수준을 믿어야 한다. 신뢰의 문제이다. 믿지 못하면, 예술가의 의도를 못 믿을까 봐 일일이 설명한다. 예술은 소비자가 참여할 수 있는 여백이 만들어져야 한다. 영화의 경우로 들면, 관객이 영화 스토리에 직접 참여하여 함께 구성하는 형식이 아니라, 감독의 '일방통행'을 구경했다는 느낌만 남게 하는 경우에 그 영화는 재미가 없다. 감독의 강압성만 있고 관객의 자발성이 없어진다. 관객은 없고 감독만 남는 형국이 된다.

자식과 부모와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불신하면, 갈등이 생긴다. 이는 모두 기준 때문이다. 노자는 제17장에서도 "말을 아끼라"고 말한다. 바로 '잔소리'를 줄이라는 말이다. 잔소리는 지켜야 할 것을 부과하는 이념이나 기준이다. 이것을 줄이는 일은 잘못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다. 예를 들어 자식 삶의 주도권을 부모가 갖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갖도록 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자발성이 일어나고, 스스로의 존재적 자각이나 자부심이 더 크게 자리한다. 

"불언지교"에 대한 사유를 하면서, 언젠가 들었던, '아이들은 잔소리보다 어른의 뒷모습을 보고 자라고 배운다"는 말이 생각에 떠올랐다. 그런 뒷모습들이,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이다.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반칠환

보도 블록 틈에 핀 씀바귀 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다른 글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서 보실 수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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