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2월 3일)

<유튜브(YouTube)>라는 매체는 혁명적이다. 하루 종일 원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하고, 또 원하는 강의를 무료로 무한대로 듣게 한다. 최근에 만난 도올 김용옥 교수님늬 <노자 강의>는 나를 자꾸 산책에 나가게 한다. 산책하면서 그의 강의를 듣는 것은 매우 큰 기쁨을 준다. 그동안 어렴풋하게 알던 동아시아의 노, 장 철학을 좀 알게 해주고, 동시에 그것이 내 영혼을 살찌운다. 그러면서 정신의 근육이 튼실해 지는 것 같다. 그리고 집에 들어 와 그의 책, <<노자가 옳았다>>를 펼쳐 보며, 미진한 것을 이해하고, 좋은 구절을 반복해 읽어 보는 것은 '지적 희열'이다. 혼란스러운 세태에 내 일상의 삶에 방향을 정해준다.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는 폭과 깊이를 더해 준다. 그리고 내 시선을 높여 주어, 다른 이와 세계를 더 포용하게 한다.
도올의 강의와 그의 책 그리고, 다른 분들이 쓴 <<도덕경>>을 비교하며, 원문을 꼼꼼하게 일어 볼 생각이다. 그러면서 내 <인문 일기>에서 적어도 하루 한 문장을 뽑아 사유를 해 볼 생각이다. 도올은 자신의 책 제목을 <<노자가 옳았다>>로 정했다. 그러면서 1장에서 37장까지를 '윗벼리'로 "길의 성경"이라 하고, 38장부터 81장까지를 '아랫벼리'로 "얻음의 성경"이라 구분을 했다. 도(道)와 덕(德)이라는 대신에 "길과 얻음"이라는 표현을 했다. 나는 "길"은 "상도(常道)"를 구현하는 길로 파악했고, 그 길에서 얻는 이득, 즉 얻음이 "덕"이라 보았다. 일상에서 '도'를 실천하며 구현하면, '덕'을 얻는 거로 보았다. '덕'을 나는 무엇을 얻는 '이득'과 같이 보았다.
공자는 "덕필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라는 말을 했다. 덕이 작동되는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반드시 그 향기에 감화되어 따르는 사람들이 얻게 된다. 덕이 있는 사람은 매력이 있고, 그 매력이 강한 카리스마를 만들어 지배력을 얻게 한다. 덕은 얻음이다. 그런 덕을 키우려면, 아주 구체적인 일상의 일을 잘 관리하는 힘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덕의 표현이 된다. 구체적 세계와 그에 대한 접촉 수준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낸다. 예컨대, '주워들은 소문을 여기저기 옮기고 다니는 것'이 덕이 없다는 것이라고 공자는 말한다. 덕을 발휘하는 사람은 넓고 근본적이지만, 재주를 발휘하는 사람은 대개 자신만의 신념이나 지적 체계에 갇혀 좁고 고집스럽다. 이들을 공자는 덕을 망치는 '향원(鄕原)'이라 했다.
노자가 꿈꾸는 이상형은 성인(聖人)이다. 나는 이 성인을 내가 꿈꾸는 '자유인'으로 읽는다. 우리 말로 성인하면 '윤리적으로 완벽한 사람' 정도로 생각하기 쉬우나, 성인의 본래 뜻은 이런 윤리적 차원을 넘어, 말하자면, '특이한 감지 능력의 활성화'를 통해 만물의 근원, 만물의 '참됨', 만물의 '그러함'을 꿰뚫어보고 거기에 따라 자유롭게 물 흐르듯 살아 가는 사람을 말한다고 본다. 성인의 성(聖)자를 다음과 두 가지로 푼다. 사전에서의 해석이 우리를 오해하게 한다. '성(聖)'을 "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을 만큼 고결하고 거룩함"으로 풀이하기 때문이다. 어떤 초월적인 존재적 실체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도올은 성인을 '귀가 밝은 사람", "소리를 잘 듣는 사람"으로 본다. 소리를 잘 듣는다고 하는 것은 고대사회에서 일차적으로 신의 소리를 잘 듣는 거다. 그러나 오늘날 인문정신으로 말하자면 사람의 소리를 잘 듣는 거다. 다시 말해 그런 사람은 총명한 사람이고, 지혜로운 사람이다. 더 나아가, 노자의 생각은 신의 소리를 잘 들을 줄 알고, 사람의 소리를 잘 알아듣는 자만이 통치의 자격이 있다고 본다. 타자를 다스린다는 것은 당연히 타자의 소리를 들을 줄 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신의 계시(드러날 정, 呈)를 듣는다(이, 耳)는 것이다. 신의 계시를 듣는다는 것은 곧 인류역사의 보편적 정칙을 깨닫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깨달은 것이 바로 지혜이다. 이 지혜를 얻어야 우리는 자유인이 된다.
유교에서 말하는 성인과 노자의 성인은 다르다. 유교의 성인은 세속적 도덕규범의 완성자지만, 노자가 말하는 성인은 그러한 도덕 규범을 초월하는 상도(常道)의 내재적 생명 가치를 구현하여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자이다. 어원적으로 귀가 밝아 보통 사람이 감지하지 못하는 것도 잘 감지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이다.
이런 성인은 '무위(無爲)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무위지사(無爲之事) 속에서 사는 사람이다. 무위(無爲)는 말 그대로 하면 행위가 없음(non-action)이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무위도식 하거나 빈둥거린다는 뜻이 아니다. 도올에 의하면, 여기 '무'를 '없다'라는 명사로 보지 말고, '지운다', '버린다'라고 하는 동사로 보라 한다. 나는 그래 '무'를 그냥 없는 게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 비우거나 버리는 것으로 보았다. 나는 법정 스님이 말하는 무소유도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게다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의 물성(物性)을 지키는 것으로 본다.
무위의 반대되는 개념이 유위이다. 보통 인=간사에서 발견되는 것들로 무엇인가를 자꾸 하면 할수록 사태가 엉클어져 가는 상황을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쉽게 느낄 수 있다. 다음 같은 행위들이다.
• 인위적 행위
• 과장된 행위
• 계산된 행위
• 쓸데 없는 행위
• 남을 의식하고 남 보라고 하는 행위
• 자기 중심적 행위
• 부산하게 설치는 행위
• 억지로 하는 행위
• 남의 일에 간섭하는 행위 등 일체의 부자연스러운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거다.
무위지사(無爲之事) 또는 무위지위(無爲誌爲-무위의 위)는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너무 자발적이어서 자기가 하는 행동이 구태여 행동으로 느껴지지 않는 행동, 그래서 행동이라 이름할 수도 없는 행동으로 '함이 없는 함'이다. 이런 무위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보이는 모습은 내일 이야기로 넘긴다. 어쨌든 나는 이런 무위를 실천하는 자유인이고 싶다. 그게 노자가 꿈꾸는 '성인'이라고 본다. 그 성인이, 인문 운동가의 입장에서 보면, 자유인이다. 진정한 자유인은 자기 확신과 자기 존경으로 탁월(자유자재함)을 수련하여 어제보다 아는 나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 반대 어제와 똑같이 주위의 인정에 목마른 자발적인 노예이다.
새해의 기도/손희락
소유하기보다
버리게 하시며
움켜쥐기보다
놓을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쇠사슬 무거워
하늘 날 수 없으니
탐욕의 굴레 벗은 내 영혼
단 한 번이라도 자유하게 하소서
악취로 썩어가는 옷들
벗어던지게 하시고
최초 에덴의 벌거벗음으로
복귀하게 하소서
굳이 걸쳐야 한다면
비바람 막을 수 있는
사랑의 옷 한 벌
그것으로 족하게 하소서
풀 버전은,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자유(自由)는 말 그대로 하면 '스스로 말미암는 것'이지만, 1차적으로는 신체적 억압이 제거된 상태일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내가 스스로에게 이유가 되어 하는 언행은 거침이 없다. 자유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데서 출발한다. 삶에서의 많은 문제들은 자신의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데서 나온다. 자기 인식이 우선이다. 자기 인식은 자신을 알려는 마음가짐이고 그 마음가짐을 가지고 자신을 항상 응시하려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노력을 하지 않고 사제나 목사에게 달려가면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다.
우리는 실제 삶에서 쉽게 자유를 포기하고, 어떤 외부 권위에 의존하려 한다. 외부 권위는 명령하고 억압하고 부자연스럽고 억지일 때가 많다. 우라 사회는 우연히 부여잡은 권위를 가지고 휘두르며 다른 이에게 명령하며 복종하라고 윽박지른다. 그러나 세상의 변혁은 한 번도 이념, 정책, 교리, 리더의 카리스마를 통해 성취된 적은 없다. 자유를 위해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두어, 자신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에 대한 관찰을 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 뿐만 아니라, 주변인들과 관계에서, 그들이 반응하는 자신을 응시하여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스스로 수정하려는 수고를 하는 일이다.
내가 살고 세상은 내가 스스로 변혁할 때, 비로소 변하기 시작한다. 세상의 변혁은 외부의 권위가 만들어 주지 않는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무식한 것이다. 자기 변혁은 자기가 누군인지 알려는 수고의 부산물이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올바른 말과 행동이 나올 수 없고, 자기 변혁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마음의 움직임에 대한 면밀한 관찰에서 시작한다. 나는 내가 오늘 마주치는 정보들과 사람들을,내가 경험하여 획득한 나의 시선이라는 색안경으로 볼 수밖에 없지만, 편견을 가진 내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고 인식하는 것이 자유로운 인생의 시작이라고 나는 믿는다. 신념과 이념처럼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는 없다고 믿는다. 자기 인식을 토해 얻은 자유는 나에게 자연을 편견 없이 탐색할 수 있는 여유를 선물한다. 자유로워야 조급해 하지 않고, 초조해 하지 않고, 여유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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